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신문은 윤 씨가 검거된 직후 그가 작성한 진술서를 입수했다. 화성 연쇄살인사건을 재조사하고 있는 경기남부지방경찰청이 ‘억울한 누명을 썼다’며 재심 청구를 준비 중인 윤 씨 변호인단에게 10월 25일 공개한 수사기록의 일부다. 윤 씨의 자필 진술서는 총 3건, A4용지 10쪽 분량이다.
윤 씨가 1989년 7월 자백한 직후 그가 작성한 진술서를 입수했다. 자필 진술서는 총 3건, A4용지 10쪽 분량이다. 사진=이종현 기자
8차 사건은 1988년 9월 16일 당시 경기 화성군 태안읍 진안리의 한 주택에서 박 아무개 양이 숨진 채 발견된 사건이다. 이듬해 1989년 7월 25일 윤 씨가 범인으로 검거됐다. 8차 사건 항소심 판결문을 보면, 당시 윤 씨는 경찰에 연행돼 조사 받은 지 4시간 40분 만인 다음날(7월 26일) 오전 5시 40분부터 자신의 범행을 자백하기 시작했다. 진술서는 이 시점부터 쓴 것으로 추정된다.
진술서는 7월 26일 두 차례, 7월 27일 한 차례 작성됐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내용이 추가되고 구체화 됐다. 처음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진술서는 범행 수법이 중심이었는데, 사건 당일 윤 씨가 범행 현장으로 가는 경로부터 범행 과정, 동기 등이 모두 묘사되는 식이다.
지난 11월 2일 청주에서 기자와 만난 윤 씨는 진술서 내용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다. 앞서 경기남부지방경찰청 조사 과정과 재심 변호인단과 면담 등에서 진술서를 봤지만 몇 번을 봐도 새롭다고 했다. 그는 검사가 참여했던 현장검증 당시의 모습도 최근 경찰 조사에서 사진을 보고 난 뒤에야 기억했다. 이 때문에 오는 11월 4일 기억을 최대한 되살리기 위해 최면 조사를 받는다. 그는 “내 필체가 맞지만 이런 글을 쓴 기억이 없다”며 “경찰은 (나를) 연행한 이후부터 3일 동안 잠을 한숨도 재우지 않았다. 경찰이 불러주는 대로 정신없이 썼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윤 씨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정황은 진술서 곳곳에서 발견된다. 사건 현장으로 가는 경로, 범행 수법 등 범행 자백을 하는 부분은 나름 정리돼 있지만 범행과 큰 관련 없는 그의 평소 하루 일과를 적은 부분은 글의 흐름과 설명이 뒤죽박죽 섞여있다. 진술서 내용을 그대로 옮기면 ‘일을 끝내고 나니 10시 손발 딱고 나니 12시에 빡가테 산책을 나가다 그렌데 마이 울쩍해서 동네를 왔다 갔다 보니 슬레바(슬리퍼) 신고 상하는 검정색 긴팔에 바지는 청바지를 입었습니다’라는 문장이 대표적이다.
육하원칙에 따라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자백 부분과 달리, 범행과 관련 없는 진술 부분에서는 글의 흐름과 설명이 뒤죽박죽 섞여있다. 사진=이종현 기자
진술서는 “~했습니다”는 식의 경어체가 주로 쓰였는데, 자백하는 부분에서 갑자기 “~했다”는 식의 평어체가 등장했다가 다시 경어체로 바뀌는 경우도 여러 차례 발견된다. 누군가 불러주는 말을 급하게 받아쓴 흔적 가운데 하나로 추정된다. ‘주거지’나 ‘후문 방향’ 등 한자가 쓰인 점도 윤 씨가 고개를 갸우뚱하는 이유다. 그는 초등학교 3학년을 이틀가량 다니다 그만두고 곧바로 일을 해야 했다. 당시엔 전혀 쓰지 않았던 단어였다. ‘~하다 보니’, ‘~를 거쳐’ 등의 표현은 진술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데 윤 씨는 이 역시 현재까지도 거의 쓰지 않는 표현이라고 했다.
