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2학년 학생들이 육교 너머 실종 초등생 수색지역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하고 있다. 사진=박현광 기자
딱 그 나이대였다. 피해자 유골을 찾는 의미를 알지도, 관심 가질 필요도 없을 나이였다. 1989년 7월 7일 실종될 당시 A 양도 초등학교 2학년이었다. A 양은 학교를 마치고 오후 12시 30분께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사라졌다. 5개월 뒤인 같은 해 12월 그 길목에서 A 양의 가방, 속옷 등 유류품이 발견됐지만 범인은 잡히지 않았다.
30년이 지난 뒤 그 사건의 범인이 드러났다. 화성연쇄살인사건 피의자 이춘재였다. 이춘재는 경찰 조사에서 ‘초등생 실종 사건’을 자신의 소행이라고 밝혔다. 범행 장소는 느치미마을의 야산인 ‘한봉’이라고 진술했다고 알려졌다.
11월 5일 찾은 느치미마을 ‘한봉’은 아파트가 세워지고 ‘병점근린공원’이 돼 있었다. 30년 전과는 많이 바뀐 상태였다. 한 마을 주민은 “근린공원 100m 전부터 한봉으로 불리는 야산이었다. 지금은 다 깎여서 아파트가 들어섰다. 일부분만 남았다”고 설명했다.
11월 5일 일부 남은 한봉인 근린공원에선 70여 명의 과학수사대가 흙을 파헤치고 있었다. 수색 닷새째였다. 사진=박현광 기자
일부 남은 한봉인 근린공원에선 70여 명의 과학수사대가 흙을 파헤치고 있었다. 수색 닷새째였다. 한 조에 6~7명씩 총 10여 개 조가 능선 이곳저곳에 자리 잡았다. 삽으로 흙을 퍼 채에 걸렀다. 작은 단서 한 조각이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모습이었다. 오늘 하루만 총 109명이 투입됐다. 수색대장은 “겪어본 적 없는 대규모 수색작업”이라고 설명했다.
고가의 특수 탐지기까지 활용됐다. 경찰은 땅을 파헤치기 전 GPR(지표탐지 레이더) 3대와 금속탐지기 3대로 3600㎡의 축구장 크기만 한 땅을 훑었다. 의심 지역 136곳을 지정해 깃발을 꽂았다. 그 깃발을 중심으로 지름 1m, 폭 1m 크기로 파내면서 수색했다. 사흘 동안 아무것도 나오지 않자 닷새째 되는 11월 5일부터 수색 속도를 내기 위해 굴삭기를 동원했다.
경찰은 기약 없이 힘을 다할 때까지 수색을 이어갈 예정이다. 하지만 유골이 발견되리라고 큰 기대를 걸긴 어렵다. 경기남부경찰청 수사본부 관계자에 따르면, 이춘재가 범행 장소로 지목한 곳은 이미 아파트가 들어섰다. 현재 경찰이 수색하는 공원은 과거 A 양의 유류품을 최초 발견한 목격자 4명 가운데 2명이 지목한 장소다. 목격자 네 명은 새를 잡으러 다니던 사람들이었는데, 그 가운데 두 명은 이미 사망했다고 한다.
사흘 동안 아무것도 나오지 않자 닷새째 되는 10월 5일부터 수색 속도를 내기 위해 굴삭기를 동원했다. 사진=박현광 기자
경기남부경찰청 수사본부 관계자는 “과거 목격자나 주민을 상대로 탐문한 결과 지금 수색하는 장소에서 유류품을 봤다고 했다. 일말의 희망을 품고 수색을 하는 중”이라고 답했다.
누군가 현장에 꽃다발을 가져다 둘 정도로 추모 분위기가 가득하다. 하지만 화성 토박이들도 수색에 회의적이었다. 박 아무개 씨는 “그곳도 이미 30년이 지나면서 다 바뀌었는데 어떻게 장소를 딱 특정하겠나. 지금 수색하는 장소가 맞다고 한들 시신을 땅에 묻어두지 않았다면 유골 발견은 어려울 것”이라고 전했다.
당시 수사는 더디게 흘렀다. 사건 발생 5개월 뒤 A 양의 속옷은 나뭇가지에 걸려 새카맣게 변한 채로 발견됐다. 화성 연쇄살인 사건으로 흉흉하던 시기에 책가방, 치마, 신발 한 짝, 실내화 한 짝, 속옷 등 A 양의 유류품이 발견됐음에도 경찰은 유가족에게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A 양 유가족은 30년이 지나서야 당시 딸의 유류품이 발견됐다는 사실을 알고 분통을 터뜨렸다. A 양 어머니는 수색 첫 날인 11월 1일 기자들에게 “실종 당시 옷가지하고 가방이고 다 나왔을 때, 그때 시신도 발견됐을 거라는 합리적 의심을 한다”고 말했다.
경찰의 안일한 수사에 비판이 최근 쏟아지는 이유다. 당시 화성연쇄살인사건 수사를 지휘했던 경찰 관계자는 일요신문과 인터뷰에서 “(유류품이 발견되자) 살인 사건으로 보고 수색을 진행했지만, 시체가 발견되지 않아 실종 처리한 것”이라고 항변했다.
누군가 현장에 꽃다발을 가져다 둘 정도로 추모 분위기가 가득하다. 하지만 화성 토박이들도 수색에 회의적이었다. 사진=박현광 기자
A 양이 실종되고 1년 4개월 만인 1990년 11월 15일, 9차 사건이 발생했다. 그 장소 역시 느치미마을의 한봉이었다. 현재 경찰이 수색하는 장소에서 직선거리로 불과 300m가량 떨어진 가장 높은 봉우리에서였다. 이춘재는 가장 높은 봉우리에서 자신의 집도 내려다볼 수 있었다. 직선거리로 1.5km, 걸어서 20분 거리였다. 30여 년 전 그날의 공포는 아직 그 자리에 있었다.
박현광 기자 mua123@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