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흥민은 챔피언스리그에서 2골을 추가하며 차범근 전 감독의 유럽 통산 골 기록(121)을 넘어섰다. 사진은 손흥민을 칭찬하는 영국의 ‘더선’ 스포츠 섹션.
손흥민은 7일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라지코 미틱 스타디움에서 열린 츠르베나 즈베즈다와의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조별리그 4차전에서 2골을 넣으며 팀 승리를 이끌었다. 차범근 전 감독의 121골을 넘어 123골로 자신의 기록을 늘렸다.
한국 축구의 아이콘과 같은 존재인 차 전 감독과 손흥민은 본인들이 원치 않을지라도 자주 비교가 될 수밖에 없다. 독일 무대에서 유럽 커리어를 시작했고 최전방과 측면을 넘나드는 포지션도 유사하다. 국가대표로서도 다양한 대회에서 활약을 이어왔다.
두 아이콘 모두 독일 무대에서 활약했지만 세부적인 부분에서는 차이를 보인다. 차 전 감독은 20대 중반이 넘은 나이에 독일로 진출했다. 축구 선수로서 전성기에 접어드는 나이, 차 전 감독은 적응 기간도 없이 곧장 무르익은 기량을 선보였다.
그의 첫 분데스리가 진출은 1978-1979 시즌이었다. 다름슈타트에 입단했지만 1978년 12월 30일 치른 1경기 만에 국내로 돌아와야 했다. 군복무 관련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듬해 1979-1980 시즌부터 아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에 입단하며 본격적인 활약을 선보였다. 프랑크푸르트 입단 첫 시즌 31경기에서 12골을 넣었고 UEFA컵에서는 11경기에서 3골을 넣으며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반면 손흥민은 10대 시절 고교 중퇴 이후 독일 무대에 도전했다. 함부르크 유스팀에서 단계를 밟아나간 그는 2010-2011 시즌 프로 1군 무대에 모습을 드러냈다. 첫 시즌 분데스리가에서 선발과 교체를 오가며 13경기에 나서 3골을 넣으며 가능성을 선보였다.
한국 축구의 두 아이콘, 차범근 전 감독과 손흥민 모두 독일 바이어 레버쿠젠에서 활약한 이력을 갖고 있다. 사진은 2014년 레버쿠젠의 방한 경기에서 만난 차 전 감독과 손흥민. 사진=연합뉴스
#레버쿠젠 역사에 이름 남긴 차범근과 손흥민
이후 커리어에서 차 전 감독과 손흥민은 비슷한 길을 걷는다. 각각 프랑크푸르트와 함부르크에서 독일 내 바이어 레버쿠젠으로 팀을 옮긴 것이다. 이유는 제각각이었다. 차 전 감독은 프랑크푸르트의 재정 문제가 이유였다. 팀이 어려워지자 프랑크푸르트로선 높은 연봉을 받던 차 전 감독을 부자구단에 넘길 수밖에 없었다. 레버쿠젠은 아스피린을 만든 굴지의 제약회사 바이엘이 만든 팀이었기에 차 전 감독을 얼마든지 품을 수 있었다.
손흥민의 독일 내 이적은 ‘상위 팀으로의 진출’ 개념이었다. 함부르크는 숱한 우승컵을 들어올린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손흥민이 활약하던 당시는 저물어 가던 팀이었다. 데뷔 3년차 2012-2013 시즌, 33경기에서 12골 2도움을 기록한 손흥민을 상위권 팀이 내버려두지 않았다. 함부르크는 그를 보내며 1000만 유로(약 127억 원)를 받았고 손흥민은 상위권 팀 레버쿠젠에서 챔피언스리그 무대에도 모습을 드러내게 됐다.
차 전 감독과 손흥민 모두 레버쿠젠 유니폼을 입고 승승장구했다. 차 전 감독은 1985-1986 시즌 분데스리가 34경기에서 17골을 넣으며 커리어 하이 시즌을 만들었다. 또한 1988년에는 UEFA컵 우승컵을 들어 올리며 개인으로선 두 번째, 팀 역사상 최고 업적을 달성하기도 했다. 이후 1988-1989 시즌, 36세의 나이에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손흥민은 강등권을 전전하던 팀에서 상위권 경쟁을 벌이는 팀으로 이적하며 더 큰 주목을 받았다. 2~3위권 경쟁을 펼치던 도르트문트를 상대로 골을 기록하며 박수가 쏟아졌다. 2013년부터 2015년까지 2시즌 연속 해트트릭을 기록하기도 했다. 분데스리가에서만 98골을 넣은 차 전 감독도 경험해보지 못한 일이었다. 이외에도 손흥민은 유럽 상위권 팀들의 맞대결인 챔피언스리그에서도 활약하며 전 유럽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분데스리가에서 활약하던 시절의 차범근 전 감독. 사진=연합뉴스
#잉글랜드로 한 단계 도약한 손흥민
차 전 감독이 활약하던 1980년대는 분데스리가가 세계 최강으로 군림하던 시절이었다. 이에 다른 리그로의 이적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차 전 감독이었다. 하지만 손흥민은 상황이 달랐다. 이탈리아 세리에A 등을 거쳐 유럽 축구의 헤게모니가 잉글랜드로 넘어간 상황이었다. 특히 막대한 자본이 프리미어리그로 몰리며 잉글랜드 일부 구단들은 분데스리가와 비교할 수 없는 막대한 예산을 집행했다.
