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연쇄살인사건 전반을 재조사하고 있는 경기남부지방경찰청 수사본부는 11월 15일, 이춘재가 화성 8차 사건의 진범이라고 공식 발표했다. 수사본부는 이춘재의 “8차 사건도 내가 저질렀다”는 자백과 윤 씨의 과거 진술 등을 토대로 실제 진범이 누구인지 여부에 대해 수사를 벌여왔다. 경찰은 이춘재가 범행과 관련한 내용을 자세하고 일관성이 있게 말하고 사건 현장 상황과 일치하지만, 윤 씨의 과거 자백은 모순된 점이 많다고 밝혔다.
윤 씨 변호인단은 이날 윤 씨가 과거 검거된 이후 작성된 진술조서와 피의자 신문조서 등 총 5건의 기록을 공개했다. 이춘재의 최근 자백과 윤 씨 변호인단이 공개한 수사기록, 일요신문이 확인한 피해자 부검 사진 및 감정서, 현장검증 사진 등과 비교해보면 경찰의 설명대로 이춘재의 자백에는 윤 씨의 기록과 달리 수사 현장에서 나온 의혹을 해소하고 수사 과정에서 수사관들조차 알 수 없었던 내용까지 담겨 있다. 그는 범죄 혐의를 시인하는 걸 넘어 오직 범행을 저지른 범인만이 설명할 수 있는 ‘비밀’을 폭로했지만 윤 씨는 그렇지 못했다.
윤 씨 측 변호인단은 11월 15일 과거 윤 씨가 검거된 이후 작성된 진술조서와 피의자신문조서를 공개했다. 사진=문상현 기자
#피해자 집 익숙한 이춘재, 처음 가 본 윤 씨
►이춘재 “후배가 살아서 어릴 적 자주 가본 집”
►윤 씨 “집안 불 빛 보여 순간적으로 침입 충동 생겨”
앞서 경찰은 화성연쇄살인사건 5·7·9차 사건 피해자 유류품에서 나온 DNA가 이춘재의 것과 일치한다는 국과수 감정 결과를 근거로 그를 유력 용의자로 특정하고 수사를 벌여왔다. 경찰 수사본부 관계자 등에 따르면 이춘재는 경찰과의 대면조사 과정에서 초기엔 범행을 부인하다가 혐의를 모두 시인했는데, 여기에 범인이 특정돼 유죄 확정 판결까지 내려진 8차 사건이 포함돼 있었다.
이춘재는 화성 8차 사건 발생 일시와 장소, 침입경로, 피해자 모습, 범행 수법 등을 구체적이고 일관되게 진술했다. 8차 사건은 나머지 9개 사건과 달리 유일하게 ‘집 안에서’ 벌어진 사건이었다. 그동안 8차 사건이 화성연쇄살인사건 모방 범죄로 분류돼 온 이유이기도 하다. 30년 전에 발생한 사건인데도 이춘재가 관련 정보를 기억하는 건 이 같은 8차 사건만의 ‘특징’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춘재의 진술을 종합하면, 그에게 피해자의 집은 익숙했다. 그는 경찰 대면조사 과정에서 “(피해자 집에) 중학교 1년 후배가 살아서 어릴 적 가 봤다. 이 친구가 이사한 뒤엔 외지 사람들이 와서 사는 것을 알고 있었다”라고 말했다.
이춘재의 학창 시절(1980~1983년)과 범행 시점(1988년 9월 16일)에는 시간 차이가 있다. 친구가 떠나고 피해자의 가족들이 새로 이사하면서 집 구조도 바뀌었다. 실제 사건 발생 이후 촬영된 현장 검증 사진 등을 보면 피해자의 방 근처에는 새로 지어진 듯 보이는 시멘트 구조물 등이 보인다.
그러나 이춘재는 최근 경찰 대면조사 과정에서 사건 발생 당시 이 집의 구조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집 안팎의 모습뿐만 아니라 바뀐 구조물, 방 안의 가구 등을 그림까지 그려가며 설명했다. 범행 현장에 가보지 않았다면 알 수 없는 정보들이다.
