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지난 9일 오후 11시 50분 숙환으로 별세했다. 김 전 회장의 빈소가 마련된 수원 아주대병원 장례식장에 10일 오전 조문객들이 조문하고 있다. 사진=박정훈 기자
#대우그룹의 설립과 몰락
김우중 전 회장은 1937년 12월 9일 대구에서 태어났다. 경기고등학교와 연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한 후 섬유 수출업체인 한성실업에 취직했다. 회사원 생활을 하던 김 전 회장은 1967년 도재환 대도섬유 사장과 손잡고 대우실업을 창업했다. 대우는 대도실업의 ‘대’와 김우중 전 회장의 ‘우’를 따서 만든 이름이다.
대우실업의 초기 사업은 트리코트 원단과 제품 판매였다. 김 전 회장은 영업 능력을 발휘해 싱가포르에 트리코트 제품을 수출하면서 창업 첫해부터 58만 달러(약 6억 9000만 원)의 수출 실적을 올렸다. 1970년에는 수출 성과를 인정받아 고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철탑훈장을 받았다.
1970년대 들어 대우그룹은 비약적인 성장을 이뤘다. 1971년 내쇼날의류를 설립했고, 1972년 고려피혁을 인수했으며 1973년에는 동양증권(옛 대우증권, 이후 미래에셋대우로 인수·합병), 영진토건 등 각종 인수·합병(M&A)을 통해 사세를 확장했다. 이어 1974년 대우그룹의 대표 계열사가 되는 대우전자(현 위니아대우)를 세웠고, 1976년 한국기계(대우중공업·현 두산인프라코어)를, 1978년 대한조선공사(현 대우조선해양), 새한자동차(대우자동차·현 한국지엠) 등을 인수해 중공업 사업에도 진출했다.
1981년에는 대우개발(옛 영진토건)이 대우실업을 흡수합병해 종합상사 (주)대우(현 포스코인터내셔널)가 탄생했다. 1981년 매출액 기준 대우그룹의 순위는 현대그룹, 럭키그룹(현 LG그룹), 삼성그룹에 이은 4위였다. 대우그룹은 이후에도 한동안 재계 서열 4위 자리를 유지했다.
대우그룹은 1998년 쌍용자동차를 인수하면서 삼성에 이은 재계 2위에 올랐다. 또 1998년 처음으로 현대자동차를 제치고 국내 자동차 판매 1위에 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IMF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대우그룹은 유동성 위기를 맞았다.
1998년 말 대우그룹은 41개 계열사를 10개로 줄이는 등의 구조조정안을 발표했지만 1999년 어음 만기를 막지 못하고 워크아웃을 신청했다. 대우자동차도 2000년 부도처리됐고, 승용차 부문은 미국 GM, 트럭 부문은 인도 타타그룹 등이 인수했다. 다른 대우그룹 계열사들도 공중 분해돼 현재는 대부분 다른 대기업 손에 넘어갔다.
#대우그룹 해체 이후
김우중 전 회장은 IMF 외환위기 당시 20조 원대의 분식회계를 임직원들에게 지시하고, 9조 8000억 원을 사기로 대출받았으며 회사 자금 32억 달러(약 3조 8156억 원)를 해외로 빼돌린 혐의 등으로 2005년 구속기소됐다.
김 전 회장은 1심 재판에서 징역 10년에 추징금 21조 4484억 원을 선고받았고, 이어진 항소심에서는 징역 8년 6월에 추징금 17조 9253억 원으로 감형됐다. 징역형에 대해서는 2007년 특별사면을 받았지만 추징금에 대해서는 그대로다.
김 전 회장이 사망하면서 추징금을 거둘 방법은 사실상 사라졌지만 추징금을 함께 물도록 판결 받은 전 대우그룹 임원들에게 남은 추징금을 집행할 수는 있다. 현재까지 집행된 추징금은 892억 원이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은 2006년 징역 8년 6월에 추징금 17조 9253억 원을 선고받았다. 2005년 재판을 받기 위해 베트남에서 귀국할 당시 모습. 사진=임준선 기자
대우그룹 해체 후 김우중 전 회장은 주로 베트남에 머물렀던 것으로 전해진다. 김 전 회장 사면 직후인 2008년 1월, 이동호 전 대우차판매 사장은 “(김 전 회장이) 어떤 구상을 하는지는 모르지만 미국과 중국, 베트남 등을 돌며 여러 생각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2009년 3월에도 김 전 회장이 베트남에서 신사업을 구상한다는 말이 있었지만 김 전 회장은 “요양 목적이었다”고 해명했다.
