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4일 2020학년도 대학 수학능력시험을 치른 수험생들 사이에서 올해 지급된 수능 샤프가 논란이다. 8년 만에 바뀐 수능 샤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는 것. 2011년 바른손의 ‘제니스 사태’ 이후 가장 논란이 된 수능 샤프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벌써부터 내년 2021학년도 수능을 치르는 수험생들의 관심사는 이거다. ‘우리도 같은 샤프를 쓰게 될까?’
8년 만에 수능 샤프가 바뀌었다. 한 수험생이 올해 지급된 수능 샤프로 필기를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13번 입찰 따낸 샤프 회사, 올해 바뀐 이유는?
논란은 수능 한 달 전부터 시작됐다. 수험생들이 모이는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올해 샤프가 바뀐다더라’는 이른바 ‘샤프 교체설’이 돌기 시작한 것이다. 최근 8년 동안 수능 샤프가 변경되지 않았던 터라 샤프 교체설은 큰 파장을 일으켰다. 여기에 한 인터넷 쇼핑몰에서 동아 XQ 세라믹 샤프2가 수능샤프로 선정되었다는 광고 문구가 사용하면서 교체설은 기정사실화 되었고 실제 지급된 샤프도 ‘동아연필’의 동아 XQ 세라믹 샤프2였다.
‘장인은 도구를 탓하지 않는다’지만 수험생들에게 샤프란 전장에 들고나가는 무기와 같다. 감을 익히겠다며 수험생활 1년 내내 동일한 제품의 샤프로 공부하는 학생도 적지 않다. 고2 학생이 수능을 치른 교실에 몰래 잠입해 버려진 샤프를 가지고 나오는가 하면, 일부 고등학교 교사들은 학생들을 위해 수능 샤프를 모아두기도 한다. 그뿐인가. 부모들은 ‘좋은 기운을 가진 필기구가 필요하다’며 명문대에 입학한 학생의 수능 샤프를 비싼 값을 치르고 거래하기도 한다. 모두 1년에 한 번뿐인 그날을 위해서다.
이렇듯 수능 샤프는 수능의 전체 컨디션을 좌우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올해 갑자기 수능 샤프가 바뀐 것을 두고 각종 의혹이 제기됐다. 이제껏 수능 샤프로 자리매김했던 샤프는 ‘유미상사’의 ‘e-미래샤프’였다. 2005학년도 수능에서 대규모 부정행위가 발생해 수능 샤프를 일괄 지급한다는 규정이 생긴 이후부터 2011학년도 수능을 제외하고는 13년 동안 유미상사가 수능 샤프를 납품해왔다.
일각에서는 샤프 교체가 일본 불매 운동의 영향이 아니냐는 주장이 제기됐다. 지난 8월 25일 한 민원인이 한국교육과정평가원(평가원)에 ‘유미상사의 e-미래샤프에 일본산 부품이 들어간 것이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했다. 그러나 평가원은 “해당 민원이 제기된 때는 8월이고 납품업체가 선정된 것은 그 이전인 6월”이라며 선을 그었다.
일본 필기구 회사인 고토부키사의 한국법인인 (주)수한의 홍보영상. ‘대한민국 수능 샤프 공식 제공자’라는 내용의 자막이 쓰여있다. 사진=수한 유튜브 캡처
국산품 규정에 어긋난 것이 아니냐는 추측에도 무게가 실렸다. 평가원에서 제공하는 제품규격서에 따르면 수능 샤프는 OEM을 제외한 국산품에 한한다. OEM이란 생산자가 주문자로부터 제품 설계도를 받아 제작하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 입찰을 따낸 업체가 샤프 설계부터 제작까지 모두 책임져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유미상사의 샤프가 일본의 필기구 회사인 고토부키사의 한국법인인 (주)수한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불거졌다. 의혹은 (주)수한이 자사 홍보 영상에 수능 샤프인 e-미래샤프 시리즈를 올리면서 더욱 증폭됐다. 일요신문 취재 결과 (주)수한은 1994년 (주)유미라는 회사와 인수·합병했으며 이것이 (주)수한의 제2공장이 되었다. 실제로 e-미래샤프와 (주)수한에서 제조한 샤프를 비교해본 결과 두 샤프의 부품이 서로 호환도 가능했다.
추측대로 유미상사와 (주)수한이 동일 회사라면 OEM/ODM 규정에는 어긋나지 않는다. 그러나 외국인투자회사이자 외국인 지분이 49.46%나 되는 (주)수한과 합병한 업체에서 만들어진 샤프가 과연 국산품인가에 대한 의문이 남는다. 유미상사 관계자는 22일 일요신문과의 통화에서 “유미상사와 (주)수한의 관계에 대해서는 내부 규정 상 말해 줄 수 없다”고 말했다.
#논란의 수능 샤프, 올해 고2도 만나게 될까?
