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장 8개월 만에 취재진 앞에 선 배우 고준희(34)는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참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마침 이날 오전, 그를 두고 불거졌던 ‘버닝썬 게이트’ 악성 루머의 악플러들에 대한 ‘단죄’ 소식이 전해진 참이었다. 8개월간 묻어뒀던 답답한 심경이 쏟아져 나왔다.
배우 고준희. 사진=마운틴무브먼트 제공
고준희는 지난 11월 중순께 배우 박해진의 소속사인 마운틴무브먼트와 계약을 체결했다. 이 소속사의 대표는 물론, 박해진과도 이미 오래 전에 인연이 있었다고 했다.
“두 분을 처음 뵀던 건 몇 년 전에 제가 박해진 선배님과 일본에서 한 광고를 촬영할 때였어요. 그때 대표님이 해진 선배님을 챙겨주시는 걸 보고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요. 제가 어릴 적부터 여자 매니저에 대한 로망이 있었거든요(웃음). (논란이 있고 난 뒤) 4~5개월 정도 대표님께서 좋은 말씀도 해주시고, 제가 많이 두려워하거나 힘들어 할 때 옆에서 계속 좋은 에너지를 주시고 저를 잡아주셨어요. 그런 걸 기다려 주시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그래서 빨리 같이 일을 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그가 YG엔터테인먼트와 결별한 것은 지난 2월이다. 젊은 여성들의 워너비 가운데 하나로 늘 꼽혀 왔던 고준희가 FA시장에 나왔다는 것만으로 하루에도 수십 건씩 이런저런 소속사들의 이른바 ‘간보기’ 기사가 터져 나왔다. 소속사가 없어 대응할 수 없던 고준희로서는 발만 동동 구를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저는 회사 미팅이 제일 힘들고 어려워요. 소개팅하고 똑같아서(웃음)… 상대는 포털사이트에서 제 이름을 검색해서 어느 정도 히스토리를 알고 저를 만나겠지만 저는 상대에 대한 정보가 없잖아요. 한두 번 정도 만나고 ‘결정하겠습니다!’ 할 수도 없고… 사실 저는 제게 러브콜을 해주신 회사와 미팅을 하는 거지 제가 먼저 ‘어느 회사와 미팅하겠습니다!’ 하면서 막 연락처를 알아보고, 홈페이지를 찾아보고 그러진 않거든요(웃음). 그런데 딱 한 번 뵀던 소속사와 관련해 갑자기 ‘최종 논의 중’, ‘계약 불발’ 하면서 기사가 나 버려서 놀랐어요. 아직 아무 이야기도 진행되지 않았는데 ‘고준희, 소속사와 계약 불발’ 해버리면 제가 마치 소개팅 갔다가 상대한테 차인 느낌이잖아요(웃음). 제가 그런 기사들을 일일이 다 막을 수도 없고… 그래서 한 3개월 정도는 아예 회사 미팅을 안 했어요. 작은 기사도 나는 게 싫어서요.”
고준희는 모든 일에 조심스럽고 긴장된 것처럼 보였다. 8개월간 그는 피해자임에도 가해자 이상으로 숨어 지내야 했다. 당시 그의 곁에 있었거나 적어도 그를 보호해 줘야 할 책임이 있던 사람들이 전부 입을 다물고 있었던 탓이다. 당사자인 고준희에게도 그랬지만 가족에게도 너무나 길고 아팠던 시간이었다고 했다. 이야기를 이어가면서 고준희는 벅차오르는 감정을 누르지 못해 눈물을 글썽이거나 말을 잇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배우 고준희. 사진=마운틴무브먼트 제공
사실 고준희를 가장 아프게 했던 것은 악플이나 루머 그 자체가 아니었다고 했다. 부모님이 딸의 이야기를 찾아보며 속앓이를 하셨고, ‘말 만들기’를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고통을 받는 모습을 보는 것이 가장 큰 아픔이었다.
“10년 넘게 이 일을 하면서 되도록 악플은 보지 않고 응원글만 보려고 노력했는데, 부모님이 그걸 다 찾아보셨더라고요. 힘들어 하시면서도 제게는 모른 척하고 지내려 하시다가 어머니가 스트레스 때문에 이명증에 걸리신 걸 나중에 알게 됐어요. 그런 글들을 보고 나신 후에 길 가다가 사람들을 보면 그 시선이나 말 같은 게 다르게 느껴지셨나 봐요. 그래서 저는 더 끝까지, 이것은 사실이 아니라는 걸 보여 드리려고 했어요. 제 가족이나 사랑하는 분들이 당당하고 떳떳하다는 걸 지켜드리고 싶었어요. 그때 소속사 없이 혼자서라도 대응을 빨리 하겠다고 한 것도 저마저 정신을 똑바로 안 차리면 이게 더 산으로 가겠구나 싶어서였어요. 아무도 저한테 (사실 관계를) 안 물어보는데, 제가 누굴 붙잡고 얘기를 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니고… 말할 기회를 주셔야 말할 수 있고 물어보는 사람이 있어야 답을 하는데 아무도 그런 기회를 주지도 않고, 물어보시지도 않더라고요.”
루머를 유포했거나 악플을 달았던 대다수 사람은 현재 특정돼 법의 심판을 앞두고 있다. 일부 미성년자 등에 한해선 조건부 선처의 기회를 주기도 했지만, 나머지 악플러에게는 어떤 일이 생겨도 물러나지 않고 끝까지 강경 대응하겠다는 입장을 고준희도, 소속사도 강조했다. 이는 고준희의 앞으로 활동을 위해서라도 필요한 일이다.
배우 고준희. 사진=마운틴무브먼트 제공
이처럼 소속사 없이 홀로 모진 칼바람을 맞았던 고준희의 2019년은 저물어가고 이제 새로운 소속사에서의 행보에 주목해야 할 때다. 12월 한 달만 ‘풀 스케줄’이 차 있다는 고준희는 일정을 하나하나 꼽으면서 활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대표님께서 제게 ‘쉰만큼 열심히 일해라’라고 하셨어요. 저도 그 말씀에 동의해요. 작품도 몇 개를 주셔서 계속 읽어보고 있고, 연기 외에 다른 방면으로도 도전해 보라고 북돋워 주고 계세요. 사실 제가 예능 울렁증이 있어서 말도 잘 못 하는데 내년에는 그것도 도전해볼 거고, MC도 해 보려고 해요. 늘 잘하는 것만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제가 연기를 잘 해서 배우를 하는 게 아니라 연기가 좋아서, 일할 때 즐겁고 행복해서 하는 거니까 그런 마음으로 여러 가지를 도전해 보려고 해요. 위장약을 항상 먹으면서 열심히 하고 있으니까 내년에는 고준희의 행보를 많이 지켜봐 주셨으면 좋겠어요(웃음).”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