윤 씨의 진술조서와 피의자 신문조서 등에는 다른 내용이 적혀있다. 기록을 보면, 윤 씨는 늦은 밤 산책을 하다가 피해자의 집을 ‘우연히 발견해’ 침입했다. 특별한 목적 없이 울적한 마음에 길을 걷다가 희미한 불빛이 보여 다가갔다는 취지다.
그러나 윤 씨의 수사기록에는 다른 내용이 기재돼 있다. 과거 윤 씨가 검거된 지 3일 후인 1989년 7월 28일 작성된 2회 피의자신문조서에는 “책꽂이에 책이 있었나”, “책상이나 책꽂이가 무슨 종류인지 알고 있나”, “피해자 방 구조나 벽 색깔 등을 알고 있나” 등 방 구조에 대한 구체적인 질문에 윤 씨는 모두 “잘 모르겠다”라고 답변한 것으로 나와 있다.
이춘재는 집 구조 등을 그림까지 그려가며 설명했지만, 윤 씨의 피의자신문조서에는 방 구조에 대한 구체적인 질문에 “잘 모르겠다”는 답변만 적혀있다. 사진=문상현 기자
#살갗 벗겨질 정도의 마찰…‘맨손’과 ‘양말 끼운 손’
►이춘재 “대문 열고 들어갔다”
►윤 씨 “담 넘어서 침입했다”
이춘재는 경찰 대면조사에서 피해자 집 대문을 열고 들어갔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진술조서와 피의자 신문조서 등에는 일관되게 윤 씨가 “담을 넘어 침입했다”고 적혀있다. 현장 검증 사진 등에도 윤 씨가 담을 넘는 모습이 담겨 있다.
진술조서와 피의자신문조서에는 윤 씨가 방 문 앞에 있던 책상을 양손으로 짚고 들어갔다는 내용도 적혀있다. 실제 과거 수사기록에는 피해자 방 안에 있던 책상 위에선 흙이 발견됐다고 기록돼 있다. 맨발자국 3개였는데, 구체적으로 왼쪽 발가락과 오른발 뒤꿈치, 십자 모양으로 찍힌 족적 등이다.
하지만 윤 씨는 세 살 때부터 소아마비를 앓아 왼쪽 다리가 불편하다. 신체적 조건상 담을 넘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책상을 넘어 침입하는 일도 어렵다. 이에 대해 화성연쇄살인사건을 재조사 중인 경기남부청 수사본부 관계자는 “책상 위에 찍힌 맨발의 흔적 형태는 윤 씨 신체 상태와 모순된다”며 “현장검증 당시 두 손을 책상에 짚고 침입하는 건 사진상으로 확인되지만 당시 현장에는 윤 씨 유류 지문이 확인되지 않았다”라고 밝혔다.
►이춘재 “양말 끼우고 범행”
►윤 씨 “맨손으로 범행”
이춘재는 피해자 집에 들어선 이후 신고 있던 구두를 벗고, 양말을 손에 낀 채 맨발로 피해자 방에 침입했다. 양말을 끼운 손으로 범행을 저질렀다는 설명이다. 경찰이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에 범행 당시 사진을 재감정 의뢰한 결과 “A의 시신에서 발견된 범행 흔적이 맨손으로 한 것은 아닐 것”이라는 추정이 나왔다.
실제 일요신문이 국가기록원에 방문에 확인한 화성 8차 사건 부검 감정서에는 피해자 목 오른쪽(우경부)과 왼쪽(좌경부), 오른쪽 쇄골부위 등에서 ‘표피박탈’이 보인다고 기재돼 있다. 살갗이 벗겨지는 표피박탈이 발생할 정도로 힘이 가해졌다면 맨손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 교수는 지난 11월 8일 일요신문에 “손에서는 땀이 나기 때문에 목을 졸랐을 때 표피박탈이 일어나기 어렵다. 표피박탈이 일어났다면 장갑 등을 끼고 범행했을 가능성이 크다”라고 설명했다.
