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대회 18회 우승과 국내대회 32회 우승을 기록한 이세돌이 24년의 현역 기사 생활을 마감했다.
이세돌은 형 이상훈 9단과 함께 19일 오전 한국기원을 직접 방문해 사직서를 제출했다. 이미 예고했던 은퇴지만, 바둑계 인사와 팬들에게 다가오는 충격은 적지 않았다. 프로기사 박정상 9단도 “동료를 넘어서 개인적으로 팬이었다. 남다른 기질과 기발한 발상으로 그 누구보다 재미있는 바둑을 보여줬다. 또한 승부사의 자세와 바둑에 대한 고뇌를 함께 공유하던 사랑하는 선배였다”라고 안타까움을 표했다. 다른 프로기사들도 “앞으로 이세돌의 바둑을 보지 못해서 아쉽다”라는 점에서 대부분 의견을 같이했다. 이세돌은 이미 2~3년 전부터 입버릇처럼 ‘세계대회 우승에 도전 못 하게 되면 은퇴하겠다’라 말해왔었다. “기질 상 AI로 인해 바둑 수에 개성이 사라지는 걸 받아들이기 힘들어했다”는 진단도 있다.
1995년 7월 2일 이세돌(왼쪽)은 12세 4개월의 나이에 조한승과 함께 입단했다.
‘올해 말 내년 초’로 예정했던 은퇴 일정이 앞당겨진 건 프로기사회와 불협화음, 한국기원과 갈등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2016년 5월 프로기사회 탈퇴로 시작된 불화는 지난 7월 한국기원 정관 변경으로 절정에 달했다. ‘한국기원 주최 기전엔 기사회 소속 기사만 참가할 수 있다’는 내용으로 사실상 기사회 손을 들어준 결론이었다. 기원 입장에선 다시 기사회로 돌아오라는 제스처가 포함되었지만, 이세돌 측 생각은 달랐다.
2000년 12월 박카스배 천원전에서 우승한 이세돌. 이때부터 타이틀 사냥을 시작했다.
일요신문과 전화인터뷰에서 이세돌의 형 이상훈은 “사직서를 내고 함께 기원을 나오는데 마음이 착잡했다. 휴직을 고려했지만, 한국기원이 정관을 통해 대회 참가자체를 막은 상태라 이후 복직이 의미가 없었다. 세돌이는 올해 푹 쉬고, 내년부터 바둑과 관련 없는 일을 할 생각이다”라고 말했다. 기사회 적립금을 둘러싼 소송은 은퇴와 관계없다. 한국기원은 기사회 요청으로 이세돌이 기사회를 탈퇴한 후 지난 3년간 상금공제액(국내 기전 5%, 해외 기전 3%)을 보관하고 있다. 반환요청금은 약 3200만 원 정도다. 현재 진행 중인 이 소송은 기사회를 친목단체로 규정한 이세돌과 기사회 사이 자존심 대결에 가깝다.
2002년 제15회 후지쓰배 우승트로피를 든 이세돌.
정치권에서 러브콜이 올 수도 있다. 마침 국회에서 바둑계를 대표하는 조훈현 의원(자유한국당)은 내년 총선에 불출마선언을 한 상태고, 더불어민주당 쪽에서 바둑계 인사 공천을 고려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도는 시점이다. 이세돌의 정치성향은 이미 대외적으로 밝혀져 있다. 이에 대해 최근 이세돌은 “아직까진 정치권에 들어갈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2014년 5월 중국 윈난성 샹그릴라에서 열린 이세돌과 구리의 ‘고원의 결투’ 10번기 5국. 당시 이세돌은 고산지대의 생소함을 극복하고 2-2의 상황에서 반격에 성공했다.
현재 한국기원은 기자회견이나 은퇴기 등 별도 행사를 준비하진 않고 있다. 올해 바둑대상 예정 수상자 명단에도 없다. 한국기원과 소송 등으로 대립각을 세우고 있어서 뭔가 준비할 명분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기원 측에선 “무엇보다 이세돌과 이상훈 형제가 대화 자체를 거부하고 있다”며 난색을 보인다.
2016년 3월 인공지능 알파고와 대결에서 이세돌은 1승 4패로 패했지만, 이세돌이 거둔 1승은 현재까지 인류의 유일한 승리이며 마지막 승리일 가능성이 크다.
이세돌과 10번기에서 뜨겁게 경쟁했던 구리 9단은 자신의 웨이보에 “지금은 꼭 안아주고 싶을 뿐, 할 말은 수천수만 가지인데 이제 누구와 이야기를 나눌까”는 말을 시작으로 “고맙다! 알파고라는 강적을 만나 ‘신의 한 수’로 인류의 지혜와 보물을 지켜줬다. 너는 내게 언제나 추구할 목표였다. 함께 바둑에 길을 걸을 수 있어 감사했다. 혹시 기억할지 모르겠다. 언젠가 내게 ‘정상에서 내려가도 후회는 없다. 그래도 난 이 생에 한번 멋지게 살아봤잖아’라고 말했지. 이 한 잔은 너의 화려했던 과거, 다음 한 잔은 너의 희망찬 내일을 위해 건배한다. 이 세상에 다시없는 독보적인 이세돌로 거듭나길 기원한다”라는 문장을 남겼다.
알파고와 함께 신의 한 수를 남긴 세기의 승부사 이세돌은 끝내 바둑판에서 돌을 쓸어담았다. 불합리와 틀에 박힌 상식을 싫어했던 개성 넘치는 그의 성향이 바둑판 너머 세상 2막에선 어떤 족적을 남길까.
박주성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