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부터 그야말로 ‘소처럼 일했다’라는 말이 들어맞는 배우다. 2년간 개봉한 영화만 총 열두 작품. 드라마까지 합치면 열일곱 작품으로 대중을 만났다. 스스로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2년을 보낸 배우 유재명(46)은 2019년의 마지막을 선이 굵은 악역으로 마무리하게 됐다. 그는 27일 개봉한 영화 ‘나를 찾아줘’에서 아들을 찾아 헤매는 ‘정연(이영애 분)’과 대적하는 부패 경찰 홍 경장을 맡아 또렷하고, 소름끼치는 존재감으로 관객들과 마주한다.
배우 유재명. 사진=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제공
지난 26일 서울 종로구 소격동의 한 카페에서 유재명을 만났다. 단어 하나하나 세심하게 골라 문장을 만들어내는 그에게서 영화 속의 악랄한 모습을 한 끗도 찾아볼 수 없었다. 누군가 배우는 마음속에 온·오프 스위치를 가지고 있어 마치 신이 실리듯 ‘연기’가 자신의 안에 들어왔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가 천양지차라고 했다. 유재명 역시 캐릭터를 벗고 나면 ‘자연인 유재명’이었다.
“배우는 주어진 작품이라는 세계 안에서 표현해야 하는데, 일상과 어떻게 잘 분리시킬 수 있는지는 그 배우가 가진 기술에 달린 것 같습니다. 저 자신은 자연인 유재명이지만 홍 경장을 맡았을 땐 홍 경장의 삶을 살았고, 지금까지 작품을 하면서 그런 식으로 작업적인 선택을 해 왔어요. 작중에서 홍 경장은 태풍도 잘 지나갔고, 정년도 얼마 안 남았고, 일 무사히 마치고 근처에 펜션 하나 지어서 잘 늙어가는 게 꿈인 사람이죠. 자기만의 어떤 권력으로 일을 해결하려다 충돌을 일으키고, 폭력이 폭력을 낳고 오해가 오해를 낳는 그런 인물이에요. 홍 경장을 쫓아가다 보면 이 영화가 만들고 바라보고자 한 지점이 관객들에게 잘 전달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홍 경장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평화와 자기 안위를 무엇보다 중시하는 인물이다. 불순물인 ‘정연’이 등장하면서 생기는 평온함의 균열을 짐승 같은 감각으로 눈치채고, 그를 배제하기 위해 손에 피를 묻히는 일도 기꺼이 감수해낸다. 영화이기에 더욱 잔인하고 무도해 보이는 것일까. 유재명은 “허구보다 훨씬 더 심한 현실이 있다”며 고개를 저었다.
배우 유재명. 사진=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제공
“영화는 허구지만, 허구의 인물을 뒤쫓다가 진실을 목도하게 되는 게 이 영화의 방향성인 것 같아요. 그 이야기의 끝에는 우리가 놓치고 있던 것들이 있고, 그걸 통해 자신을 다시 직면하게 되는 계기가 되는 거겠죠. 이 영화는 소통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소통되지 못한 한 인간의 아픔을 공감하고 공유하지 못하는, 그 속에서 홀로 외롭게 울부짖는 정연을 통해서 우리가 알고 있으면서도 외면해 왔던 사회의 구조를 적극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거죠. 감독님과 배우들이 이 영화를 선택한 이유도 그런 진실을 가장 가깝게 표현할 수 있었기 때문이지 않았을까요?”
영화의 포커스는 정연에게 맞춰져 있지만, 홍 경장과 마을 사람들로 카메라를 옮기기 시작하면 축축한 현실이 관객들을 맞이한다. 실종 아동과 그들에 대한 관심의 부재라는 소재를 다루면서 영화는 아동학대에도 조명을 비춘다. 스크린에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폭력의 강도는 심하지 않고, 비춰지는 시간도 비교적 짧지만 대사와 조명이 만들어내는 분위기만으로도 관객의 숨통을 조여온다. 그 공기 속에서 연기를 하는 당사자들의 입장은 어땠을까.
