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군 창설 이래 비순직 처리된 사망군인은 3만 9000여 명에 달한다. ‘개인적 사유’에 의한 자해 사망인 경우가 상당하다. 이들은 국립묘지에 묻힐 수 없었다. 대통령 소속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이인람)는 2018년부터 이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부대 내 구조적 원인을 찾아내 순직 처리로 이끄는 작업을 해오고 있다.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는 2019년 9월 13건의 의문사를 진상규명했다. 매월 진상규명 성과를 내고 있다. 일요신문에서 진상규명된 사연을 연재한다. |
[일요신문] 한 발의 총성이 울렸다. K2 소총에서 발사된 탄환은 안경환 일병의 왼쪽 가슴을 뚫었다. 그의 등 뒤엔 더 큰 탄환 흔적이 남았다. 심장을 저격한 단 한 번의 격발이었다. 민간인이 월북한 적이 있을 만큼 북과 가까운 곳에 위치한 강원도 고성의 철책 부근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이번 휴가 못 가니 다음에 갈 수도 있다.” 사건 발생 17분 전 순찰을 돌던 황 아무개 소대장이 안경환 일병에게 전한 말이었다. 그 한마디에 GOP 초소 경계 근무를 서던 경환 씨의 세상은 무너져 내렸다. 이미 두어 차례 휴가가 미뤄진 뒤였다. 후임이 먼저 휴가를 나가기도 했다. 부대 동료들의 증언에 따르면 경환 씨는 군 생활을 잘했다. 휴가가 미뤄진 이유를 알 수 없으니 경환 씨는 더욱 막막했다.
안경환 일병은 수류탄으로 자해 사망을 시도한 적 있는 고위험 관심병사였다. 당시 대대장은 이 사실을 알고도 안 일병을 GOP 초소 경계 근무에 투입했다. 경계병은 실탄 72발, 수류탄 1발을 지급 받는다. 강원도 한 철책을 점검하는 국군 장병들로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 없음. 사진=고성준 기자
안경환 씨에게 휴가는 쉼의 의미가 아니었다. 두 해 전 우울증으로 술에 빠져 지내던 아버지가 농약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어머니는 돈을 벌기 위해 타 지역으로 가는 일이 잦았다. 남겨진 세 명의 동생은 큰오빠이자 큰형인 경환 씨의 손길이 필요했다. 막냇동생은 당시 초등학생 5학년에 불과했다. 경환 씨는 휴가를 나가서 막일로 돈을 벌 작정이었다. 동생들에게 생활비를 마련해줘야 했다.
휴가가 연기되자 죄책감과 상실감이 밀려왔다. 소대장이 떠난 지 5분 뒤 경환 씨는 함께 근무를 서던 구 아무개 하사와 송 아무개 병장에게 화장실을 다녀오겠다며 자리를 떴다. 경환 씨의 발걸음이 향한 곳은 화장실이 아닌 초소에서 8m 떨어진 전투호였다. 1992년 7월 1일 오후 5시 2분께, 21세의 꽃다운 청년은 그곳에서 눈을 감았다. 입대 7개월 만이었다.
군 헌병대는 경환 씨가 불우한 가정환경을 비관하고 입대 전부터 갖고 있던 지병인 만성 축농증에 시달리다가 자해 사망했다고 판단했다. 경환 씨는 비순직 처리됐다. 개인적 이유로 자해 사망했기 때문에 군은 책임지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경환 씨의 집안은 평범했다. 그의 아버지는 1980년대 가구공장을 다니면서 당시 50만 원의 월급을 꼬박꼬박 가져다줬다. 아버지가 우울증을 앓으면서 가정은 어려워졌다. 아버지가 음독자살한 건 경환 씨가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고향인 충청남도 서천에서 대전으로 유학 갈 정도로 공부를 잘했던 경환 씨의 성적이 곤두박질친 시기도 그때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경환 씨는 동생들을 먹여 살리겠다는 생각으로 막노동을 시작했다. 대학 진학은 꿈도 못 꿨다. 그러던 어느 날 군에서 입대 영장이 날아왔다. 경환 씨는 1991년 12월 20세에 입대했다. 동생들 걱정에 편할 날이 없었다. 경환 씨는 후임 박 아무개 이병에게 “집안 형편이 어려워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 지금 여기 있을 때가 아니다”라는 말을 하곤 했다고 한다.
