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진그룹의 남매경영 체제가 가시화하면서 3남매간 역할 분담을 통해 계열사 분리에 나설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사진은 조원태 한진 회장이 6월 3일 국제항공운송협회(IATA) 연차총회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모습. 사진=박정훈 기자
재계에 따르면 ‘땅콩회항’ 사건 등으로 경영일선에서 물러나 있던 한진가 장녀 조현아 전 부사장이 연내 복귀를 추진 중이다. 남동생 조 회장이 단행할 연말인사에서 자신의 지분에 걸맞은 지위와 역할을 확보할 것으로 보인다. 최근 조 회장도 조 전 부사장과 이미 지난 6월 복귀한 막내 조현민 한진칼 전무의 경영 참여를 시사하며 가족 간 불화설을 잠재운 바 있다. 조 회장은 11월 19일 미국 뉴욕 맨해튼에 한국특파원과 간담회를 열고 삼남매 분할 경영과 관련해 “아버님 뜻에 따라 맡은 분야를 충실하기로 셋이 합의했다”며 “때가 되고 준비가 되면 그렇게 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조 전 부사장의 복귀와 남매경영 체제 구축은 경영권 방어를 위한 선택으로 풀이된다. 대한항공과 진에어, 물류기업 (주)한진 등을 거느린 지주사 한진칼에 대한 일가 보유지분은 조원태 회장(6.52%)과 조현아 전 부사장(6.49%), 조현민 전무(6.47%), 고 조양호 전 회장 부인 이명희 정석기업 고문(5.31%) 모두 비슷하다. 한진 일가에 적대적인 KCGI(강성부 펀드)는 지분 15.98%를 보유하고 있다. KCGI 공세에 방어하려면 가족을 우군으로 확보해 우호 지분을 늘려야 하는 만큼, 힘을 합쳐 삼남매 경영승계에 대해 잠정 합의했다는 것이 업계 중론이다.
허희영 한국항공대 경영학과 교수는 “최근 조 회장이 인터뷰에서 수익성 중심으로 사업을 전환하겠다는 등 소통을 늘리며 자신감을 드러내는 모습을 보면 그룹 내 지위가 확고해진 것 같다”며 “그간 내분이 있었을 수 있지만 지금은 해소된 상태로 조원태 체제를 중심으로 대한항공을 이끌면서 삼남매간 역할을 하나씩 떼어가지 않겠느냐”고 예측했다.
조 전 부사장이 복귀하면 삼남매가 맡아온 사업 위주로 역할 분담이 이뤄질 전망이다. △조 회장이 대한항공과 항공제조업 등 주력사업을 맡으며 그룹을 총괄하고 △조 전 부사장이 호텔·레저 △조 전무가 진에어와 마케팅 등으로 나눠 그룹을 이끈다는 관측이다.
조 전 부사장은 칼호텔네트워크와 한진관광 대표이사, 대한항공 기내서비스, 호텔사업부문 총괄부사장 등을 역임하며 호텔·레저 사업을 총괄해왔다. 조 전무도 최고마케팅책임자라는 직함으로 한진칼에서 근무 중이다. 경영에서 물러나기 전까지 대한항공 광고·마케팅을 맡고 진에어 부사장을 역임했다. 이처럼 삼남매간 담당 계열사를 나눈 뒤 한진칼 지분과 계열사 지분을 맞교환하는 방식으로 지배구조를 정리하지 않겠느냐는 것.