레버쿠젠에서 2시즌간 각각 12골과 17골을 기록한 공격수에게 손을 내민 팀은 토트넘 홋스퍼였다. 그 2시즌 사이 이적료는 세 배로 폭등했다. 토트넘은 레버쿠젠에게 3000만 유로(약 383억 원)를 지불했다. 손흥민은 토트넘에서도 성공 시대를 이어갔다. 이적 첫 시즌 다소 고전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2016-2017 시즌부터 팀의 주축 선수로 자리잡았다.
특히 지난 시즌부터 이어져온 맹활약은 ‘전성기에 접어들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즈베즈다전에서의 멀티골로 차 전 감독의 기록을 넘어선 손흥민은 2019년 챔피언스리그 경기에서 가장 많은 골(9골)을 넣은 선수에 이름을 올렸다. 이번 시즌으로 기간을 한정해도 4경기에서 5골을 넣으며 득점 순위 3위에 올라있다. 유럽 전체에서도 명문으로 손꼽히는 유벤투스 등과 이적설을 뿌리는 상황이다.
#국가대표팀에서의 활약
당대의 아이콘으로 손꼽히는 이들이기에 국가대표에서도 맹활약을 이어갔다. 어린 시절부터 특출함을 자랑하던 차 전 감독과 손흥민이다. 이에 이들은 18세의 나이로 A대표팀 유니폼을 입으며 각각 최연소 발탁 19위와 13위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최연소 A매치 데뷔 부문에서는 순위가 더 높다. 손흥민은 5위, 차 전 감독은 12위다. 최연소 득점 순위 역시 마찬가지다. 손흥민은 18세 194일에 인도를 상대로 득점하며 역대 2위, 차 전 감독은 18세 354일에 캄보디아를 상대로 골망을 흔들어 6위에 올라있다.
차 전 감독은 A대표팀에 최초 발탁됐던 1972년부터 마지막 경기를 치른 1986년까지 136경기에 나서 58골을 기록했다. 이는 아직까지 대한민국 역사상 최다출장, 최다골 기록으로 남아있다. 분데스리가에 진출한 1978년 이후로는 1986 멕시코 월드컵 조별리그 3경기에만 뛰었다. 현재와 같은 A매치 시스템이었다면 그의 기록은 더욱 늘어났을 것으로 보인다.
손흥민은 커리어 내내 독일에서 활약했지만 현재 국제축구연맹(FIFA)의 체계적인 A매치 데이 운영으로 꾸준히 국내외를 넘나들며 A매치에 출장했다. 만 27세에 불과한 현재 이미 85경기 26골이라는 기록을 쌓아 올렸다.
숱한 A매치에서 활약한 이들이지만 활약 무대는 다소 달랐다. 차 전 감독이 국가대표에서 뛰던 1970년대는 대표팀이 월드컵 문턱에서 번번이 좌절을 겪던 시기였다. 차 전 감독은 최종예선 무대에서 매번 눈물을 삼켜야 했다. A대표팀에서 멀어진 1986년, 동료들이 월드컵 본선 진출을 이뤄냈고 다시 대표팀에 합류해 3경기에 나섰지만 골을 기록하지는 못했다. 태국의 킹스컵, 말레이시아의 메르데카컵, 국내 박스컵 등 중소 컵대회에서 많은 경기를 소화했다.
손흥민은 아시안게임 금메달로 개인 최초로 태극마크를 달고 우승 타이틀을 거머 쥐었다. 사진=대한축구협회
반면 바쁜 유럽 일정에서도 빠짐없이 A매치에 나서고 있는 손흥민은 두 차례 월드컵 본선 무대에 올랐다. 그는 월드컵 본선 6경기에 모두 나서 3골을 넣으며 또 다른 전설 박지성, 안정환과 한국인 월드컵 본선 최다골 기록 보유자로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차 전 감독과 손흥민은 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라는 공통분모로도 엮여있다. 차 전 감독은 1978 방콕아시안게임에 나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조별리그부터 토너먼트까지 전승으로 결승에 진출한 차 전 감독은 금메달을 놓고 북한과 만났다. 90분 정규시간, 연장전까지 승부를 가리지 못한 이들은 공동 우승으로 금메달을 거머쥐었다.
손흥민은 40년 뒤인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리스트가 됐다. 연령 제한이 없던 40년 전과 달리 규정이 변경됐기에 손흥민은 와일드카드 자격으로 대회에 나서 후배들과 함께 메달을 걸었다. 이와 함께 예술체육요원에 편입돼 군복무 혜택이라는 ‘보너스’를 받기도 했다. 차 전 감독의 경우 당시에도 예술체육요원 제도가 있었지만 군복무를 마쳐가던 시점이었기에 이 같은 혜택을 받지는 못했다. 현역 군인이 메달로 군면제를 조기에 마치는 사례는 2014년이 돼서야 나왔다. 또한 이들은 각각 1972년과 2015년 각각 아시안컵 준우승을 달성했다는 공통점도 존재한다.
김상래 기자 scourg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