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권상우. 사진=CJ엔터테인먼트 제공
그러나 확실한 것은 눈빛 만큼은 여전히 살아있었다는 점이다. 이전 인터뷰에서 “나이 마흔이 넘어서도 완벽한 액션을 보여줄 수 있는 배우로 남고 싶다”고 한 말대로, 영화 ‘신의 한 수: 귀수편’은 그야말로 권상우의 ‘소원 성취’처럼 보였다.
“권상우라는 배우가 어느 배우보다 액션을 더 잘 할 수 있고, 누구보다 더 빨리 뛸 수 있고 더 높이 점프할 수 있다는 에너지가 있는데 그걸 보여줄 작품을 만나지 못하고 있던 차였어요. 그런 타이밍에 ‘신의 한 수: 귀수편’이 온 거죠. 이전의 작품들도 재미있고 유쾌한 영화였지만 관객 분들께 또 다른 권상우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 기회가 이 영화였다고 생각합니다.”
극중 권상우는 바둑으로 인해 모든 것을 잃고 냉혹한 내기 바둑판으로 뛰어든 ‘바둑 고수’ 귀수 역으로 열연을 펼쳤다. 말수가 적고 냉정하며 침착한 성격의 복수귀가 되기 위해 촬영 내내 외롭게 지내야 했다는 게 권상우의 이야기다. 비단 캐릭터의 내면을 구체화하기 위해서 뿐만이 아니라, 외면 때문에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귀수라는 캐릭터를 연기하는 데 정말 외롭게 준비했던 것 같아요. 촬영 들어가기 전에 제일 처음 봤던 애니메이션 컷이 거꾸로 매달린 채 기보를 그리고 있는 귀수의 모습이었거든요. 그 모습이 캐릭터의 시작이라고 생각했어요. 그걸 표현하기 위해서 식이 조절부터 몸 만드는 것까지 진행했는데, 그러다 보니까 촬영 끝나면 다들 맥주 한 잔 하고 저녁도 같이 먹는데 저는 그럴 수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촬영 끝나면 혼자 숙소에 남아서 고구마도 먹고, 운동도 하고 그렇게 외롭게 지냈던 것 같아요(웃음).”
귀수의 표현이 어려웠던 이유 가운데 하나로는 ‘전작의 후광’이 있었다. 앞서 2014년 개봉한 ‘신의 한 수’에서 미스터리한 바둑 고수로 목소리만 등장했던 귀수를 두고 관객들의 기대가 컸던 탓이었다. 전작이 흥행에 성공했고, 귀수에 대한 관심과 기대가 불어나는 상황에서 그를 연기해야 할 권상우의 어깨가 무거워질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배우 권상우. 사진=CJ엔터테인먼트 제공
전작과의 차별화를 두기 위해 제작진이 스포트라이트를 비춘 부분은 ‘바둑’ 그 자체였다고 했다. 전작에서 액션에 좀 더 중점을 두고 있었다면 이번에는 각양각색의 바둑고수들과 그들의 종잡을 수 없는 대국에 이르기까지 무대의 중심이 다시 ‘바둑판’ 위로 옮겨졌다. 자연스럽게 배우들도 시선부터 손끝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바둑판과 바둑알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영화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한 컷 한 컷을 디테일하게 프로기사님이 다 세팅을 해주신 거예요. 저희는 ‘그냥 찍어도 되는 거 아닌가’ 생각했는데 굉장히 엄격하게 접근하시더라고요(웃음). 저희 현장에 항상 프로기사님이 계셔서 바둑 쥐는 방법부터 둘 때 손가락 모양, 빠르게 오가는 대국 신도 다 봐주셨어요. 그러다 보니 저희도 바둑돌에 눈을 뗄 수가 없더라고요. 잘못 두면 처음부터 다시 찍어야 하니까 기보를 아예 외워야 했어요. 솔직히 액션 신 찍을 때보다 바둑 둘 때 NG가 더 많이 났던 것 같아요(웃음).”
