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만화가협회를 비롯한 우리나라 만화계 단체들은 매년 이날 기념 전시와 토론회, 기념식 등을 열고 있다.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의 포스코타워 역삼 이벤트홀에서 열리는 2019년 만화의 날 행사에서는 얼마 전 별세한 ‘고바우 영감’의 작가 고 김성환 선생을 추모하는 추모 전시가 진행될 예정이다.
#만화의 날, 축하할 날 이전에 아픈 날
만화의 날은 마땅히 기념해야 할 날이지만 실제로는 그 자체로 아픈 역사가 담긴 날이기도 하다. 1990년대 후반 몰아닥친 만화 검열의 칼날 앞에 만화 창작자들이 온몸으로 맞선 날이기 때문이다.
1996년 한나라당(현재의 자유한국당)이 ‘청소년 보호를 위한 유해 매체물 규제에 대한 법률안’이란 이름으로 발의해 이듬해인 1997년 7월 1일 발효한 청소년보호법은 그 자체로 1990년대까지 한국 만화가 응축하고 있던 가능성을 통째로 무너뜨리는 악영향을 끼쳤다.
이 법의 가장 큰 문제는 심의 기준이 모호하기 이를 데 없었다는 점이다. 법으로 처벌하기 위한 범위를 설정할 때에는 이게 왜, 어디까지 했기 때문에 죄가 되는지가 명확해야 함에도 청소년보호법은 자녀 보호라는 명목을 앞세운 여론을 발판으로 삼아 당시로써는 칼을 휘두르기 너무나 좋은 환경을 보장받았다. 일단 법이 발효되기도 전에 한 시민단체가 고발전에 나서면서 청소년보호법 이전의 관련 유사 법률이었던 미성년자보호법을 근거로 1997년 5월 당시 3대 스포츠신문에 연재 중이던 만화가 이두호, 배금택 등이 소환된다.
법이 발효되고 난 이튿날에는 집권당 대표가 학교폭력과의 전쟁을 선언하더니 1주일여 만인 7월 9일에는 만화방 업자, 출판업자 142명이 ‘불량만화’ 유통혐의로 입건되고 7월 19일에 이현세 작가가 검찰 소환을 통보받고 나흘 후인 7월 23일에 끌려간다. 이현세 작가 소환과 거의 동시에 발표된 ‘유해 만화’ 목록은 1700여 종 510만 권으로 7월 23일 수색영장 하나 없이 압수가 일제 진행되었으며, 7월 31일에는 성인 만화 독자층을 대상으로 성애만이 아닌 다양한 색깔을 보여주던 격주간지 ‘미스터 블루’ ‘빅점프’ ‘투엔티 세븐’이 발행을 중단했다.
가장 큰 피해자는 역시 이현세 작가였다. ‘천국의 신화’의 청소년판 속엔 있지도 않은 묘사를 성인판의 묘사를 기준으로 삼아 문제를 삼은 검찰의 행패는 결국 1998년 2월 약식 기소로 나온 벌금에 이현세 작가가 불복해 정식 재판을 건 이후 5년 만인 2003년 1월 24일 법원이 검찰 상고를 기각하고서야 끝났다. 미성년자보호법상 불량만화 조항이 2002년 위헌 판결을 받으며 근거조항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청소년보호법의 등장이 일찍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오랜 경험으로 직감한 만화 창작자들은 발효 전인 1996년 11월 3일 여의도 광장에서 ‘만화 심의 철폐를 위한 범만화인 결의대회’를 열어 항의했고, 법 발효일이 한 달여 지난 1997년 8월의 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 행사 중에는 한 해 전의 결의대회날을 ‘만화의 날’로 선언했다.