경환 씨의 가족은 그가 스스로 세상을 등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집안 형편이 어려운 건 사실이었지만 경환 씨는 이에 굴하지 않고 밝게 지냈다. 군 생활도 문제없었다. 후임 김 아무개 이병은 경환 씨를 “군 생활을 매우 잘하는 선임이었다. 고참들도 좋아하고 후임들도 잘 따랐다”고 기억했다. 경환 씨의 고등학교 전체 생활기록부엔 “교우 관계가 원만하다”는 말이 빠짐없이 등장한다.
가족의 기억에 따르면 경환 씨는 군 헌병대가 설명한 축농증을 앓지도 않았다. 적어도 불편한 정도는 아니었다. 경환 씨 옆자리에서 자던 김 아무개 이병 또한 “바로 옆자리에 잠을 잤는데 축농증에 대해 불편함을 전혀 들은 바 없었다”고 증언했다.
경환 씨 가족은 타살을 의심했다. 가족이 현장을 찾았을 당시 피범벅이어야 마땅한 현장은 깨끗했다. 사건 두 달 뒤 누군가로부터 “죄송하다”는 전화 통화가 걸려오기도 했다. 가족들은 2008년 12월 국방부조사본부 전사망민원조사단에 재조사를 요청했다. 하지만 결과는 전과 같았다. 타살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국방부 과학수사연구소 감정 결과 시신의 흉골에서 폭발가스에 의한 피부 파열이 발견됐다. 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탄피와 경환 씨가 쓰던 소총에서 발사한 탄피의 발사흔 특징이 동일했다. 용의자로 지목됐던 구 아무개 하사의 전투복 상의에선 화학 반응이 없었다. 총을 쐈다면 쏜 사람 옷에도 탄약이 묻기 마련이다.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는 안경현 일병 죽음에 안일한 부대를 관리했던 군의 책임이 있다고 결론내렸다. 강원도 최전방 한 절책으로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 없음. 사진=고성준 기자
가족은 마지막 희망의 끈을 붙들고 2018년 11월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위원회)에 진정을 냈다. 사건의 진실을 밝혀달라는 호소였다. 위원회는 올해 1월 28일 조사를 시작했다. 10개월에 걸쳐 조사했지만 위원회도 타살 정황을 찾진 못했다. 자해 사망으로 결론 내렸다. 하지만 위원회는 경환 씨 사망에 부대 책임이 있다고 판단해 경환 씨를 순직 처리해야 한다고 의견을 모았다.
경환 씨는 신병훈련소에서 수류탄으로 자해 사망을 시도한 관심병사였다. 부대로 전입 온 뒤로 중대장 면담을 5회, 소초장 면담 17회를 하는 등 특별관리 대상자였다. 부대 대대장은 이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인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경환 씨를 GOP 전방 초소 경계병으로 차출했다. 경계병은 실탄 75발과 수류탄 1발을 소지하고 근무에 투입된다.
수류탄으로 극단적인 시도를 했던 병사에게 수류탄과 실탄을 쥐여준 셈이다. 경환 씨를 GOP 초소 경계병으로 차출하는 것에 대한 반발도 있었다. 부소대장과 행정보급관 등 일선 부사관은 대대장을 찾아가 재고를 요청했다. 당시 행정보급관 이 아무개 상사는 위원회 조사에서 자신이 대대장에게 강력하게 항의했다고 전했다.
이 상사는 “대대장님께 망인의 GOP 차출은 절대 안 된다는 취지로 강력하게 말했다. 내 군 생활 경험에 비춰봤을 때 사고가 생길 확률이 높다는 것을 알았다. 대대장님께 ‘문제가 생길 경우 나에게는 책임이 없다는 확신을 달라’라고까지 말했다”고 설명했다. 일선 부사관의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경환 씨는 GOP 초소 경계 근무에 투입됐다. 당시 GOP 초소 경계병 선발 기준은 마련돼 있지 않았다. 위원회는 이를 두고 부대의 심각한 관리 소홀로 판단했다. 현재 병 인사관리 규정에 따르면 ‘자살·자해시도가 없는 자’만 GOP 경계병으로 선발할 수 있다. 이 규정은 2017년 1월 1일 개정됐다.
안경환 일병 사건을 담당한 옥윤석 조사관은 “고위험 병사로 분류되는 인원이 얼마든지 군에 들어올 수 있다. 면밀한 부대관리가 필요하다”며 “처음 유가족분들은 불신을 갖고 있었다. 피해자가 가진 국가기관에 대한 불신을 해소할 수 있도록 앞으로도 노력하겠다”고 전했다.
박현광 기자 mua123@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