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훈은 이번 2019-2020 시즌 한 층 성장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사진=KBL
#외국인선수 1명 출전, ‘떡 사세요’ 줄어든 KBL
인천 전자랜드 지휘봉을 잡고 있는 유도훈 감독은 농구팬 사이에서 ‘명언 제조기’로 불린다. 그가 남긴 숱한 명언 중에서도 지난 시즌 작전타임에서 선수들에게 던진 “‘떡 사세요’ 할 거야?”라는 일갈은 깊은 인상을 남겼다.
경기 막판 승부처에서 외국인 선수들에게 자꾸만 공격 기회를 떠넘겼던 국내 선수들을 향한 지적이었다. 머리 위로 공을 들고 패스를 받을 외국인 선수만을 찾는 동작을 떡을 머리에 이고 파는 모습에 빗댄 것이다. 유 감독은 당시 “야, 국내 선수들 너희들은 선수 아니야? 게임 져도 좋으니까 승부 봐!”라는 말을 덧붙였고 각성한 국내 선수들은 결국 게임을 승리로 이끌었다.
‘외국인 선수가 팀 전력의 80%를 차지한다’는 지적까지 나오는 KBL에서 올 시즌만큼은 ‘떡 사세요’가 줄어들었다. 이번 시즌부터 외국선수 제도가 2명 보유, 1명 출전(종전 2명 보유, 1·4쿼터 1명, 2·3쿼터 2명 출전)으로 바뀌면서 국내 선수들의 설 자리가 넓어진 것이다.
2018년 12월 11일 서울 삼성과의 경기 작전타임에서 언급한 유도훈 감독의 ‘떡사세요’는 그의 명언이 됐다. 사진=KBL
지난 2018-2019 시즌 득점 순위 상위 15명 중 국내선수는 MVP 수상자 이정현(전주 KCC) 단 1명이었다. 하지만 2019-2020 시즌 1라운드 일정이 막바지에 이른 10월 30일 현재 5명의 선수가 이름을 올리고 있다.
특히 ‘수혜’를 입고 있는 이들은 단신 가드들이다. 2018-2019 시즌은 ‘희대의 코미디’로 불리던 외국선수 신장제한이 도입된 시기였다. 각 팀별로 1명씩 신장 186cm 이하의 단신 외국인 선수기용이 강요됐다. 자연스레 국내 가드들은 뒤로 밀려나기 일쑤였다.
현재 리그에서 가장 주목받는 가드 중 한 명은 KT 소닉붐의 허훈이다. 허재 전 감독을 아버지로 뒀기에 늘 따라붙던 ‘농구대통령 아들’이라는 꼬리표를 떼어낼 기세다. 9경기 평균 득점 18.22점을 기록해 KBL 전체 5위, 국내선수 중 1위를 기록하고 있다. 경기당 평균 2.78개를 기록하고 성공률 51.02%를 보인 3점 슛과 6.22개를 기록한 어시스트에서도 KBL 선두를 달리고 있다. 전자랜드 가드 김낙현도 지난 시즌 평균 7.6점, 2.5어시스트에서 13.7점, 4.2어시스트로 가파른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단신 가드 외에 국내 포워드와 빅맨들도 두드러진 성적을 내고 있다. FA 이적으로 보수 12억 7900만 원(연봉 10억 2320만 원, 인센티브 2억 5580만 원)으로 국내 역대 최고 연봉자에 오른 김종규(원주 DB)는 부담을 이겨내고 맹활약하고 있다. 단 8경기 만에 3점 슛 6개를 성공시켜 지난 6시즌간의 누적 기록과 동률을 이루는 등 플레이 스타일에도 변화를 주는 인상을 남기고 있다. 또한 전주 KCC 포워드 송교창은 다시 한 번 성장하는 모습으로 팀의 고공행진을 이끌고 있다.
#지난 시즌, 시즌 전 예상은 잊어라
30일 현재 KBL 순위표는 원주 DB, 서울 SK, 인천 전자랜드가 나란히 공동 1위로 상단을 차지하고 있다. 이 중 전자랜드는 2018-2019 시즌 준우승을 거뒀지만 DB와 SK는 나란히 8위와 9위에 그치며 6강 플레이오프조차 진출하지 못했던 팀이다. 이들은 단 한 시즌 만에 환골탈태한 모습으로 리그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DB와 SK 변신의 배경을 팀 밸런스 강화로 꼽는다. 준수한 외국선수를 선발했고 국내선수층도 탄탄하다. SK는 이번 시즌 득점 2위 자밀 워니에 김선형, 최준용, 안영준 등 국가대표급 선수들, 김민수, 최부경 등 베테랑 빅맨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12시즌째 KBL 무대를 지키고 있는 애런 헤인즈의 존재감도 무시할 수 없다.
