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교보생명에서는 예정에 없던 이사회가 열렸다. 이사회는 신상만 최고리스크관리자(CRO)를 보직해임 하고 IFRS17(새로운 국제보험회계기준·International Financial Reporting Standards 17) 준비팀으로 이동시키는 인사를 의결했다. 리스크관리 담당에 임명된 지 1년도 안된 시점에서, 전무급인 그를 회계 관련 부서로 보낸 것은 사실상 좌천성 인사라는 것이 금융권의 시각이다.
신창재 교보생명 회장. 사진=구윤성 기자
금융권은 이번 인사 조치의 원인이 FI와 신창재 회장의 분쟁에 있다고 해석한다. 오너의 회사 경영권이 위협받는 상황까지 몰리자, 이에 대한 책임을 물었다는 것이다.
신창재 회장은 한때 백기사였던 FI와 경영권 분쟁을 벌이는 중이다. 교보생명은 2007년과 2012년 기업공개(IPO)를 조건으로 FI로부터 대규모 자금을 유치했다. FI들은 자산관리공사와 대우인터내셔널로부터 지분 600만 주를 사들였다. 그해 9월 주주 간 계약(SHA)을 체결하며 양측은 2015년 9월까지 교보생명 IPO가 이뤄지지 않으면 신 회장이 주식을 되사가도록 풋옵션을 행사할 수 있다는 내용을 포함시켰다.
하지만 약속했던 IPO가 계속 늦춰지자 지분 24.01%를 보유하고 있는 어피너티 컨소시엄(어피너티·IMM PE·베어링 PE·싱가포르투자청) 등 FI들은 지난해 10월 풋옵션 행사를 통보했다. 계약 당시 약속했던 것보다 3년이 더 흐른 만큼 이제 교보생명 IPO가 물 건너갔다고 보고 담보로 잡은 지분을 매각해 투자한 자금을 회수하겠다는 의사였다.
어피너티 컨소시엄은 딜로이트안진회계법인을 통해 보유지분의 가치를 주당 40만 9000원으로 계산하고 이 가격에 주식을 되사가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신 회장은 이러한 가격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다. 최근에는 풋옵션의 효력 자체도 문제 삼기 시작했다. 신창재 교보생명 회장은 “계약서상 내가 IPO를 약속한 적은 없고, 다만 ‘대주주로서 (IPO와 관련해) 주어진 권한과 책임, 역할 하에서 최선의 노력을 하겠다’고 약속했을 뿐”이라고 언론 인터뷰에서 밝혔다. 이에 대해 FI들은 2015년 9월 기한을 명시한 풋옵션의 존재 자체가 IPO 약속의 증거라는 입장이다.
결국 어피너티 컨소시엄은 국제상업회의소(ICC) 서울사무소에 중재를 신청했다. 신 회장 측은 한 차례 답변서 제출을 미뤘다가 결국 답변서를 제출하고 중재에 응했다. 이후 또 다른 FI인 SC PE(5.33%)도 중재를 신청했다.
교보생명은 아직도 공식적으로 산출한 주당 가치를 밝히지 않고 있다. 그간 언론 등을 통해 제시된 ‘주당 20만 원 선’은 신 회장이나 교보생명의 공식 입장은 아니다.
신 회장 측이 주당 가격에 예민한 이유는 자칫하면 보유주식을 팔아야 하는 상황이 올 수 있기 때문이다. 중재 재판이 신 회장 측에 불리하게 결론이 날 경우, 신 회장은 최소 1조 원 이상을 자금을 마련해야 한다. 신 회장이 보유한 자산은 교보생명 지분 34%가 거의 전부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자금 확보를 위해서는 회사 지분을 팔아야 하고, 이 경우 경영권이 흔들리는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
재무적투자자(FI)와 신창재 교보생명 회장이 경영권을 놓고 중재재판을 벌이고 있는 교보생명에 심상찮은 기운이 감돌고 있다. 교보생명 건물 전경. 사진=일요신문DB
이처럼 민감한 사안이다 보니 갑작스런 CRO 해임이라는 극단적 조치까지 나온 것도 무리는 아니라는 것이 금융권의 해석이다. 이런 가운데 최근 경영지원실장을 맡고 있는 이 아무개 부사장 경질설까지 나오고 있어 이번 일이 교보생명 내부의 파워게임으로 변질되고 있다는 신호라는 해석도 나온다. 이 부사장은 신 회장을 대신해 FI와 협상 테이블에 앉았던 인물로 전해진다. 해임된 신상만 전무가 이 부사장의 핵심 측근이라는 이야기도 들린다. 금융권 한 고위 관계자는 “어느 조직에나 파벌은 있는 것 아니냐”면서 “이번 일을 계기로 FI와 엮여있는 이 부사장 라인이 시험대에 올랐다는 의미”라고 전했다.
다만 이 같은 중대 사안의 최종 의사결정을 내린 이가 신 회장일 가능성이 큰 만큼 참모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더구나 FI와 신창재 회장의 갈등으로 회사가 전반적으로 어수선한 상황에서 경영진까지 흔드는 것은 회사 전체의 안정성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우려도 높다.
금융권의 다른 고위 관계자는 “오너의 경영권이 걸린 문제에 오너 본인이 아닌 어느 누가 감히 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겠는가”라면서 “본인이 선택해놓고 일이 잘못되자 아랫사람에 책임을 묻는 방식으로는 임직원들의 신뢰를 유지하기 힘들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와 관련, 교보생명 관계자는 “CRO가 교체된 이유는 회사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IFRS17을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직무이동이고, 장기적 관점에서 리스크 관리는 좀 더 회사를 오래 다닐 수 있는 후배에게 양보한 측면이 있다”면서 “FI 간의 분쟁은 현재 중재 중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풋옵션 가격의 합리적인 결정이 이뤄지면 그에 따라 FI의 투자금 회수를 지원해주면 되는 문제로 경영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설명했다
내부갈등과는 별도로 교보생명이 다시 IPO에 나서려는 움직임이 포착된 것도 주목된다. 금융권에 따르면 교보생명의 상장 주관사인 NH투자증권은 최근 한국거래소에 올해 안에 상장예비심사를 청구할 수 있는지 타진했으며, 이에 대해 거래소 측은 예비심사 청구 자체는 가능하다는 회신을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예비심사가 이뤄진다고 해서 본격적으로 상장 절차에 들어간다는 의미는 아니다. 실제로 거래소는 상장을 허용할지에 대해 고심을 거듭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거래소는 소유권의 다툼이 있는 등 분쟁 중인 기업의 상장은 허용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그런데 교보생명은 상장여부를 놓고 분쟁이 일어난 만큼 ‘닭과 달걀 중 누가 먼저냐’인 상황이어서 거래소의 고민이 깊은 것으로 알려진다.
교보생명이 상장예비심사 청구가 가능할지 타진한 것 자체도 사실은 이 같은 규정에 저촉되는지를 묻기 위한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최근 거래소의 상장 규정이 다소 완화됐다는 점도 변수가 될 전망이다.
다만 시장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 교보생명이 IPO를 추진하다 중도포기 한 전력이 여러 차례 있기 때문이다. 증권사 한 고위임원은 “여의도 시각에서 보는 교보는 ‘양치기 소년’”이라며 “교보생명 상장은 한마디로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라고 전했다.
이영복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