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와 평화의 G5를 향하여’란 주제로 외교안보 정책비전 발표를 앞둔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와 나경원 원내대표가 10월 24일 국회 본관 앞 잔디에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다. 사진=박은숙 기자
당내 지지부진한 쇄신 작업으로 지도부 리더십이 도마 위에 오른 가운데 분수령은 12월 초 패스트트랙 정국이 될 전망이다. 황교안 대표는 일단 단식 농성에 돌입하며 패스트트랙을 필사 저지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상태다. 패스트트랙은 결국 원내 협상에 키를 쥔 나경원 원내대표 손에 달려있기도 하다.
패스트트랙 대결에서 패배한다면 그간 쇄신이 부족했다는 ‘책임론’과 함께 투톱 교체가 가시화 될 것이라는 관측에 힘이 실린다. 지도부 입성을 노리는 당내 잠룡들의 목소리가 커지며, 비상대책위원회 및 원내대표 경선 체제로 전환될 수 있다는 얘기다.
김세연 의원(3선, 부산 금정구)의 11월 17일 불출마 선언은 파급력이 컸다. 그의 요구는 △황 대표와 나 원내대표의 선도 불출마 △의원 전원 불출마 △당 해체로 요약된다. 한국당을 두고 “생명력을 잃은 좀비”, “역사 속으로 사라져야 한다” 등의 발언은 논란에 중심에 섰다.
김 의원 발언이 파장을 낳은 이유는 일단 그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에 찬성한 복당파이자, 당내 대표적인 중도개혁 성향의 인물이기 때문이다. 11월 5일 김태흠 의원(재선, 충남 보령시서천군)이 ‘강남 3구, 영남권 3선 이상 중진 용퇴론’을 제기한 이후, 유민봉(초선, 비례) 김성찬(재선, 경남 창원시진해구) 의원이 불출마 선언을 했지만 중량감은 떨어진다는 지적이 나왔다. 영남권 중진 중 불출마 선언을 한 것은 김 의원이 처음이다. 물론 최근 김무성(6선, 부산 중-영도) 의원이 “통합의 밀알이 되겠다”며 불출마 입장을 밝혔으나, 지난해 6·13 지방선거 참패 이후 이미 불출마를 시사한 터라, 새로운 선언으로 보기는 어렵다.
이 같은 이유로 김 의원의 선언 이후 당내 쇄신 바람이 본격적으로 일지 관심이 집중됐다. 특히 당장 내년 총선에서 불리한 싸움이 예상되는 수도권에서는 친박 비박을 떠나 김 의원의 주장에 공감하는 기류가 강했다. 하지만 이러한 목소리가 당내 주류를 차지하기는 어려운 분위기가 조성됐다. 당내 기득권을 차지하는 영남권 친박이 ‘요지부동’으로 일관했기 때문이다. 핵심 당직을 차지한 영남권 친박계 의원들은 김 의원의 ‘좀비정당’, ‘당 해체‘ 발언을 두고 ‘해당행위’라며 강한 반감을 드러냈다.
김세연 자유한국당 의원. 사진=박은숙 기자
당내 쇄신 작업이 지지부진하자 황교안 대표와 나경원 원내대표의 ‘입’에 관심이 쏠렸다. 특히 총선 불출마와 당 해체 요구에 응답할지가 관건이 됐다. 그러나 황 대표는 18일 최고위원회의에서 ‘총선 패배시 사퇴’라는 우회적인 답을 꺼내들었다. 당내에선 ‘밥 먹으면 배부르다’는 식의 당연한 얘기가 아니냐는 비판이 나왔다. 한 수도권 비박계 중진의원은 “총선에 패배한 당 대표가 자리를 내놓는다는 것은 지극히 일반적인 상식 아니냐”며 “국민들의 쇄신 요구는 저만치 올라왔는데 당 대표의 현실 인식은 너무 한가하다”며 꼬집었다.
바른미래당 유승민 전 대표와의 보수통합 논의가 주춤하고 박찬주 전 대장 영입 논란 등 인재영입 작업도 브레이크가 걸린 가운데, 당에 불어 닥친 쇄신 요구마저 제대로 응답하지 못하는 상황이 연출되자 황 대표 리더십은 더욱 위기를 맞는 모양새가 됐다. ‘정치 신인’의 한계로 이대로는 내년 총선을 치루기 힘들다며 당 일각에선 비대위 출범 가능성이 솔솔 제기되기도 했다.
