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 씨 자필 진술서는 총 11건으로 A4용지 34쪽 분량이다. 이 가운데 날짜와 날인이 함께 찍힌 진술서는 총 4건, A4용지 17장에 불과하다. 나머지 A4용지 15장의 진술서는 날인 없이 날짜만 있거나 날짜도 없는 것으로 미뤄 ‘연습용 진술서’로 해석된다.
30여 년 전, 화성 연쇄살인 사건 당시 경찰이 8차 사건에 이어 9차 사건에서도 허위 자백을 받아낸 정황이 드러났다. 9차 사건 피의자 윤 아무개 씨 자필 진술서 A4용지 34쪽 분량 가운데 15장엔 날짜와 날인이 함께 찍혀있지 않다. ‘연습용 진술서’로 해석된다. 사진=박현광 기자
9차 사건은 1990년 11월 15일 화성군 병점리(현재 화성시 병점동)의 야산에서 중학교 2학년 김 아무개 양이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된 사건이다. 당시 20세였던 윤 씨는 사건 발생 한 달 뒤 1990년 12월 14일 경찰에 체포된다. 진술서에 따르면 처음엔 성범죄 혐의로 체포된 윤 씨가 체포 4일 뒤 9차 사건 범행을 시인한다.
1990년 12월 27일 13건의 성범죄와 1건의 살인 혐의로 검찰에 기소된 윤 씨는 재판 끝에 무혐의로 풀려난다. 9차 사건 현장에서 나온 정액과 윤 씨의 DNA가 불일치한다는 검사 결과 덕이었다. DNA 검사 결과가 없었더라면 9차 사건의 윤 씨도 8차 사건의 윤 아무개 씨처럼 억울한 옥살이를 했을 가능성도 있다.
공교롭게도 9차 사건의 윤 씨는 무혐의를 받은 지 채 1년도 되지 않아 갈비뼈에 악성 육종이 생기는 병을 얻어 투병 7년 만에 숨진다. 윤 씨의 형 A 씨는 “동생이 경찰 가혹행위 때문에 병을 얻어 숨졌다”고 주장한다(관련 기사 [단독] ‘살인의 추억’ 박해일 실제 모델 “경찰 수사 후유증으로 숨졌다”).
#경찰이 써준 종이 토대로 연습하고 받아 쓴 정황
윤 씨는 체포 첫날인 12월 15일 총 13건의 성범죄를 시인한다. 먼저 윤 씨는 3년 8개월 전인 1987년 4월부터 1988년 10월까지 있었던 9건의 성추행 범죄를 자백한다. 이때 윤 씨는 각 사건의 날짜와 시간, 피해자 나이, 심지어 피해자가 달아난 집 방향까지 정확히 기억한다.
윤 아무개 씨 다른 필체로 적힌 ‘피의자 윤OO 자백 내용‘ 제목의 문건이다. 윤 아무개 씨는 4건의 강간 혹은 강간미수 사건에 대한 자백 내용을 바꾸는데, 위 문건 내용과 일치한다. 누군가가 써준 문서를 보고 따라 썼다는 추정을 할 수 있는 부분이다. 사진=박현광 기자
이어 윤 씨는 4건의 강간 혹은 미수 혐의도 털어놓는다. 총 13건의 성범죄 자백이 담긴 두 건의 진술서엔 날짜와 날인이 없거나 날짜는 있지만 날인이 없다. 본 진술서를 쓰기 전에 연습한 흔적으로 보인다. 처음 자백한 9건의 성추행에 대한 진술은 번복되지 않고 검찰 기소 때까지 유지된다.
하지만 4건의 강간 혹은 강간미수 범행 내용은 이틀 뒤인 12월 17일 작성된 진술서에서 ‘재조합’된다. 범행 대상 나이가 ‘23세’에서 ‘17세 여고생’으로 바뀌거나 두 번째 범행 내용 일부가 네 번째 범행으로 둔갑하는 방식이다. 이때 윤 씨의 필체와 전혀 다르게 쓰인 ‘피의자 윤OO 자백 내용’이라는 문건이 등장하는데, 윤 씨가 재조합해서 쓴 진술서 내용과 일치한다. 누군가가 써준 문서를 보고 따라 썼다는 추정을 할 수 있는 부분이다.
#우발적으로 죽였지만 팔다리 뒤로 묶고 시신 훼손까지
윤 씨는 체포 4일 뒤인 12월 18일 9차 사건 범행을 시인한다. 이때도 ‘연습용 진술서’가 등장한다. 윤 씨는 첫 진술서에서 긴박한 범행 당시의 기억하기 힘든 사실까지 진술한다. “피스톤 운동을 약 30회 했다”는 내용이 대표적이다. 이 진술은 검찰 피의자 신문에서 “여러 차례”로 바뀐다.
윤 아무개 씨가 체포 첫날 시인한 성범죄 13건 가운데 9건이 담긴 진술서. 윤 씨는 체포되기 3년 8개월 전인 사건의 날짜와 시간, 피해자 나이, 심지어 피해자가 달아난 집 방향까지 정확히 기억한다. 사진=박현광 기자
범행 방법이나 현장 상황과 상충하는 진술도 있다. 윤 씨는 피해자 옷을 벗기지도 않은 상태에서 피해자가 소리치자 피해자 속옷으로 입을 막았다고 진술한다. 다음 진술서에서 ‘나체로 만든 뒤’라는 내용이 추가된다. 피해자 치마 속으로 손을 넘어 추행한 뒤 치마를 입은 피해자의 바지와 속옷을 벗긴다는 등 앞뒤가 맞지 않은 진술도 등장한다. 스타킹이 아닌 스카프로 목을 졸랐다는 내용도 있다.
