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 사진=연합뉴스
지난 21일 신세계그룹이 이마트 부문 2020년 정기 임원인사를 단행했다. 신세계그룹은 매년 12월 초 임원인사를 실시해왔다. 올해 예외적으로 이마트 부문만 인사를 한 달 이상 앞당긴 것이다. 시기도 일렀고, 인사폭에 있어서도 대대적인 인적쇄신이 이뤄졌다. 이갑수 이마트 대표이사를 비롯해 부사장보, 상무, 상무보 등 임원 11명이 교체됐다. 지난해 6월 말 기준 임원 49명 중 11명을 한꺼번에 교체했다.
이갑수 대표가 떠난 빈자리에는 컨설팅업체 베인앤드컴퍼니의 소비재 유통부문 파트너 출신 강희석 대표가 선임됐다. 이마트 대표직에 외부인사가 영입된 것은 신세계 창사 26년 만에 처음이다. 강희석 신임 대표는 이마트를 오랜 기간 컨설팅해 내부사정에 정통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그동안 디지털 유통전쟁과 관련 차별화된 사업모델을 강조해와, 최근 이커머스와의 격전 속 역성장에 빠진 이마트의 변신을 이끌 적임자라는 평가다.
신세계 측은 이번 인사의 특징에 대해 “기존 고정관념을 벗어나 젊고 실력 있는 인재를 과감히 기용했다. 철저한 검증을 통해 성과주의·능력주의 인사를 더욱 강화했다”고 밝혔다. 또한 이번 임원 인사와 조직 개편을 통해 조직 내 강력한 변화와 혁신이 추진될 수 있도록 조치했다고 덧붙였다.
이마트의 이번 파격인사를 두고 실적 악화에 따른 경영 위기의식이 반영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실제 이마트는 위기를 겪고 있다. 지난 2분기 창사 이래 처음 분기 적자를 냈다. 영업손실 299억 원에, 당기순손실 266억 원을 기록했다. 이에 따라 올해 상반기 매출은 9조 1664억 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13.2% 늘었지만, 영업이익과 반기순이익은 444억 원과 431억 원으로 각각 78.5%와 80.4% 급감했다.
어닝쇼크로 주가는 급락했고, 신용등급도 하락했다. 이마트 주가는 지난해 3월 32만 3500원까지 올랐지만 같은해 11월 20만 원선이 무너졌고, 현재는 그마저도 반토막 나 10만 원대 초반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25일 종가 기준 이마트 주가는 11만 5500원에 머물렀다.
해외 신용평가사는 이마트의 신용등급을 투자등급 최하단으로 평가했다. S&P(스탠더드앤푸어스)는 이마트에 BBB-를, 무디스는 Baa3를 부여하고 있다. 지난 8월 무디스는 이마트 등급 아웃룩도 ‘부정적’으로 내리면서 “상당한 규모의 디레버리징이 이뤄지지 않으면 수익성 악화로 인해 차입금이 지속 증가할 것으로 전망”이라고 설명했다. 투기등급 하락 위기인 셈이다. 한국기업평가 역시 지난 5월 이마트 신용등급 전망을 ‘안정적’에서 ‘부정적’으로 하향했다.
세대교체뿐 아니라 실적악화에 따른 문책성을 띠고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이번에 퇴진한 이갑수 대표는 1982년 신세계에 입사, 1999년 이마트로 자리를 옮겨 2014년 이마트 대표에 취임했다. 2017년 한 차례 연임하며 5년 가까이 정용진 부회장을 보좌해왔다. 이 대표의 임기만료는 내년 3월까지였다. 임기가 6개월도 남지 않은 상황에 물러나게 된 것이다. 이 대표는 최근 이마트 실적이 급격히 악화하면서 어려움을 겪었다고 전해진다.
이마트24 매장 전경. 사진=고성준 기자
임원진의 실적 부진에 대한 책임 및 문책과 별도로, 일각에서는 정용진 부회장에 대한 책임경영 문제가 지적되고 있다. 정 부회장은 그룹 내 이마트 부문의 경영 전반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미래 먹거리를 위해 에브리데이, SSG닷컴, 이마트24, 스타필드(신세계프라퍼티), 일렉트로마트, 삐에로쇼핑, 노브랜드 등 다양한 사업을 기획단계부터 관여하며 확장해왔다. 삐에로쇼핑의 경우 정 부회장이 개장을 앞두고 지난해 3월 “1년 동안 모든 걸 쏟아 부어 준비했다”고 할 만큼 공을 들였다. 일렉트로마트도 새로운 형태의 가전 전문점을 만들겠다며 정 부회장이 기획 단계부터 직접 주도했다.
성적은 그다지 좋지 않다. SSG닷컴은 급변하는 쇼핑트렌드에 맞춰 온라인 시장 확보를 위해 이마트와 신세계백화점 온라인사업부를 분할·합병해 출범했다. 하지만 출발이 늦어 이커머스 경쟁업체에 뒤처지며, 174억 원의 순손실로 올해 상반기 이마트 종속기업 중 가장 큰 손실을 기록했다.
정 부회장의 야심작이자 직접 나서 만든 호텔브랜드인 레스케이프호텔도 고객들의 외면을 받았다. 이에 신세계조선호텔은 상반기 161억 원의 순손실을 냈다. 앞서 김범수 신세계조선호텔 상무는 레스케이프호텔 총지배인 부임 6개월 만에 경질되기도 했다. 이마트24는 163억 원, 제주소주도 61억 원 순손실을 기록했다. 스타필드와 일렉트로마트, 삐에로쇼핑, 노브랜드 등도 이마트 실적에 크게 기여하고 있지는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정용진 부회장은 이마트 경영 의사결정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지만, 현재 미등기임원으로 있다. 2013년 3월 사퇴한 이후 6년 동안 등재하지 않았다. 이는 동생 정유경 신세계 총괄사장과 어머니 이명희 신세계그룹 회장 등 일가 모두가 마찬가지다. 정 부회장과 달리 롯데그룹 신동빈 회장과 현대백화점그룹 정지선 회장, 동생 정교선 부회장 등 유통 대기업 오너경영인들은 사내 등기이사로 이름을 올리고 있다.
정용진 부회장이 책임경영을 회피하려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재계 관계자는 “대기업이 대규모 투자나 사업에 성공하면 ‘오너의 승부수’ 등으로 모든 스포트라이트가 총수에게 쏠린다. 반면 실적이 악화되면 전문경영인이 총대를 멘다. 이번 이마트의 실적악화도 이갑수 대표에게 모든 책임을 물을 수 있겠느냐”며 “한국의 오너 일가도 경영실패에 대한 책임을 질 필요가 있다”고 귀띔했다.
이에 대해 신세계그룹 관계자는 “그룹 전문경영진의 책임경영을 강화하는 차원에서 이뤄진 조치”라며 “현재 정용진 부회장 등기이사 등재 계획은 따로 없다. 다만 정용진 부회장 등 오너 일가는 대주주로서 무한책임을 다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마트의 실적부진과 관련해서는 “이마트뿐만 아니라 국내 유통기업들이 모두 어려운 상황”이라며 “이마트는 다른 대형마트보다 선제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현재 세일앤리스를 통한 유동자산을 확보하고, 잘 되는 전문점은 키우고 안 되는 점포는 접는 등 옥석 가리기에 나섰다. 이번 인사도 난관을 극복하기 위한 의지를 보여준 것”이라고 설명했다.
민웅기 기자 minwg08@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