황 대표는 막판 뒤집기를 노리고 있었다. 반전 카드는 바로 ‘단식’이었다. 공개적인 단식 선언은 11월 20일에 했지만, 황 대표가 단식을 실제로 준비한 시기는 18일부터다. 과거 준비 없이 단식을 했다가 건강상 고통을 겪은 이정현 전 새누리당(현 한국당) 대표나 지난해 김성태 한국당 원내대표의 사례를 참조한 것으로 해석된다.
황 대표 한 측근은 “김세연 의원 기자회견(17일) 후 바로 결심을 한 것으로 보인다. 당내에서 의견을 구하지 않고, 외부의 조언과 스스로 결심해 측근들에게 월요일 저녁쯤 통보했다. 측근들이 명분이 명확하지 않다며 강하게 만류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월요일부터 이미 속을 비우고 죽을 먹으며 준비를 했다”라고 설명했다. 19일 황 대표는 서울 강남의 한 병원에서 영양제 처방을 받기도 한 것으로 전해진다.
황 대표 단식 명분은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 파기 철회 △공수처법 철회 △연동형 비례대표제 선거법 철회다. 단식을 해제하려면 이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지소미아는 일단 22일 종료 조건부 유예를 얻어냈기에 산 하나는 넘었다. 패스트트랙에 오른 선거법은 11월 27일, 공수처법은 12월 3일 본회의에 각각 부의된다. 황 대표는 패스트트랙 저지를 위해 단식을 계속 유지하겠다는 입장이다. 만약 패스트트랙을 막지 못한다면 단식을 멈출 명분은 찾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처럼 벼랑 끝 전술을 내세운 이유는 그만큼 리더십이 흔들리고 있다는 방증이다. 단식 농성은 황 대표에게 ‘양날의 검’으로도 작용하고 있다. 만약 성과를 도출해낸다면 위기를 불식시키고 황 대표 체제를 공고히 할 수 있다. 황 대표가 단식을 시작한 지 이틀 만에 당 총선기획단은 ‘현역 의원 50% 물갈이’ 공천룰을 꺼내들며 단식과 쇄신이 맞물려 가는 모습을 보여줬다.
하지만 단식을 통한 성과가 결국 기대에 못 미친다면 비대위 체제에 대한 요구가 전면 등장할 수 있다. 그간 미흡한 쇄신에 불만을 갖고 있는 비박계와, 황 대표 체제를 끊임없이 비판하는 홍준표 전 대표 등 잠룡들은 이번 단식 결과를 주목하는 양상이다. 비대위 체제가 들어설 경우 누구를 위원장으로 내세울지도 벌써부터 얘기가 나온다. 당내 상황에 정통한 한 핵심 당직자는 “과거 박근혜 대표 시절 새누리당 비대위 성공의 경험을 살려 중도로 확장하는 인사를 내세울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문재인 정부에서 일했던 고위급 관료도 언급되고 있다”라고 귀띔했다.
불출마 요구에 직면한 나경원 원내대표의 향후 행보도 주목된다. 일단 나 원내대표는 “패스트트랙 저지라는 역사적 책무를 다한다면 어떤 것에도 연연해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불출마에 선을 그으며, 패스트트랙 저지를 명분으로 꺼내든 것이다.
12월 임기가 만료되는 나 원내대표는 ‘유임론’과 ‘교체론’이 교차하는 상황이다. 유임에 힘을 싣는 측에선 내년 총선을 고려해 인지도가 높은 나 원내대표를 간판으로 내세워야 한다는 입장이다. 반면 교체를 주장하는 쪽에선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사퇴 공헌 의원 표창장 사건과 패스트트랙 수사 대상자 공천 가산점 실언, 원내 협상 전략 부재 등을 지적하고 있다.
결국 나 원내대표의 최대 시험대 역시 패스트트랙이 될 수밖에 없는 형국이다. 임기가 만료되기 전 패스트트랙 부결에 성공한다면 유임에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통과 시 제대로 된 원내 전략을 세웠느냐는 비판에 직면하며 유임에 빨간불이 켜질 수 있다. 원내대표 출마를 고려하는 이는 친박계에서 유기준(4선, 부산 서구동구) 심재철(5선, 경기 안양시동안구을), 비박계에서는 강석호(3선, 경북 영양군영덕군봉화군울진군) 의원이 거론된다.
권준혁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