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이영애. 사진=굳피플 제공
“제가 애들 아빠를 많이 이용했죠(웃음). 아빠 찬스를 써서 아빠가 애들을 재워주고, 애들하고 놀아주면서 제 몫을 나눠 가졌어요. 이 자리를 빌어서 남편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네요. 이렇게 말해 줘야 다음 작품 때도 또 해주겠죠? 부부 좋다는 게 뭐예요(웃음).”
‘아빠’에게 조금 더 일찍 맡겼다면 우리는 보다 빨리 이영애를 만날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2005년 영화 ‘친절한 금자씨’ 이후로 스크린에서 관객들과 마주하는 것이 꼬박 14년 만의 일이다. 2017년 드라마 ‘사임당: 빛의 일기’로 “아직 이영애가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주긴 했지만 스크린 속 살아 숨쉬는 그를 기대한 관객들에게는 이번 작품 ‘나를 찾아줘’가 가뭄 끝 단비일 수밖에 없다.
“제가 20대, 30대는 정말 배우로서 원 없이 만끽했었어요. 작품의 성패를 떠나서 제가 이제껏 해보지 못했던 역할, 다양한 역할, 아무도 모르고 저만 아는 역할이라도 정말 열심히 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30대 후반 즈음 되니 ‘내가 여기서 더 뭘 다 바랄까, 더 하면 욕심이다’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가정을 찾고, 엄마와 아내로서 가정에 뿌리내리기 위한 역할을 맡았어요. 그러는 동안 14년이 지났다는 걸 실감을 전혀 못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아마 지금 제 나이가 (다시 배우 활동을 하기에) 늦다면 늦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어떻게 보면 또 적기라고 생각해요. 앞으로는 이렇게 긴 공백은 다시 없을 거예요. 저는 더 하고 싶거든요.”
이영애의 말대로 그는 한 남자의 아내이자 두 아이의 엄마가 된 지금, ‘엄마’의 모습으로 스크린 위에 섰다. 그가 복귀작으로 선택한 영화 ‘나를 찾아줘’는 6년 전 잃어버린 아들 윤수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엄마 ‘정연’의 이야기를 그린다. 아동학대와 실종, 타인에게 무관심한 사회의 모습 등 무겁고 축축한 주제를 한 데 뭉쳐서 관객들에게 던지는 이 영화는 이영애에게 있어 하나의 터닝 포인트였다고 했다.
배우 이영애. 사진=굳피플 제공
극중 이영애는 ‘아들 찾기’를 방해하는 홍 경장(유재명 분)과 치열한 몸싸움을 벌이는 모습으로 관객들을 놀라게 했다. 그의 나이나 공백기를 생각하면 필요 이상으로 과격한 신일 수 있다는 지적도 일었다. 그러나 오히려 이영애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집에 와서 보니까 저도 모르는 멍이 온 몸에 있긴 하더라고요(웃음). 그런데 재미있었어요. 오랜만에 영화를 찍다 보니까 배우로서 감정의 폭이 변화무쌍하잖아요. 그걸 오랜만에 연기하는 게 너무 재밌더라고요. 물론 대역 배우 분이 하신 부분도 좀 있었지만 기본 라인이나 흐름은 제가 액션스쿨까지 다니면서 따라가려고 노력했어요. 이 자리를 빌어서 대역 분께도 너무 감사하단 말씀을 드리고 싶네요(웃음).”
그렇게 물불 가리지 않는 연기를 보여준 이영애는 나이나 성별이라는 개념 자체로만 설명되는 캐릭터보다 더 폭넓은 스펙트럼으로 연기를 확장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그래도 이영애인데 대본을 가리지 않을까’라며 망설이는 영화계 관계자들은 이영애가 힘주어 말한 발언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저는 대본을 가리지 않습니다”
“저도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이영애가 (이 작품을) 하려고 할까? 은퇴한 거 아니야? 가정도 있는데…’ 하면서 주저하시는 분들이 계시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한테 (출연 제안을) 주시면 또 달라질 수 있거든요(웃음). 이번에 ‘나를 찾아줘’ 덕으로 제가 출연하는 작품을 골라 보실 수 있는 폭이 또 넓어지지 않았나 생각해요. 영화도 어떻게 보면 트렌드인데, 비슷한 영화들이 나오는 것도 좋지만 저희 영화 같은 장르도 많이 봐주시면 영화 제작자들이 새로운 것을 또 시도하게 될 거예요. 관객도 다양한 장르를 많이 볼 수 있어서 선택의 폭이 풍요로워지고, 배우도 매번 20대 위주로 하는 게 아니라 40대, 50대로 폭을 넓히는 다양한 시도를 배우도 하고, 제작자들도 하면 좋지 않을까요?”
배우 이영애. 사진=굳피플 제공
“애들이 이제 크면서 엄마가 이영애인 걸 알잖아요. 안 그래도 얼마 전에 청룡영화제에 우리 딸이 갔는데, 보고 나서 집에 오는 길에 저한테 전화해서 ‘엄마, 벌써 왔어?’ 하는 거예요. ‘왜?’ 했더니 ‘기생충에 박소담 배우 사인을 받아와야지 그냥 오면 어떡해’ 그러더라고요. 제가 그래서 ‘야, 네 엄마가 이영애야!’ 했는데 안 통하더라고요. 우리 딸한테는 엄마가 이영애가 아니라 그냥 엄마는 엄마인가봐요(웃음).”
이처럼 가정에서는 엄마이면서, 업계에서는 완벽하게 입지를 쌓아올린 데뷔 29년차 배우로 살아남은 이영애는 잠들기 전에 아이들과 함께 늘 세 가지 기도를 올린다고 했다. 첫 번째는 세계의 평화를 위해, 두 번째는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세 번째는 가정의 평화와 가족의 건강을 위해서라고.
너무나도 거창하면서도 한편으론 더없이 보편적인 이 소원을 듣고 웃음이 터질 수도 있지만 이영애는 누구보다 진지해 보였다. 아이들이 후세에 살아갈 세상이 복잡하고, 또 위협받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마음을 담은 기도라는 것이다. 그의 인터뷰가 있기 하루 전, 또 한 명의 젊은 목숨이 세상을 등진 일이 있었다. 이영애의 기도에는 그들을 위한 마음도 담겨있었다.
“20대라는 질풍노도의 시기에서 혼란을 겪으며 사라져 가는 후배들을 보면 이제 겨우 시작인데, 하는 마음에 너무 가슴이 아파요. 너무 이른 나이에 데뷔해서 갈피를 잡지 못하는 친구들도 많으니까요. 저도 그 시기를 겪어보면서 느낀 건 스스로가 조금 더 많이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거예요. 저는 20대 때 스스로 거울 속 제 눈을 보고 질문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계속 질문을 하면서 스스로를 곧추세우는 그런 시도가 필요하지 않을까. 자꾸 주변의 말에 휩쓸려가다 보면 다시 돌아가기엔 너무 힘들고 먼, 자기도 모르는 자리에 와 있는 경우가 많거든요. 삶의 중간에서 자신을 스스로 점검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