김우중 전 회장은 2011년부터 베트남 등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글로벌 청년 사업가 육성(GYBM)’ 사업에 힘써왔다. GYBM은 해외 대학교와 협력해 현지에서 한국 청년들을 교육한 후 해당 국가에 취업시키는 프로그램이다. 대우세계경영연구회에 따르면 김 전 회장은 “청년들의 해외 진출을 돕는 GYBM 교육 사업의 발전적 계승과 함께 연수생들이 현지 취업을 넘어 창업으로 연결될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체계화해줄 것”을 유지로 남겼다.
#그밖의 이야기
1992년 제14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정치권에서는 김우중 전 회장의 대선출마설이 돌았다. 이종찬 전 의원을 중심으로 한 새한국당이 김 전 회장을 영입해 대선 후보로 내세우려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고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이 이끌던 통일국민당은 표 잠식을 적지 않게 우려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고 김영삼 전 대통령의 민주자유당 역시 “나랏돈을 빌려 쓴 입장에서 국가를 위해 경제발전에만 전념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비판했다.
비판 여론이 거세지자 김 전 회장은 결국 불출마를 선언했다. 당시 그는 “정치도 개혁돼야 하지만 일단은 경제인으로 남겠다는 생각”이라며 “불출마 압력은 전혀 없었다”고 전했다. 새한국당에서는 이종찬 전 의원이 후보로 나섰지만 지지율이 오르지 않아 당내 주요 인사들이 통일국민당을 지지했고, 이 전 의원도 대통령 후보직을 사퇴하고 정주영 후보 지지를 선언했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은 한때 대통령 출마설이 돌았지만 실제 출마로는 이어지지 않았다. 1998년 이규성 당시 재경부 장관(왼쪽)과 김우중 전 회장. 사진=임준선 기자
김우중 전 회장은 스포츠계에서도 적지 않은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는 1980~1989년 대한체육회 부회장, 1983~1986년 대한요트연맹 회장, 1988~1992년 대한축구협회 회장 등을 역임했고 서울아시안게임 조직위원회 위원, 서울올림픽 조직위원회 위원, 2002년 월드컵 조직위원회 집행위원 등도 맡았다. 특히 대우그룹의 축구팀 ‘부산 대우 로얄즈’는 1997년 K리그와 리그컵에서 우승하는 등 당시 K리그 최고 인기팀 중 하나로 군림했다.
1989년 출판한 김우중 전 회장의 저서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출판 6개월 만에 100만 부를 돌파하면서 최단기 밀리언셀러 기네스 기록을 달성했다.
#가족관계
김우중 전 회장은 김용하 전 제주도지사와 전인항 씨의 5남 1녀 중 4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친구의 소개로 정희자 씨를 만나 1964년 결혼했다. 정희자 씨는 1984년 힐튼호텔 운영사인 동우개발(현 우양산업개발) 회장에 취임했다. 대우그룹 계열사였던 동우개발은 1999년 외국계 회사 퍼시픽인터내셔널로 넘어갔지만 정 씨는 2003년 8월까지 대표이사직을 유지했다.
김우중 전 회장은 슬하에 3남 1녀를 뒀다. 장녀인 김선정 씨는 김상범 이수그룹 회장과 결혼했으며 이수화학 지분 3.81%를 갖고 있다. 다만 이수그룹 경영에는 참여하지 않고 현재 광주비엔날레 대표로 활동 중이다. 장남 김선재 씨는 1990년 미국에서 불의의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김 씨는 배우 이병헌 씨와 닮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정희자 씨가 이병헌 씨에게 양자로 들어올 것을 제안, 이 씨가 흔쾌히 수락했다는 일화도 전한다. 이 씨는 대우자동차 티코의 광고 모델을 맡기도 했다.
차남 김선협 씨는 아도니스 부회장을 맡고 있다. 1989년 설립된 대우레저가 1999년 아도니스로 사명을 변경했다. 아도니스는 현재 드비치골프클럽, 에이원컨트리클럽 등을 운영하고 있으며 정희자 씨 외 특수관계자가 지분 82.4%를 갖고 있다. 삼남 김선용 씨는 영화업체 벤티지홀딩스 대표로 근무 중이다. 벤티지홀딩스는 2008년 영화 ‘추격자’에 투자하면서 이름이 알려졌다.
박형민 기자 gody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