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24일 트위터에 이른바 ‘기계 픽(Pick·사람이 직접 사지 않고 조작 프로그램으로 음원을 구매, 재생하는 것) 음원 사재기 논란’ 가수들을 실명 저격한 보이그룹 블락비의 멤버 박경을 향한 응원의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다. 수사기관에서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단순 의혹만으로 실명 저격에 나선 것은 법적으로 문제의 소지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경에게 박수가 쏟아지고 있으며 반대로 실명이 거론된 가수들이 박경에 대해 소를 제기한 것은 비판을 받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심지어 단순히 아이돌 팬덤뿐 아니라 가수와 엔터테인먼트 회사 경영진 등 동종업계 관계자들도 박경에 공감하는 이례적인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음원 사재기’ 의혹이 불거진 가수들의 실명을 거론한 박경의 트위터.
지난 24일 오전 6시께 박경은 트위터에 짧은 글을 올렸다. “바이브처럼 송하예처럼 임재현처럼 전상근처럼 장덕철처럼 황인욱처럼 사재기 좀 하고 싶다^^;;” 데뷔 18년차 바이브를 제외하면 대부분 무명 가수들로 채워진 이 목록은 올해 음원 사재기 논란의 중심에 선 인물들이기도 하다.
박경의 트위터에 실명이 언급된 가수들은 이튿날 저마다 공식입장을 내고 “사재기와 같은 범법행위를 저지른 바가 없다”, “실명을 거론해 아티스트의 명예를 훼손한 가수(박경) 측에 법적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강경 대응 계획을 밝혔다. 박경 측이 문제의 트위터 글을 삭제하고 사과했으나 이들은 “사재기 행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앞선 조사에서 밝혀졌음에도 마치 실재하는 것처럼 허위사실을 주장했다”며 사과나 합의와 별개로 정식 소송을 이어갈 것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이들의 주장처럼 지난해 이른바 ‘숀 안 대고 음원 순위 닐로 먹기’라는 유행어를 만들어냈던 가수 숀·닐로 등의 음원 사재기 논란으로 문화체육관광부, 공정거래위원회 등 관계기관이 조사에 착수한 바 있다. 문제는 이 결과 문화체육관광부 측이 직접 “사재기 여부를 정확하게 판단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내놨다는 것이다.
박경의 트위터 글이 문제가 되자 바이브의 멤버 윤민수는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이에 대한 반박 게시물을 올렸다. 사진=윤민수 인스타그램
그러나 이들의 주장과 달리 문화체육관광부는 단순히 “판단 유보”라는 입장을 내놨을 뿐이었다. 당시 문체부 관계자는 뉴스1에 “데이터 분석에 필요한 자료를 서비스 업자들에게 받아 분석했는데 개인정보보호법이 있어 더 깊은 분석을 할 수 없었던 것”이라고 밝혔다. 즉 제한된 데이터만으로는 분석이 불가능했기에 수사기관에 자료를 넘겨 수사를 이어가도록 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런 배경이 있는 가운데 이번에는 업계 관계자들까지 박경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면서 향후 수사와 그 결과에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먼저 지난 26일 인디밴드 술탄 오브 더 디스코가 팟캐스트 ‘정영진 최욱의 매불쇼’에 출연해 “음원 사재기 브로커에게 제안을 받은 적이 있다”고 폭로했다.
이들은 “페이스북 같은 데에 ‘소름 돋는 라이브’(페이스북 음악 광고 페이지) 같은 게 있다. 거기서 바이럴 마케팅을 하고, 새벽에 음원을 사면 대박이 났다고 한다. 업자들이 그런 페이스북 계정을 여러 개 가지고 있다”고 폭로했다. 앞서 사재기 논란에 이름을 올린 가수들이 “우리는 사재기를 할 돈도 없다”는 식으로 해명한 데에 대해선 “돈 없어도 사재기할 수 있다. 지네(사재기 논란 가수)는 돈 없겠지. 돈 대주는 사람들이 있다”고 반박하기도 했다. 음원 사이트의 1~10위에만 음원을 올려놓으면 그 이후로는 음원 수익이 계속 발생하기 때문에 브로커를 통해 순위를 조작하고, 발생한 수익의 일부를 브로커와 회사, 가수가 나눠 갖는 식이라는 이야기다.
직접 이 같은 내막을 폭로한 것은 아니지만 래퍼 마미손 역시 재치 있는 ‘디스’로 눈길을 끌었다. 지난 27일 발라드 곡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를 공개한 그는 “별 거 없더라 유튜브 조회수 / 페북으로 가서 돈 써야지”, “천 개의 핸드폰이 있다면 / 별의 노래(마미손의 곡)만 틀고 싶어”, “기계를 어떻게 이기라는 말이냐 / 내가 이세돌도 아니고”라는 가사로 사재기 논란 가수들을 겨냥했다.
제목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는 가수 바이브를, ‘페북으로 가서 돈 써야지’, ‘천 개의 핸드폰이 있다면’이라는 가사는 페이스북으로 바이럴마케팅을 한 뒤 새벽에 수백~수천 개의 휴대폰을 이용해 한 노래를 무한반복으로 틀어놓는 방식으로 음원 순위를 높이는 조작 방법을 비꼬았다는 것이다. 다만 ‘바이브’가 언급됐다거나 그들에 대해 부정적으로 표현하고 있긴 하지만 바이브 측은 마미손에게 별도의 소를 제기할 의사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가수 성시경·이승환, 큐브엔터테인먼트의 홍승성 회장 등이 연이어 사재기를 저격하면서 이 문제는 단순히 가수와 가수 간의 ‘진흙탕 싸움’이 아니라 가요계 전체로 비화하고 있는 양상을 보였다. 한 가수가 사재기 의혹이 불거진 가수들의 실명을 언급하며 저격한 사건도 처음이지만, 이처럼 유명 업계 종사자들도 경험담과 사례를 앞다퉈 직접 밝힌 것도 이례적이다. 일부 종사자들은 “사건에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만일 수사가 확대돼 증언이나 진술 같은 게 필요하다면 할 의향이 있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인디밴드 술탄 오브 더 디스코 역시 음원 사재기가 실재한다고 폭로했다. 사진=술탄 오브 더 디스코 인스타스토리 캡처
이 담당자는 “브로커들은 수사 증거 자료로 페이스북이나 유튜브 ‘커버 송(공개된 음원을 유명 유튜버나 인플루언서가 부르는 영상)’ 등 바이럴 마케팅 사례와 이를 통한 음원 순위 변화만 제출하는데 이것만 봤을 때는 조작의 유무를 확인할 수 없다”며 “음원사이트마저 ‘(음원 순위를 조작하는) 유령 계정은 없었다’는 식으로 책임을 면피하려 하는데 검사가 신도 아니고 어떻게 이것만 가지고 혐의를 뽑아내겠느냐”라고 반문했다.
이어 “누군가 총대를 메고 조직적인 음원 사재기와 조작이 존재한다는 걸 증언한다면 결과가 달라질 수 있을 텐데 문제는 그걸 누가 하느냐는 것”이라며 “대형 연예기획사는 국내 음원 순위를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막강한 팬덤 화력과 수입이 있으니 관여하고 싶어 하지 않고, 중소 기획사는 이 같은 브로커들에게 휘둘려 큰 손해를 보는 경우가 잦아 척을 지고 싶지 않은 쪽이 대다수다. 수사기관이라도 기민하게 움직여주길 바랄 뿐”이라고 덧붙였다.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