다만 조 전무는 미국 국적자로 진에어 등기임원에 이름을 올리기 힘들 수 있다. 기업평가사이트 CEO스코어 박주근 대표는 “삼남매가 맡을 계열사를 나누기 전까진 공동 경영을 지속할 것”이라며 “계열사 분리 과정에서 조현아·조현민은 한진칼이 보유한 자기 계열사 지분을 넘겨받고 그만큼의 한진칼 지분을 조원태 회장에 넘기는 방식 등으로 지분을 교환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이 최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비수익성 사업 정리 의지를 드러내면서, 삼남매 경영 체제를 구축하는 동시에 대규모 구조조정에 나서는 것 아니냐는 전망이 나온다. 사진은 서울 중구 서소문로에 위치한 대한항공 빌딩 전경. 사진=최준필 기자
남매경영 체제가 끝까지 순항하리라 장담하긴 어렵다. KCGI 같은 외부 공격에 방어해야 하기에 어쩔 수 없이 내분을 숨기고 가족 간 잠정 합의를 본 것이니만큼 계열사를 나눠 갖는 과정에서 내분이 발생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한진칼 지배구조는 이명희 고문과 삼남매가 모두 캐스팅보트를 쥐고 있어 한 명이라도 다른 주주들과 붙으면 대주주로 올라설 수 있다. 가족 간 분쟁이 불거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이유다.
박주근 대표는 “고 조 전 회장 지분을 자식들끼리 같은 비율로 나눠 가진 것 자체가 갈등구조를 가지고 있음을 방증하는 것”이라며 “계열사를 나눠 갖는 과정에서 분쟁이 생기면 최악의 경우 KCGI 등 다른 주주와 결합해 대주주로 올라서는 시나리오도 충분히 가능성 있다”고 말했다. 한진 일가는 10월 고 조양호 회장의 한진칼 지분을 법적 상속 비율인 1.5(배우자) 대 1(자녀) 대 1 대 1로 나눠 상속받은 바 있다.
조 전 부사장의 복귀 목적도 단순 경영권 방어뿐 아니라 내부 견제용이라는 해석이다. 그룹 전체를 이끌어가는 역할은 조원태 회장이 맡겠으나 그의 누나와 여동생도 보유 지분만큼의 역할과 지위를 확보하면서 자신이 맡아온 사업에 대한 주도권과 인사권, 영향력을 공고히 하고자 견제하려는 차원이라는 것.
항공업계 관계자는 “조 회장이 모든 경영권을 장악하면 다른 가족들은 관여할 방법이 없어지는 만큼 같은 오너 일가로서 손해 보는 것이 있는지, 새어나가는 돈은 없는지 감시하려는 것”이라며 “지금은 말로만 합의됐다고 하는 것일 뿐 경영권 분담이 완성되기 전까진 견제와 내분이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
한진그룹은 남매경영 체제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사업 재편에도 속도를 낼 전망이다. 조 회장은 맨해튼 기자간담회에서 “대한항공을 주축으로 한 항공 운송업과 항공기 제작, 호텔·여행업, 호텔 등 핵심사업 외에는 관심없다”며 “전체적으로 이익이 남지 않는 분야에 대해선 정리할 생각이 있다”고 구조조정 의사를 내비쳤다.
현재 세계적으로는 중국 에어차이나·동방·남방·하이난항공의 급성장과 에미레이트·카타르·에티아드 등 중동 항공 3사 저가 공세로 치열한 경쟁전이 벌어지고, 국내에서는 내수 침체와 일본 보이콧으로 여행 증가율은 둔화하는데 신규 항공사는 느는 등 대내외 항공업황이 좋지 않다. 이에 대응해 삼남매간 경영권을 분담하는 동시에 대규모 사업 재편으로 내실 경영을 강화하지 않겠느냐는 분석이다.
실제 조 회장은 취임 직후 수요 낮은 중·단거리 노선 일등석을 줄이며 수익성 개선에 힘써왔다. 허희영 교수는 “국내 지방노선은 김해·제주노선을 제외하고 다 적자”라며 “업황이 어려워진 만큼 여수·사천·울산·군산 등 수익성 떨어지는 지방노선을 줄이는 방식으로 재편할 수 있다”고 관측했다. 박주근 대표는 “비주력 계열사들을 정리하고 인력을 감축하는 등 구조조정을 통해 재무구조를 개선한 뒤 남은 자금으로 투자에 나설 것”이라고 내다봤다.
김예린 기자 yeap12@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