권상우에게 액션보다 어려웠던 바둑은 그 적수들도 만만치 않은 면면을 뽐냈다. 귀수를 내기 바둑의 길로 이끈 스승 ‘허일도’ (김성균 분), 이길 때까지 모든 것을 거는 ‘부산 잡초’ (허성태 분), 바둑판 뿐 아니라 상대의 과거까지 꿰뚫어 보는 ‘장성무당’ (원현준 분), 유일하게 귀수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를 쫓는 ‘외톨이’ (우도환 분) 등 한 번 보면 잊지 못할 강렬한 인상과 아우라를 지닌 배우들의 열연도 이 영화의 또 다른 관전 포인트다. 반전은 이 무시무시한 배우들 가운데 권상우보다 연상이 없다는 것.
“저를 보고 동안이라고 많이들 말씀해 주시는데, 저는 동안이 아니에요. ‘귀수편’에 나오는 배우들이 다들 노안이라서 제가 비교적 젊게 보이는 것 같은데…. 저 성균이 보고 형이라고 부른 적도 있어요(웃음). 연기할 때는 다들 완벽하게 캐릭터로써 집중하지만 촬영장 밖에서는 꾸밈없고 자연스러운 친구들이에요. 허성태 배우도 촬영할 때는 진짜 부산 잡초같이 연기했는데, 밖에서는 쑥스러움을 많이 타는 동생이더라고요. 오히려 그렇게 촬영장 밖에서 배우들끼리 있을 때 꾸미지 않고 자연스럽게 다가가니까 다 허물없이 친해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영화 ‘신의 한 수: 귀수편’ 스틸컷. 사진=CJ엔터테인먼트 제공
귀수가 하나씩 복수를 달성해 가면서 그의 대국판도 점차 넓어지는 셈이다. 이 가운데 권상우는 특히 ‘사활바둑’과 ‘1대 100 바둑’을 기억에 남는 촬영 가운데 하나로 꼽았다.
“세트장이라고 생각하시기 쉬운데, 다리 위 철로에서 촬영한 건 진짜예요. 크레인으로 옮겨서 깜깜한 밤에 그 위로 올라간 거였는데 새벽이 되니까 기온이 너무 떨어지더라고요. 저랑 성태랑 덜덜 떨면서 찍다가 다음 날 촬영에는 아예 다리 밑에 난로도 켜고 완벽하게 대비했어요(웃음). 1대 100 바둑 신 촬영 때는 제가 굉장히 심한 독감에 걸려서 오한이 너무 심하게 온 상태였어요. 혼자 숙소 방에서 끙끙 앓고 있었는데 그때 감정 상태와 몸 컨디션이 마지막 그 장면과 굉장히 잘 맞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후반 작업할 때 감독님과 의논해서 ‘그 신에서는 (편집을) 아무것도 하지 말자, 현장 그 자체가 제일 좋았다’고 결정했어요. 그런 게 영화에서도 잘 표현됐던 것 같아요.”
이처럼 영화의 완성도를 파악한 뒤에 다시 제작진을 바라본다면 놀랄 만한 사실이 있다. 이 작품이 리건 감독의 첫 장편 작품이라는 것이다.
전작의 부담이 상당한 작품을 데뷔작으로 선택한 감독의 용기도 그렇지만, 액션 배우로의 귀환을 신인 감독에게 맡긴 권상우의 결단도 대단하다고 밖에는 말할 수 없다. 이에 대해 권상우는 “어떤 감독님인지를 따지는 것보다는 제가 흥미를 느낀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지 여부가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저는 시나리오를 접한 뒤에 이야기가 흥미롭다고 느끼면 출연에도 흥미를 가지게 되는 식이에요. 소위 그런 배우 분들도 있어요. 유명한 감독님이랑 작업을 하고 싶고, 조금이라도 성공 확률을 높이고 싶다고 생각하는. 물론 다들 기본적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저 역시도 그런 환경에서 하고 싶을 때가 있죠. 하지만 그런 것보다는 저희 영화처럼 숨은 보석 같은 감독님과 해서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다면, 그것 보다 더 성취감을 느낄 수는 없을 것 같아요.”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