설리. 사진=박정훈 기자
설리와 가까운 친구인 가수 아이유는 10월 18일 소속사 카카오엠을 통해 악플을 유포하는 누리꾼을 고소했다. 카카오엠은 “아이유를 향한 무분별한 악성 댓글과 허위 사실 유포로 인한 명예훼손, 성적 희롱과 인신공격의 정도가 매우 심각하다고 판단해 법적 대응을 진행한다”고 밝혔다. 법무법인 신원을 선임해 10월 14일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 1차 고소장을 접수한 아이유는 온라인 모니터 등을 거쳐 추가 고소도 진행할 방침이다. 카카오엠은 “악의적인 비방 행위에 대해 협의나 선처 없이 강력히 대응할 것”이라며 “무분별한 악성 댓글 근절을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하겠다”고 선언했다.
연예인들이 악성 댓글을 지나칠 수 없는 이유는 이들이 생활하는 환경, 직업적인 스트레스가 만든 심리적·정서적 불안감 때문이다. 특히 설리처럼 10대 때 데뷔하는 대다수 아이돌은 경쟁이 치열한 연예계 생활을 통해 불안이나 우울증 등에 노출될 가능성이 크다. 그룹 신화의 멤버 김동완은 10월 16일 SNS(사회관계망서비스)에 “어린 친구들이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자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건강하고 밝은 미소를 (대중에) 보이길 바라는 어른들이 많다(중략)”며 “본인이 원하거나 혹은 빠른 해결을 위해 향정신성의약품 같은 약물을 권유하는 일을 더는 방관해서는 안 된다”고 꼬집기도 했다.
실제로 공황장애나 우울감을 호소하는 이들도 여럿이다. 심리적으로 불안한 상태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악성 댓글과 혐오성 짙은 인신공격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가수 수지, 구하라, 방탄소년단(BTS) 등 아이돌 스타들이 악성 댓글에 맞서 ‘악플러와의 전쟁’을 멈추지 않는 이유다.
설리의 죽음 뒤 ‘악플방지법’을 만들자는 여론이 급속히 확산된 배경도 ‘더는 방관하면 안된다’는 공감대가 전방위적으로 형성됐기 때문이다. 10월 15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인간다운 삶을 위해 최진리법을 만들어주세요’라는 청원이 올라오면서 여론 형성은 본격화됐다.
이 청원인은 “연예인이 아니더라도 특정 누군가를 표적으로 삼아 마녀사냥으로 인권을 훼손하거나 일상생활이 불가능하게 만드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네이버, 다음 같은 포털사이트에 노출되는 기사에는 ‘댓글 실명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연예매니지먼트협회도 성명을 내고 “한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고 그 가족과 주변인까지 고통 받게 만드는 ‘사이버 테러’ 언어폭력을 더 이상 묵과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문체부 장관 “책임감 느낀다”…관련법 가능성은?
설리의 죽음을 계기로 확산된 악성 댓글과 혐오 공격의 심각성은 이번 국정감사에서도 핫이슈로 떠올랐다. 10월 21일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의 문체부 국정감사에서 더불어민주당 우상호 의원은 “설리가 불행하게 희생됐다”며 “극단적인 선택만 하지 않았을 뿐 지금도 악플에 시달리며 고통을 호소하는 대중문화인들이 한둘이 아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우 의원은 재발 방지 대책으로 ‘악플방지법’과 ‘인터넷 실명제’를 꺼냈다. 국감에서는 악플을 ‘표현이 자유’ 영역으로 분류할 수 없다는 지적도 나왔다. 이에 박양우 문체부 장관은 “(설리의 죽음에) 책임감을 느낀다”며 “표현의 자유와 개인의 사생활 보호를 위해 과기부를 비롯한 관계 부처와 시민들의 의견 모아 (대안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10월 21일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국정감사에 참석한 박양우 문체부 장관은 “(설리의 죽음에) 책임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사진=이종현 기자
‘악플방지법’의 핵심은 인터넷 실명제 여부에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당초 인터넷 실명제는 2007년 도입됐지만 2012년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으로 폐지됐다.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를 등록하는 방식의 인터넷 실명제가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킨다’는 게 위헌 결정의 배경이다. 하지만 2012년 이후 악성 댓글은 더욱 악랄하게 진화했고, 피해가 걷잡을 수 없이 속출하면서 ‘한계치’에 도달했다는 여론이 힘을 얻고 있다.
움직임은 즉각적이다. 국회 과학기술방송통신위원회 소속 박선숙 바른미래당 의원은 ‘정보통신망법 개정안’, 일명 ‘설리법’ 발의를 통해 차별 및 혐오성 표현을 담은 게시물이나 댓글을 플랫폼 사업자가 인지해 삭제하는 법안을 준비하고 있다. 누리꾼의 자발적인 인식 변화를 넘어 플랫폼 사업자의 책임을 강화하자는 취지까지 담아 주목받고 있다.
인터넷 포털 다음을 운영하는 카카오도 이에 발맞춰 여민수·조수용 공동대표 명의로 25일 “연예 섹션 뉴스 댓글을 잠정 폐지하고, 인물 키워드에 대한 관련 검색어도 제공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일각에서는 ‘악플방지법’에 그치지 않고 ‘차별금지법’ ‘혐오금지법’으로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실제 악성 댓글 피해 연예인의 대부분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혐오의 대상에 놓이거나 성폭력성 비난을 받아왔다. 여성을 대상으로 무감각적으로 자행되는 성희롱 등 디지털 성폭력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그 실태를 점검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사진=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 캡처
최근 3∼4년 동안 설리와 관련해 때마다 쏟아진 온라인 기사가 이를 증명한다. 설리가 개인 SNS에 올린 사진이나 영상을 그대로 베껴 옮긴 내용이 대부분인 이런 기사는 외모와 의상에 대한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평가로 도배됐다. 관음적인 시선으로 점철된 온라인 기사들은 악성 댓글을 무한 양산했고, 익명성에 숨은 집단적인 희롱과 혐오에 터전을 제공하는 악순환으로 이어졌다.
건국대 몸문화연구소 윤김지영 교수는 “온라인 성희롱은 악성 댓글로만 국한할 수 없다”며 “여성 아이돌의 영상을 성적으로 편집하고 합성해 유포하는 유튜버, 엔터테인먼트산업이 여성 연예인을 상품화하는 과정, 이를 바라보고 전달하는 언론의 시선 등 ‘콘텐츠 생산자’까지 아우르는 근본적인 점검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해리 스포츠동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