이 선언이 무색하게도 오래지 않아 업계 전체가 처참하게 얻어맞아야 했지만, 직업 특성상 대낮에 한자리에 모이기 쉽지 않은 만화 창작자들이 한날한시 한자리에 모여 한목소리를 냈다는 경험은 매우 중요한 경험치를 남겼다. 대중문화 또한 정치 지형이 만들어내는 결과물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깨닫게 된 점은 훗날 만화진흥법의 제정과 더불어 각종 촛불 정국 속에서 사회 이슈에 직접 목소리를 내는 만화 창작자들의 등장에도 힘을 불어넣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만화의 날은 축하해야 할 날 이전에 만화 표현의 자유 침해와 검열에 반대한 날로서 매년 끊임없이 그 연원을 떠올리고 되새겨야 할 필요가 있다.
청소년보호법의 가장 큰 ‘피해자’는 이현세 작가였다. 만화 ‘천국의 신화’. 사진=일요신문DB
#시민은 공적·사적 검열 욕구에 맞서야
훗날 알려진 바지만 문무일 전 검찰총장은 2017년 7월 취임하고 얼마 안 된 시점에 이현세 작가를 만나 검찰을 대표해 사과했다. 총장 임기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 언론 보도를 통해 밝혀진 바지만 문 전 총장은 당시 평검사로서 맞닥뜨렸던 해당 건에 관해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었다”고 했다 한다. 언론들은 사과 이유로 “정부의 ‘만화 사냥’에 동원된 검찰이 한국의 대표 만화가를 표적 수사한 부끄러운 사건이었기 때문”이라는 문장을 공통적으로 담았다. 뒤늦은 인정이지만, 이 소식을 접하고 마음의 상처가 어느 정도 누그러지는 기분을 받은 사람은 비단 이현세 작가만이 아닐 터다.
하지만 문제는 ‘그때 그 시절’에서 그치지는 않았다. 2011년 말 학교폭력과 집단 따돌림으로 한 학생이 자살하는 사건이 터지자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만화 20여 편을 청소년 유해매체물로 지정하는 일이 있었고, 2015년에는 일부 콘텐츠의 음란성을 이유로 웹툰 서비스 업체인 레진코믹스에 접속 차단조치를 내리기도 했다.
두 사례 모두 업계인들의 반발과 온라인 논란 심화로 철회되긴 하였으나, 사회적 문제가 발생할 때 질 낮은 정치는 언제든 만화에 덤터기를 씌울 수 있다는 점을 새삼 상기하는 사건이었다. 이후 등장한 ‘아동·청소년의 성 보호에 관한 법률’도 모호한 범위로 만화·애니메이션 속 캐릭터의 연령대를 단속권자가 마음대로 규정해 만화 창작자까지 규제할 수 있다는 점에서 계속해서 문제가 제기되었다.
한데 최근 몇 년 사이에는 사적 검열이 만화 창작자를 비롯해 문화예술 종사사들을 괴롭히는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2016년에는 페미니즘 티셔츠를 인증했다는 이유로 게임 내 음성을 삭제당하고 계약이 해지된 성우가 나왔고, 해당 성우를 옹호하거나 페미니즘에 동의한다고 표한 만화 창작자들은 심한 공격을 당해야만 했으며 심지어는 만화 창작자들을 상대로 “비상식적 작가 배제, 의식 있는 작가를 모으고 인성 교육을 진행”하겠다는 목표를 내건 집단까지 등장한 바 있다.
일련의 움직임을 이끈 이들은 앞서 2011년 만화 창작자들이 청소년 유해 웹툰 20여 편 선정 당시 내걸었던 검열 반대 캐치프레이즈 ‘NO CUT’을 뒤집어 너는 잘려야 한다는 뜻인 ‘YES CUT’을 들고 나오는 행태를 보였다.
만화의 날을 앞두고 다시 한 번 이날이 기념일이 된 이유와 의미를 생각해 본다. 무릇 민주주의 국가의 시민이라면, 공적·사적인 검열로 특정 대상을 치우고자 하는 그릇된 욕구에 끝없이 맞서야 한다.
만화칼럼니스트 iam@seochanhw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