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관악구 인헌고등학교 학생들이 사상주입 독재교육을 주장해 사태가 확산됐다. 사진=인헌고 학생수호연합 페이스북 캡처
서울 관악구의 인헌고등학교에서 불거진 ‘사상 독재’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고 있다. 인헌고 학생이 조직한 학생수호연합(학수연)은 10월 23일 긴급 기자회견을 열었다. 학생수호연합은 정치세력화된 교사들이 정치사상을 주입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탈원전·일본경제침략에 대한 교사들의 교육이 정치편향적 사상주입이라는 것.
학수연 활동에 보수단체와 극우 유튜버, 자유한국당, 보수언론 등이 개입하면서 인헌고 사태가 확대됐다. 보수단체와 유튜버는 인헌고 앞에서 집회를 열어 논란이 커졌다. 소음과 통행 문제는 물론 SNS와 유튜브에 학생의 동의 없이 이뤄진 촬영물이 올라오고 있다. 학생들에 대한 댓글 테러도 심각한 수준이다. ‘좌빨, 전교조에 세뇌당했다’ 등 비난까지 이어지고 있다.
인헌고 사태는 올해 3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학생 몇 명이 학내 자율동아리인 성평화 동아리 왈리(WALIH)를 결성했다. 왈리는 전국연합성평화동아리의 지부 격에 해당했다. 동아리 지도교사는 학생들의 활동일지를 검토하다 성차별과 사실 왜곡 등 문제를 발견했다. 더군다나 동아리 활동 내역이 온라인 커뮤니티에 게재되며 논란이 일었다. 국민신문고에 민원이 접수되는 등 문제제기도 이어졌다. 이후 지도 교사는 동아리를 폐쇄시켰다. 이때부터 동아리를 주도했던 A 군은 ‘남성 페미니스트’ 교사에게 사상 독재를 당하고 동아리 활동을 강탈당했다고 주장했다.
학교 측은 “인헌고 동아리 활동일지에 따르면 학생들은 역할과 지위의 차별, 서열을 정당화하고 합리화했다. 또 전통적인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도의 출발을 생물학적 요인에 따른 역할분담으로 보고 가부장제도의 문제점에 대한 비판에 대응하기 위해 ‘가분담제’라는 신조어를 제시하며 남성 중심의 사회를 정당화하려고 했다”고 밝혔다.
실제로 인헌고 성평화 동아리가 주장해온 내용을 살펴보면 약자 혐오나, 권력에 의한 서열화를 정당화시키는 발언이 눈에 띈다. 동아리는 사회가 가부장적이라는 것을 전면 반박하며 젊은 남성의 울분을 담았다고 주장했다. ‘남성은 모험심, 여성은 모성애’와 같은 성별 간 특성을 왜곡해 일반화한 내용도 다수 담겨 있다.
인헌고 왈리의 활동물이 나온 SNS에는 “성평등, 난 그 망할 놈의 공산주의식 성평등이 싫어. 성폭력? 없어지면 정말 좋겠지. 그런데 성범죄가 없어지는 사회가 올 수 있을까? 응, 올 수 있지. 네가 XX 깊게 잠든 꿈속에서”, “여성들이 가지는 공포감? 우리나라 치안율 세계 1위다. 그 공포심을 우리 사회와 비추어 봤을 때 어디까지가 실재하는 것이고, 어디까지가 피해망상인지는 확실히 해야 한다” 등과 같은 내용이 게시됐다.
인헌고 성평화 동아리와 학수연을 이끄는 학생들은 보수단체 극우 유튜버들에게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다. 이에 다른 학생들은 진상조사와 사태 해결을 위해 ‘학생가온연합(학가온)’을 만들었다. 학가온은 앞서 학수연의 주장에 대해 ‘사실이 아니다’고 반박한다. 전교생 530명 중 학수연에 참여하는 학생은 소수라는 점도 근거로 들었다. 처음 학수연이 만들어질 당시엔 100여 명에 가까운 학생이 참여했지만 현재 30명 남짓한 인원이 남았다. 소수 인원이 주장하는 내용이 학생 전체를 대표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학가온과 별도로 인헌고 학생회는 “교내 문제에 외부 단체의 개입을 중단해달라”는 입장문을 냈다. 또 10월 29일 토론회를 열고 학생들이 자치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장을 마련했다. 학생들은 교내 소동이 정치적 도구로 이용되는 것을 우려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학수연 대표 B 군은 학생들로부터 학교폭력을 당하고 있다는 취지로 교육청에 인권침해 구제신청을 했다. 학수연은 조직 대표와 대변인이 학생들의 정신적 괴롭힘과 압박을 받고 있다고 입장을 발표했다. 학수연 측은 “학수연을 욕하고 (선생님과의 대화 등이 담긴) 녹취물을 삭제하라는 압박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 재학생은 “피해를 주장하는 친구들을 존중하지만, 사상 강요나 주입에 해당하는 발언 자체를 들어본 적이 없다”며 “학수연 친구들에게 오히려 친구들이 더 조심스럽게 대한다. 먼저 B 군 얘기를 들어보겠다고 다가간 친구도 있었고, 체육시간에 배드민턴도 함께 친다”고 말했다. 그는 또 “개인의 경험을 제가 일일이 다 알 수는 없다. 이번 일로 학수연 친구 개인을 평가하려고 들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인헌고 학생들이 인헌고 사태가 왜곡됐다고 주장하는 데 대해 학수연 측은 “정치교사들이 방송으로 학수연의 의견에 동조하는 것이 정치편향적인 것처럼 말한다. 정치교사들 입장을 교사가 낼 수는 없으니 학생들을 이용하는 것”이라며 “학생회의 토론회는 그냥 아무것도 모르는 학생들 모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교육청은 인헌고를 대상으로 특별장학을 벌이고 있다. 학생 전원을 대상으로 무기명으로 피해사실을 조사하고, 면담도 진행했다. 교육청에 따르면 무기명으로 서면 조사를 벌인 결과 사상주입이나 구체적인 편향 교육을 한 교사를 특정할 만한 유의미한 진술이 나오지는 않았다. 교육청은 장학을 통해 문제사항이 발견되면 이를 시정하고, 학교를 정상화한다는 입장이다.
금재은 기자 silo123@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