수능 샤프를 둘러싼 많은 논란이 있었지만 어찌됐건 수능은 끝났다. 이제 다음 수능을 보게 될 고2 학생들의 관심사는 ‘내년에도 같은 샤프를 쓰게 되느냐’다. 평가원은 보안을 이유로 이와 같은 질문에 답해줄 수 없다고 했지만 지금처럼 비판이 빗발치는 분위기에서는 내년에도 같은 샤프를 보게 될 가능성은 다소 적어 보인다. 매년 수능이 끝나면 평가원에서 자체적으로 품질확인과 소비자 평가가 치르는 까닭이다. 따라서 시험을 치르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라면 이어지는 소비자 평가에서도 높은 점수를 얻는 것이 힘들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평가원에서 제공하는 계약특수조건 제7조(계약일반조건 제14조)에 따르면 납품업체가 수요자평가에서 70점 미만의 평가를 받은 경우에는 점수에 따라 계약금액의 일정 부분을 감액할 수 있다. 60점 이상 70점 미만일 경우에는 계약금액의 10%를, 50점 이상 60점 미만일 경우에는 20%를 감액한다. 이보다 낮은 50점 미만의 점수를 받으면 계약을 해지하거나 이듬해 계약대상에서 제외된다. 이 소비자 평가는 매년 수능이 끝난 이후 수험생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통해 실시된다.
소비자평가와는 별개로 평가원 자체 품질확인도 한다. 품질에 대한 평가 방법은 언론보도 및 일부 수험생 설문조사를 통해 실시된다. 다시 말해 시험 종료 후 품질논란을 야기한 민원이 있거나 언론보도 등이 있으면 대금 지급이나 계약 연장이 어려워진다는 뜻이다. 국내 문구업계 관계자는 “역대 최악의 수능 샤프라는 오명을 떨쳤던 2011학년도 바른손의 제니스도 품질이 좋지 않다는 평이 나왔고 이듬해 입찰에서 떨어졌다. 체감상 올해 샤프보다 그 평가가 더 좋지 않았다. 전국 수험생의 하루가 샤프에 달린 만큼 여론이 높게 반영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이에 대해 평가원 관계자는 “보안 규정상, 현재 납품된 샤프의 업체 이름도 확인해 줄 수가 없다. 그러나 매년 수능이 끝난 후 소비자 평가와 품질확인 절차를 거치는 것은 맞다”고 말했다.
#최저가 입찰, 수능 샤프만으로 돈은 안 되지만…
수능 시장을 독점하면 떼돈을 벌 수 있을 것 같지만 항상 그렇지만은 않다. 수능 시장이야말로 어디에도 없는 최저가 경쟁이기 때문이다. 국내 필기구 업체들이 쉽사리 입찰 경쟁에 뛰어들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업계 관계자들은 “수능 샤프 시장은 단가를 맞출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여기에 하청 제조도 불가능하다. 우리같이 고급 필기류를 취급하는 회사에서는 가격 조건을 맞추기 힘들어 입찰조차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실제로 수능 샤프 구매에 배정된 예산은 많지 않다. 조달청의 통해 확인이 가능한 2013학년도부터 2020학년도까지의 샤프 구매에 배정된 예산은 매년 2억 원 정도다. 구매 수량은 매년 60만~80만 개. 올해는 약 2억 6000만 원의 예산이 배정되었으나 입찰 추정가는 2억 3000만 원 정도였다. 62만 4550개의 샤프와, 시험실 별 1통씩 지급되는 샤프심 2만 6450개를 정해진 예산 내에서 제공하기 위해서는 최소 개당 383원의 단가를 맞춰야 한다는 뜻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단가를 맞추기 위한 업체들을 노력은 계속된다. 올해 지급된 동아 XQ 세라믹 샤프2 역시 시장에 유통되는 일반 상품과 비교해보면 부품과 디자인 면에서 조금씩 달랐다. 특히 선단 부분의 촉이 기존의 제도용 금속에서 플라스틱으로 변경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2011학년도 수능 샤프였던 바른손의 제니스 역시 단가를 낮추기 위해 중국산 부품을 사용한 것이 훗날 감사를 통해 밝혀져 논란이 된 바 있다.
수능 납품만으로는 큰 이득을 보지는 못하지만, 재미를 보는 부분은 다른 데 있다. 수능 샤프라는 이미지로 시장에서 꾸준히 사랑 받을 수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13년간 수능 시험장에 샤프를 납품했던 유미상사의 대표 상품은 e-미래샤프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19학년도에 이어 2020학년도에도 수능을 치른 A 씨(19)는 “대부분의 학생이 관례처럼 수능 샤프를 구입해 사용했고, 입시 학원에서도 매년 수능 샤프를 대량 구입해 학생들에게 나눠주곤 했다. 고등학생이라면 대부분 그해 수능 샤프를 산다”고 말했다.
A 씨는 그러면서 “샤프에 대한 뉴스가 나올 때마다 주변에서 ‘빈 수레가 요란하다’고 하는데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속상하다. 난방기에서 나오는 소리에도 예민한 날이 수능 시험이다. 필기구가 중요한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말했다.
최희주 기자 hjo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