윤 씨의 진술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다. 윤 씨는 피해자가 소리치는 바람에 입을 틀어막아 우발적으로 피해자를 죽였다고 줄곧 진술한다. 하지만 윤 씨는 김 양이 숨을 쉬지 않자 분한 마음에 훼손하고 스타킹으로 양손과 양발을 뒤로 묶은 뒤 산 밑으로 끌고 내려와 옷과 나뭇잎으로 덮어주고 도망쳤다고 진술한다. 초범의 우발적인 범행이라고 믿기 어려운 지점이다.
#범행 도구 정답 맞을 때까지 네 번 진술 번복
9차 사건 피해자 시신은 날카로운 도구로 10차례 정도 훼손된 상태였다. 그 도구는 피해자가 필통에 들고 다니던 면도칼이었다. 윤 씨는 처음엔 필통 속 연필 깎는 칼이라고 진술했다가 일할 때 쓰던 아크릴 절단용 칼이라고 말을 바꾼다. 윤 씨는 아크릴 절단용 칼 그림을 그리거나 시체를 훼손한 뒤 아크릴 절단용 칼을 등 뒤로 던졌다는 구체적인 진술까지 한다. 당시 사건 현장에 있던 나무에서 날카로운 도구로 찍힌 흔적이 발견되는데, 그 흔적을 설명하려는 것으로 해석된다.
윤 아무개 씨가 그린 아크릴 절단용 칼. 윤 아무개 씨는 시신을 훼손할 때 쓴 도구에 대한 진술을 네 번 번복한다. 약촌오거리나 삼례나라슈퍼 사건에서 누명 쓴 사람들의 진술서에 나타나는 특징과 같다. 사진=박현광 기자
윤 씨는 다시 필통 속 연필 깎는 칼이라고 범행 도구를 번복했다가 끝내 면도칼이었다는 진술을 해낸다. 범행 도구가 여러 차례 번복되는 특징은 재심으로 무죄를 받은 ‘약촌오거리’ 사건과 ‘삼례나라슈퍼’ 사건의 누명 쓴 범인들의 진술서에서 동일하게 나타난다.
#같은 진술서에서 ‘있었다’와 ‘있었습니다’ 혼용해, 8차와 비슷
9차 사건 윤 씨의 진술서에서는 ‘~있었습니다’는 식의 경어체가 쓰였는데, 불쑥불쑥 ‘~있었다’는 식의 평어체가 등장하기도 한다. 이는 경찰 가혹 행위로 허위 자백해 20년 옥살이를 했다고 말하는 8차 사건 윤 아무개 씨 진술서에서 나타나는 특징과 동일하다. 누군가 불러준 말을 급하게 받아쓴 흔적으로 추정된다.
윤 아무개 씨의 진술서에는 ‘~있었다’체와 ‘~있었습니다’체가 혼용해서 나타났다. 8차 사건 윤 아무개 씨의 진술서에 나타난 특징과 동일하다. 누군가 불러준 말을 급하게 받아쓴 흔적으로 추정된다. 사진=박현광 기자
윤 씨는 범행을 부인하는 시도를 계속했다. 윤 씨는 12월 21일 형 A 씨와 처음 면회하고 난 다음 날인 12월 22일 진행된 현장검증에서 판사에게 처음으로 자신이 진술을 뒤집는다. 하지만 윤 씨는 다시 경찰 조사를 받게 되면서 범행을 인정한다. 12월 25일 경찰 피의자 신문에서 자신의 범행을 또 한 번 번복하지만, 울면서 곧바로 다시 인정한다.
#윤 씨가 자백한 이유, “사형판결 받을 것 같아서”
윤 씨는 12월 26일 현장검증 때 변호사와 함께 있는 형을 만난다. 그때 윤 씨는 또다시 범행을 부인한다. 윤 씨는 형을 보자 용기가 났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다시 경찰 신문을 받으면서 범행을 인정한다. 윤 씨는 12월 27일 검찰에 기소된 뒤 진술을 뒤집지 않다가 1991년 1월 12일 5회 검찰 피의자 신문에서 범행을 부인한다. 그리곤 끝까지 범행을 부인하는 입장을 고수한다.
당시 검사가 윤 씨에게 ‘왜 자백했느냐’고 묻자 윤 씨는 “잠을 충분히 자지 못하고 경찰관들이 추궁하여 처음에는 부인하다가 나중에는 시인했다”고 답한다. 범행 수법을 말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서 윤 씨는 “경찰관들이 유도했다”고 말했다. 범행 후 피의자가 보기 싫어 거들을 씌우지 않았느냐고 물어보는 식이었다고 전했다.
검사가 ‘왜 앞선 검찰 피의자 신문에선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느냐’고 묻자 윤 씨는 “검찰에서도 경찰에서 보낸 그대로 인정하여 법원에 기소하고 법원에 가면 사형판결을 받을 것 같아서 자백했다”고 설명했다. 자신의 소매에서 피해자의 혈액이 나왔다고 경찰에서 압박받았다는 말도 덧붙인다.
윤 씨 형 A 씨에 따르면 당시 윤 씨는 변호사도 없이 재판을 치렀다. A 씨가 동생에게 변호사를 선임해줬지만 법원에서 재판 기일을 하루 앞당겨 진행했고 이를 변호사에게 알리지 않았다고 한다. A 씨는 “동생만 생각하면 원통해서 눈물이 난다. 당시 형사들 사과도 필요 없다. 꼭 처벌받았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박현광 기자 mua123@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