그 밖에 맨손으로 범행을 저질러 살갗이 벗겨졌다면 마찰로 인해 범인의 손에도 큰 상처가 남을 수밖에 없다는 분석도 나온다. 그러나 윤 씨의 진술조서와 피의자신문조서 어디에도 장갑이나 헝겊 등을 손에 끼웠다는 내용은 나오지 않으며, 현장검증 사진 등에서도 윤 씨는 맨손이었다.
윤 씨와 변호인단은 지난 11월 13일 수원지방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사진=최준필 기자
#이춘재 ‘진범’ 결정적 증거…‘피해자의 속옷’
►이춘재 “피해자 바지와 속옷 완전히 벗기고 근처에 있던 새 속옷 입혔다”
►윤 씨 “피해자 바지와 속옷 무릎까지 내리고 다시 올려 입혔다”
경찰이 이춘재가 진범이라는 결론을 내린 결정적 증거는 피해자가 입고 있던 속옷이다(관련기사 [단독] 이춘재 화성 8차 사건 ‘진범’ 결정적 증거는 ‘피해자의 속옷’). 이춘재는 경찰 조사에서 “피해자의 속옷과 바지를 완전히 벗기고 범행한 뒤, 근처에 있던 다른 속옷을 피해자에게 입혔다”며 “원래 속옷은 범행 과정에서 나온 혈흔을 닦은 뒤 유기했다”라고 진술했다.
사건 발생 이후 촬영된 피해자의 시신 사진을 보면, 숨진 피해자는 속옷을 거꾸로 입고 있었다. 속옷 상표 등이 찍힌 라벨이 밖으로 나와 있었던 것이다. 반면 윤 씨의 진술조서와 피의자신문조서에는 “피해자의 속옷과 바지를 무릎까지 내리고 범행한 뒤 다시 입혔다”라고 기재돼 있다.
경찰은 이춘재가 이 ‘자백’을 하기 전, 과거 수사기록이나 현장 사진 일체를 보여주지 않았다. 이춘재는 실제로 범행을 저지른 범인만이 알 수 있는 ‘비밀’을 말했고, 그 내용이 수사기록과 정확히 일치한 것이다. 수사본부에 따르면 프로파일러들은 이춘재 자백에 대해 피해자의 기본정보, 속옷 재착의 등에 대해 일관되게 진술하고 있고, 언론 등을 통해 알게 된 정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직접 보고 경험한 것, 즉 감각정보에 기반하여 진술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경기남부청 수사본부는 피해자 속옷과 관련된 이춘재의 진술을 국과수에 감정의뢰했다. 감정 결과 “피해자가 거꾸로 속옷을 입었다는 확률보다는 피의자(이춘재)가 현재 진술하고 있는 부분이 더 합리적이다”라는 통보를 받았다고 밝혔다. 앞서의 수사본부 관계자는 “과거 수사 기록엔 속옷을 뒤집어 입었다는 부분이 없었는데 현장 사진 등을 확인해 본 결과 속옷을 뒤집어 입은 것을 확인했다”며 “중학생인 피해자가 속옷을 거꾸로 입었다고는 볼 수 없어 ‘옷을 무릎까지 내려 범행을 했다’는 윤 씨의 진술보다는 ‘완전히 벗기고 다른 속옷으로 다시 입혔다’는 이춘재의 자백에 더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경찰은 윤 씨가 주장하고 있는 과거 경찰의 고문 등 위법행위와 윤 씨를 범인으로 특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과거 국과수의 방사성 동위원소 분석에 대해선 아직 수사를 진행 중이다. 수사본부에 따르면 과거 경찰관들은 “윤 씨가 범인이라는 국과수 수사 결과가 있어서 고문(가혹행위)을 할 이유가 없다”는 취지로 부인하고 있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