“요즘은 드라마도 그렇고 영화 촬영 현장에서도 가이드라인이 있어요. 아역들에 대한 케어가 정말 많이 발전된 것 같아요. 어른 연기자더라도 함부로 아역들에게 터치나 호칭 같은 걸 마음대로 할 수 없게 돼 있거든요. 우리 아역들도 모두 소중한 동료이기 때문에 연기하는 동안 (바람직한 현장을) 제작진들이 다 만들어주셨어요. 특정 신을 소화할 때는 더 조심스럽고, 더 완벽하게 지키려고 했던 것 같아요.”
영화 ‘나를 찾아줘’ 스틸컷. 사진=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제공
이 같은 촬영 현장의 ‘세심함’은 아역들에게만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 단연 관객들의 눈길을 끄는 이영애와 유재명의 강렬한 ‘육탄전’ 액션신 역시 제작진의 철저한 계산 끝에 완성된 것이라고 한다. 일부 장면에서 대역을 쓰긴 했으나 이영애가 액션스쿨까지 다녀가며 흐름을 따라가려 애썼다고 밝혔던 바로 그 신이다.
“사실 그걸 ‘액션신’이라고 하기엔 좀 애매하긴 한데 그 장면에서 저는 대역을 안 썼어요. 제 대역만 없더라고요(웃음). 대신 최고의 합을 맞추려고 하시는 전문가 분들, 스태프 분들을 믿고 안전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면서 촬영했던 것 같아요. 선배님이 많이 가냘프시기 때문에 제가 조금만 힘주면 잘못될까봐 조심하려고 애썼죠. 처음에 감독님이 저라는 배우와 이 작품을 하고 싶다고 너무나도 적극적으로 말씀해주셔서 정신이 다 혼미했거든요. 내가 이 작품을, 이영애 선배님과(웃음)? 지금은 동료 배우로서 서로 칭찬하고 다독이는 관계가 됐는데 함께 연기할 수 있었던 게 제게는 정말 멋진 경험이 됐어요.”
‘나를 찾아줘’에 이어 올해만 ‘말모이’, ‘돈’, ‘악인전’, ‘비스트’ 등 굵직한 작품에서 무게감 있는 역으로 관객들을 연이어 만났던 유재명. 대중에겐 2015년 ‘응답하라 1988’의 류재명으로 더 익숙하고, 그 작품을 통해 처음으로 유재명이란 배우를 알게 된 사람도 많을 테지만 그는 18년 연기 경력의 베테랑 연기자다. 대학생 때 연극 동아리부터 친다면 그의 경력은 인생의 절반 이상일지 모른다. 연기가 생업이 될 것이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청년 유재명이, 이 길을 선택한 계기가 문득 궁금해졌다.
배우 유재명. 사진=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제공
“막연하게 청소년 때 ‘연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정말 밑도 끝도 없이. 대학 진학을 앞두고 있을 때였는데 그때는 국립대를 가면 효자잖아요? 그래서 일단 진학을 하고, 학교에 들어가자마자 스무 살 때 연극 동아리를 만들었어요. 이제까지 공연이나 무대, 연기, 이런 걸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상황에서 그냥 시도해본 거죠. 부산이 일단 인구도 많고 파이팅 넘치고 열정 있으신 분들이 많잖아요(웃음). 도시가 가진 매력도 그렇고 무수히 많은 문화가 복합적으로 존재하는 것, 거칠고도 정감 있는 분위기…그런 게 베이스가 돼서 부산 출신 연기자들도 많은가 봐요(웃음).”
불혹을 훌쩍 넘긴 지금, 유재명은 무엇보다 ‘그때 그 사람들’이 그립다고 했다. 매일매일 고달프면서도 특별한 하루를 함께 했던 이들이 아직 부산의 연극 무대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늘 생각하고, 항상 보고 싶죠. 매일이 특별하고 힘들었기 때문에 같이 고생했던 동료나 선후배 배우 분들이 다들 건강했으면, 자주 봤으면 하는 그런 마음이에요. 언제 한번 만나서 공연도 같이 하고 싶고 술도 한잔하고 싶은데 여의치가 않네요. 지난 2월인가 3월에 6년 만에 부산에서 (연극) 공연을 했어요. 약속을 못 드리는 게 참 민망하긴 한데 언젠가 연극이라는, 아주 기본적이고 원초적인 무대로 꼭 다시 돌아가고 싶어요.”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