DB는 연봉킹 김종규가 중심을 잡고 있다. 외국선수 듀오도 좋은 궁합을 보인다. 많은 이들로부터 ‘끝났다’는 평가를 받던 김태술과 김민구의 부활은 고무적이다. 김민구는 2014년 치명적인 부상 이후 가장 좋은 성적을 내고 있으며 베테랑 김태술은 2년 전 DB의 정규리그 우승 당시 ‘레전드’ 김주성이 맡았던 후반 조커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이상범 감독은 김종규, 김태술, 김민구를 일컬어 ‘3김’이라 부르며 기대감을 나타낸 바 있다.
가장 의외의 순위는 전주 KCC가 4위에 올랐다는 것이다. 2018-2019 시즌 4위에 올랐던 KCC는 내림세가 예상됐던 팀이다. 많은 역할을 한 외국선수 브랜든 브라운이 팀을 옮겼고 베테랑 하승진과 전태풍도 빠져나갔다. 하지만 국내선수들의 분전이 빈자리를 메우고 있다. 단연 돋보이는 인물은 리그 5년 차에 접어든 송교창이다. 지난 시즌보다 한층 발전한 모습으로 리그 MVP 이정현과 쌍벽을 이루며 팀을 이끌고 있다. 김국찬, 유현준 등 다른 영건들의 성장도 돋보인다.
최장신(212.5cm) 바이런 멀린스(왼쪽)는 지난 27일 현대모비스와의 경기에서 29득점을 책임지며 25점의 라건아(오른쪽)에게 판정승을 거뒀다. 사진=KBL
지난 시즌 압도적 성적으로 우승을 차지했던 울산 현대모비스의 6위(3승 5패)는 예상 밖의 성적이다. 이들은 올 시즌 시작 전에도 강력한 우승후보로 꼽힌 바 있다.
이들의 초반 부진에는 부상의 영향이 컸다. 챔피언결정전 MVP 출신 이대성, 4억 2000만 원의 거액을 주고 영입한 김상규, 베테랑 슈터 오용준 등이 초반 일정에서 부상으로 빠졌다.
2018-2019 시즌 우승 전력을 큰 누수 없이 유지한 현대모비스이기에 이들의 순위는 다시 올라갈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그럼에도 수년간 KBL을 지배해온 라건아의 영향력에는 변화가 있는 듯한 모양새다.
라건아는 대학 졸업 직후 2012-2013 시즌 모비스에 입단, 3년 차부터 최고 외국인 선수의 위용을 발휘해왔다. 2018-2019 시즌 특별 귀화 이후로도 대표팀과 소속팀을 가리지 않고 맹활약했다.
하지만 이번 시즌부터 환경에 변화가 일어났다. 외국인 선수 규정에서 신장제한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이에 199.2cm의 라건아가 200cm가 훌쩍 넘는 외국인 선수들이 유입되며 이전과 같은 영향력을 발휘하기 어려워졌다. 실제 장신 선수들과의 시즌 첫 만남에서 라건아가 어려움을 겪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출전 시간을 분배하는 타 팀의 외국선수들과 달리 라건아는 혼자서 평균 30분 이상을 소화하는 부담을 안고 있기도 하다.
예년에 지배적인 모습을 보이지 못하지만 라건아는 여전히 기록 면에서 KBL 정상급 활약을 보이고 있다. 득점, 리바운드, 블록 부문 모두 리그 전체 5위 내에 위치하고 있다. 새얼굴들과 ‘상견례’를 마치고 두 번째 맞대결부터는 다른 모습이 연출될 가능성도 존재한다. 지난 2018-2019 시즌 압도적인 우승으로 집중 견제가 더해진 라건아와 현대모비스가 향후 일정에서 어떤 해결책을 내놓을지 KBL을 지켜보는 이들의 흥미를 더하고 있다.
김상래 기자 scourg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