윤씨 “30년 한 풀렸다” 이제야 함박웃음 윤 씨는 그동안 기자와 만나면서 좀처럼 웃음은 보이지 않았다. 농담을 던져도 옅은 미소만 지을 뿐 금방 얼굴이 굳어졌다. 감정을 드러내는 게 익숙지 않다고 했다. “할 말은 한다”면서도 감정 표현은 아꼈다. 이춘재의 자백 소식을 알게된 이후에도, 재심을 추진하는 과정에도 그랬다. 그런데 경찰의 공식 발표 소식을 접한 윤 씨는 전과 다른 모습을 보였다. 그는 11월 15일 오후 일요신문에 “30년 한이 풀리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동안 좀처럼 보이지 않았던 큰 웃음소리를 들려주기도 했다. 그는 “이춘재가 진범이라고 잠정 결론을 내렸다”는 경찰의 공식 발표가 가지는 의미를 박준영 변호사를 통해 전해 들었다고 했다. 재심을 앞두고 있지만, 적어도 2019년 11월 15일 전의 윤 씨와 그 이후의 윤 씨는 이제 전혀 다른 사람이다. 그는 “지금의 경찰이 고생을 너무 많이 했고, 도움을 주고 있는 모두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윤 씨는 외가 가족을 찾고 싶다고 말했다. 지난 11월 13일 재심청구 기자회견에서도 기자들에게 부탁했던 말이다. 윤 씨 어머니는 세 살 때부터 소아마비를 앓던 그를 한 번도 업어주지 않았다. 안아주고 싶고, 업어주고 싶어도 한 걸음 더 걷고, 한 번 더 움직여야 한다며 엄격하게 자신을 키웠다는 게 윤 씨의 설명이다. 그는 어머니가 어릴 때부터 운동을 시키지 않았다면 지금쯤 휠체어를 타고 다녔을 것이라고 말했다. 윤 씨는 “어머니의 성함은 박금식이고, 충북 진천 출신이다. 아시는 분은 꼭 연락을 달라”고 했다. 문상현 기자 |
윤 씨 자필 입장문 전문 “절 강하게 키워주신, 어머니를 찾습니다” 윤 씨는 재심을 청구한 지난 11월 13일, 자신이 직접 쓴 입장문을 공개했다. 그는 초등학교 3학년까지 학교를 다녀 글을 읽고 쓰는 게 서툴다. “입장문을 잘 썼다”는 기자의 말에 그는 “전날 밤새 찾아보고 물어가면서 써서 한숨도 못 잤다”며 웃었다. 다음은 윤 씨의 자필 입장문 전문이다. 맞춤법 등 수정 없이 그대로 게재한다. 저는 무죄입니다. 오늘은 너무 기분이 좋습니다. 교도소를 나와는데 갈고도 없고 오라는데도 없습니다. 뷰티플라이프 나OO 원장님이 저를 잘 돌보아 주셨습니다. 박OO 교도관님은 인간적으로 저를 대화를 잘해주시고 상담도 잘해주시고 항상 많은 도움을 주시고 종교위원님 한달에 만남을 주시고 힘들고 외로울 때 많은 것을 주시고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누님에게도 깊이 감사드리고 저에게 큰 도움을 주셨습니다. 그곳에 지내는 동안에 몸이 아플 때 누님께서 무척 큰 도움을 주셨습니다. 숙부님께도 깊이 감사드립니다. 좋은 말씀도 해주시고 항상 건강하라고 부디 몸관리 잘하고 주어진 생활과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고 하셨습니다. 광역수사대 박OO 반장님 및 김OO 경사님께 감사드립니다. 저에게 희망을 주시고 꼭 일을 해결하시계다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머님께 감사드립니다. 어머님은 저에게 모든 것에 희망을 주시고 저를 인간답게 살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어머님을 무척 존경합니다. 어머님은 저를 아프 다리를 재활에 더욱 신경을 써주시어고 남들처럼 살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외갓집을 찾고 싶습니다. 어머니 조함은 박금식입니다. 고향은 진천입니다. 저인 어머님을 아시는 분은 연락 주세요. 여기 오시 기자님들 도와주시면 일이 잘 되고 잘 되것 같습니다. 지금 경찰은 백프로 믿습니다. 끝까지 최선을 다해주세요. 문상현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