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실은 감춰진 경력이 하나 더 있다. 최근 밝혀진 바에 의하면 “키요는 미국 중앙정보국(CIA)에서 대일 스파이를 양성하는 교관이었다”고 한다. 다시 말해, 세계 최강 첩보기관에서 근무하며 수많은 스파이를 모국으로 보낸 것이다.
미국 CIA에서 대일 스파이를 양성하는 교관이었던 키요 야마다.
태평양전쟁 이후 키요는 미국으로 건너가 자립을 꿈꿨다. 미시간대학교 대학원에서 장학금을 받아 공부했으며, 교육 전문가가 되고자 했다. 그러던 중 미국 군인의 열렬한 구애를 받아 결혼하게 된다. 흔한 연애소설이라면 해피엔딩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남편은 다른 여성과 불륜관계였고, 인종 차별주의자이기도 했다.
자립을 꿈꿨던 키요는 결국 목표를 상실하고 만다. 이후 전업주부로서 군인 남편을 따라 미국 각지를 전전하는 생활을 이어갔다. 그리고 46세 때 우연한 계기로 CIA에 채용되면서 또 한 번 운명의 갈림길을 맞이한다.
일본 일간지 ‘데일리신초’에 따르면, 닉슨 정부 시절이던 1968년 키요는 CIA 지원본부에 정규직으로 들어가, 특무요원(간첩)에게 일본어와 일본문화, 일본인의 사고법 등을 가르치는 교관을 맡았다. 일본 신문기자를 ‘끄나풀’로 이용하기 위한 공작, 아울러 일본 주요기업에 스파이를 보내는 공작에도 참여한 것으로 전해진다. 매체는 “키요가 클린턴 정부 시절인 2000년까지 수많은 간첩을 양성했다”면서 “퇴직 시 영예로운 메달과 표창을 받은 것으로 보아 실적이 대단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봉인된 채 묻혀 있던 키요의 삶’을 세상에 알린 건, 국제 저널리스트 야마다 도시히로다. 그는 CIA뿐만 아니라 영국, 이스라엘, 인도, 파키스탄 등 세계 첩보기관을 밀착 취재해왔다. 키요에 관한 정보는 그가 매사추세츠공대(MIT)에서 안보문제 연구원으로 있던 2015년 입수했다고 한다.
도시히로는 “CIA가 극비 취급하던 키요의 신분과 임무를 확인하기 위해 여러 전직 CIA 국원들로부터 직접 이야기를 듣는 취재 과정을 거쳤다”고 밝혔다. 수년에 걸친 취재 결과물은 올해 8월 ‘CIA 스파이 양성관 - 키요 야마다의 대일공작’이라는 책으로 출판됐다.
결혼 직전의 키요. 왼쪽은 군인이었던 미국인 남편.
국제사회에서 첩보원을 활용해 상대국의 정보를 수집한다거나 현지에서 간첩을 조달하는 일은 수두룩하게 벌어진다. 단지 은밀하게 작전이 진행되고 있으므로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공작은 적국이 아닌, 동맹국에서도 행해진다.
냉전시대 일본은 미국에게 공산주의 측과 대항할 첩보전의 무대였고, 냉전시대 이후에는 성장한 일본 경제 자체가 미국 CIA의 타깃이 됐다. 취재에 의하면 “키요의 제자들은 반공산주의 공작, 록히드 사건, 그리고 미국과 일본의 치열했던 무역전쟁, 특별히 자동차협상에서 일본을 굴복시키는 데 맹활약했다”고 한다.
예를 들어 1970년대에는 CIA 첩보원이 일본 내 유력 신문 기자를 ‘협력자’로 영입하려는 획책도 있었다. 협력자로부터 정보를 제공받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심지어 마음대로 휘두르려고 했다. 기사의 방향성 등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면, 일본 내 여론조작에도 입김이 닿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도시히로에 따르면 “사실 그 이전에도 대기업 신문사에는 ‘CIA 협력자’가 적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이 같은 언론 공작은 1953년 미국 심리전전략위원회(PSB)가 일본에 대한 심리전 전개를 위해 정리한 ‘PSB-D27(대일 심리 전략 계획)’이라는 기밀문서에도 명확히 지시돼 있다”고 덧붙였다.
전술한 것처럼 키요는 CIA 지원본부 소속이었다. 그녀의 임무는 스파이 후보 학생들에게 일본어나 일본 문화를 가르치는 것 외에도 실제 특수공작을 하기 위해 잠입한 제자(스파이)들의 실무 상담 역할을 겸했다.
도쿄지국에 함께 속해 있는 스파이일지라도 서로 연락을 주고받지 않는다. 하물며 ‘자신이 누구를 쫓고 있는지’에 대한 임무 정보 공유조차 하지 않는다. 공작에 관련된 사람들이 정보를 공유할 경우, 만에 하나 누군가 구속됐을 시 자칫 공작의 전모가 들통 날 우려가 있어서다.
즉, 스파이 개개인은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고는 있으나 어떤 큰 틀 안에서 작전이 이뤄지는지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또한 상의 없이 개인적으로 판단을 해야 하는 상황도 많아 미국에 있는 키요를 의지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대해 도시히로는 “관계자와 접촉할 때 주의점은 무엇인지, 의혹 많은 정치인과 주고받을 때 조심해야 하는 것 등등 조언을 비롯해 구체적인 지시를 원해 키요에게 연락을 하는 첩보원도 있었다”고 전했다.
닉슨부터 클린턴 정부까지 32년간 수많은 간첩을 양성해 모국으로 보낸 키요 야마다. 그녀는 지금 미국 버지니아주 알링턴 국립묘지에 조용히 잠들어 있다. 도시히로는 키요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키요의 공적은 퇴직 시 표창 받을 정도로 높이 평가받았다. 전쟁 이전 출생 여성으로서는 파격적인 커리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에서 남성에게 억압당한 여성이 미국에서 이룬 궤적이기도 하다. 분명히 그녀는 미국 첩보기관의 수하였지만, 그녀의 인생을 펼쳐 보자면 ‘매국’이라는 말로 간단히 정리하기엔 찜찜한 느낌이 드는 게 사실이다.”
강윤화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
스파이도 디지털화? CIA에 대한 궁금증 #CIA 조직과 활동은 지금도 활발한가 예산과 인원, 영향력, 역사 등을 따져봤을 때 CIA는 여전히 세계 최강 첩보기관이다. 첩보활동은 과도기로, 디지털화가 진행 중이다. 과거에는 사람을 미행했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다. 또 빌딩에 잠입해 정보를 훔치지 않아도 된다. ‘어떻게 하면 디지털화해서 훔칠 수 있을까.’ 요컨대 해킹 등의 기술력이 중요시되고 있다. 간첩 활동이 바뀌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CIA는 해커를 양성하고 있는가 CIA 전문 해커가 있다. 요원 이외에도 협력자나 계약직원으로서 해커를 활용하기도 한다. 아울러 미국에는 국가안보국(NSA)라는 정보기관이 존재하기에 그곳에도 미국 최고의 수학자와 해커들이 모여 있다. 흔히 NSA와 CIA의 사이가 좋은 편이 아니라고 알려졌지만, 작전 시에는 함께 활동한다. 가령 아프가니스탄에 드론을 날리는 지휘는 CIA가 맡고, 적이 어디에 있는지를 해킹이나 도청 등으로 조사하는 건 NSA가 하는 식이다. 강윤화 해외정보작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