진술서 내용에 대해서도 윤 씨는 다른 말을 한다. 그는 불편한 신체 탓에 10분 이상 걷지 못한다. 최근 종합검진을 받았는데, 30년 전과 비교해 호전되지 않고 점차 악화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그런데도 진술서에는 윤 씨가 사건 현장까지 1시간이 넘는 거리를 걸어갔고, 다시 집으로 같은 길을 돌아오면서 ‘피가 묻은 자신의 속옷’을 라이터로 불태우기까지 한 것으로 작성돼 있다. 실제 왕복한 시간은 수 시간으로, 훨씬 더 긴 셈이다.
사건 현장으로 가는 장면이 묘사된 대목에도 문제가 있다고 주장한다. 윤 씨는 “당시 살던 곳에서 피해자의 집까지 가는 경로에는 갈림길이 있다. 한 곳은 함께 살았던 형님과 업무를 위해 자주 다니던 길이었지만 다른 한 곳은 아니었다”며 “진술서에 나오는 길은 전혀 다니지 않던 길이다”고 말했다. 이 주장은 다른 사람의 증언과도 일치한다. 앞서 화성에서 토박이로 살며 8차 사건 당시 현장검증을 또렷이 기억하는 A 씨는 일요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당시 윤 씨의 집에서 사건 현장까지 직선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고 멀리 돌아가는 길이 있다. 현장검증은 멀리 돌아가는 길에서 했다”고 말했다.
윤 씨와 A 씨는 8차 사건이 발생하기 전까지 선후배 관계로 서로를 알고 지내왔다. 윤 씨가 검거되면서 연락이 끊겼다. 두 사람은 이춘재가 자백을 한 현재까지 만난 적도 없고 연락한 적도 없다.
진술서에 담긴 윤 씨의 범행 과정과 수법은 이춘재의 자백과 배치된다. 윤 씨는 담을 넘어 숨진 피해자 집에 들어갔다고 썼지만, 최근 이춘재는 대문을 열고 들어갔다고 말했다. 그밖에 사건 현장의 구조와 가구 위치 등도 윤 씨와 이춘재의 설명이 각각 다른 것으로 보인다.
윤 씨가 1989년 7월 자백 직후 썼던 자필 진술서를 보고 있다. 사진=최준필 기자
진술서 곳곳에서 석연치 않은 정황들이 발견되지만 윤 씨의 변호인단은 신중하게 검토하고 있다. 개별 진술서 하나만으로 당장 큰 의미를 부여하기 어렵다는 설명이다. 박준영 변호사는 “사건 현장으로 가는 경로를 묘사한 부분의 경우, 윤 씨가 진술서에서 ‘마음이 울적하고 답답해 산책을 나갔다’고 밝힌 만큼 멀리 돌아서 가는 경우 역시도 충분히 합리적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윤 씨가 당시 썼던 일기, 편지 등 객관적인 비교 대상이나 자료가 없는 상황에서 자필 진술서를 분석해 문제점을 찾는 건 어렵다”면서도 “이춘재 자백이 신빙성이 있다는 전제가 결합됐을 때만 상당한 의미를 가진다. 현재 시점에서는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한편 박준영 변호사는 진술서의 맞춤법과 윤 씨의 학력, 신체적 특징 등을 근거로 그와 영화 ‘살인의 추억’의 백광호(박노식 분)를 연결하는 시선을 경계하고 있다. 영화에서 백광호는 지적장애를 갖고 있는데, 경찰은 그를 고문을 하고 범인으로 몰아가는 장면이 나온다.
윤 씨는 “대학을 중퇴하고 공무원으로 근무했던 아버지와 엄격한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고 말했다. 옥살이를 할 때는 수용자들의 의복을 만드는 공장의 반장으로 약 5년 동안 30~40여 명을 통솔했다. 박 변호사는 “신체적 특징 외에는 다른 게 없는 사람이 허위자백을 할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당시 수사 절차상 문제라고 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
박현광 기자 mua123@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