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서울관 완공 모습을 재현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홍보관. 미술관은 법인화를 염두에 두고 37명의 학예 연구원을 임기제로 채용했다. 사진=연합뉴스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직 정규직화 문제가 연말 안으로 처리될 것으로 보인다. 최근 행정안전부는 국립현대미술관 학예 인력을 전원 정규직으로 전환하되 학예실장만 제외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행안부 관계자는 12월 9일 일요신문에 “업무량이 중복되는 보직을 1개 통합하고 학예실장직은 외부 인력을 활용하기 쉽도록 전문임기제로 유지한다”고 밝혔다. 학예실장은 전시기획 및 연구 총괄을 담당하는 학예실의 우두머리다. 회사로 치면 한 부서의 팀장만 홀로 임기제인 셈이다.
학예 인력의 정규직 전환 논의가 나온 배경에는 국립현대미술관의 법인화 무산이 있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2009년 이명박 정부 시절 ‘조직 전문성과 효율성 제고’를 이유로 법인화를 추진한 바 있다. 문제는 주도권이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법인화를 추진하는 동시에 ‘법인 미술관 이사회를 구성하는 이사 임면권은 문체부에 있다’는 규정을 만들었고 미술계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렇게 국립현대미술관 법인화 법률안은 10년 동안 국회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결국 2018년 문체부가 국립현대미술관의 법인화 철회를 공식 발표함으로써 10년 넘게 끌어온 논란도 마침표를 찍게 됐다.
문제는 남은 학예 인력의 고용 안정이었다. 국립현대미술관이 2013년 서울관 개관 당시 법인화를 염두에 두고 학예연구 분야 공무원 37명 정원을 전문임기제로 채용했는데 법인화가 최종 무산됐다. 이후 늘어난 인원은 40명. 이들의 임기는 올해로 만료된다.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 역시 올해 4월 국민일보 인터뷰에서 “(고용 문제에 대해) 큰 결단을 해야 할 때가 왔다”고 밝히는 등 정규직 전환에 대한 의지를 나타내 온 바 있다.
그러나 정규직 전환의 결정권을 가진 행안부의 입장은 다르다. 학예실장만은 전문 임기제로 남겨둔다는 것이다. 학예실장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면 국장(3급) 이상의 고위공무원단(고공단)으로 소속시켜야 하는데 이것이 불가하다는 것이다. 행안부 관계자는 “고공단이 되면 관료들이 가고 싶어하는 자리가 되고 학예전문가가 아닌 문체부 공무원이 임명될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유사한 직무를 수행하는 국립중앙박물관의 학예연구실장과 역사부장 등은 현재 고공단에 소속돼 있다. 미술계에서 ‘행안부가 직제개편을 통해 개선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냐’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행안부의 결정에 대한 미술계의 반응은 대체로 부정적이다. 가장 먼저 나온 우려는 이른바 ‘코드 인사’다. 임기제인 국립현대미술관장의 입맛에 맞는 임기제 학예실장이 임명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황정수 미술평론가는 “결국 관장과 뜻이 같은 인물을 지명하여 앉히겠다는 뜻이다. 정권에 따라 미술관장이 임명되는 상황인데 학예실장까지 그에 따른다면 미술관의 정치적 색채가 강해질 것이다. 이러한 논공행상이 미술관의 체계적인 시스템 구축에 많은 방해가 된다”고 말했다.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이 미술관의 발전방향을 발표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정준모 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은 “지금까지는 다같이 임기제였으나, 이제부터는 학예실장 혼자 계약직 신분이다. 3년짜리 실장이 제대로 무리를 이끌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정 전 학예실장은 “전시 하나를 위해서는 보통 2~3년의 시간이 소요된다. 전시뿐만 아니라 미술관 업무 전반이 중장기적인 계획을 가지고 진행된다. ‘왔다 가는 나그네’에 가까운 임기제 학예실장에게 지속성 있는 업무를 기대하긴 힘들다”고 말했다.
결국 정부가 사태의 원인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문제를 막기에만 급급해 일방적인 결정을 내렸다는 것이 미술계 인사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법인화가 지지부진했던 지난 10년 동안 손 놓고 있다 막상 문제가 터지자 실장 제외 정규직 전환이라는 반쪽짜리 해결책을 제시했다는 것이다. 학예실장 출신 큐레이터 A 씨는 “애당초 문제의 본질은 정규직 전환이 아니다. 법인화의 목적은 미술관 전문성 확립이었는데 갑자기 고용 문제로 논의가 옮겨갔다. 문체부는 지금이라도 세계 흐름에 맞춰 외부기획 전시를 늘리는 등 국립현대미술관이 전시 자체의 질을 올릴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비판했다.
문제의 당사자인 국립현대미술관은 정규직 전환 문제에 대해 들은 바 없다는 입장이다. 국립현대미술관 관계자는 “관련 부처에서 논의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아직까지 어떠한 사실도 통보 받은 바 없다”고 답했다. 한편 강승완 현 학예실장은 12월 말 퇴직을 앞둔 것으로 알려졌다. 곧 후임 학예실장 채용을 위한 공모가 시작될 예정이다.
최희주 기자 hjo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