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수원시 아주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빈소. 사진=박정훈 기자
#매각 작업 순탄치 않아
그룹 해체 이후 남은 계열사는 험난한 길을 걸었다. 어중간한 기술력과 회계부정의 여파로 매각작업이 순탄치 않았다. 아직도 제 주인을 찾지 못한 곳도 있다. 뿐만 아니라 대우 계열사를 품었다가 어려움을 겪은 기업의 사례도 많았다.
가장 덩치가 컸던 대우자동차는 결국 미국 자동차 제조사인 GM에 팔렸지만, 이후 존재감은 크게 줄어들었다. 최근에는 한국 철수 논란에 휩싸여 있다. 분위기 반전을 노리며 야심차게 출시한 신차의 성적도 신통치 못하다. KDB산업은행은 여전히 GM대우차 2대주주다.
대우건설은 주인을 찾지 못하고 있다. 금호그룹이 글로벌 금융위기 직전 인수했지만, 대한통운까지 삼키는 공격적 인수합병 행보를 보이다 워크아웃을 겪으며 다시 산업은행에 넘겼다. 금호그룹은 그 여파로 올해 본래 주력이던 아시아나항공까지 내놓았다. 대우건설은 이후 호반건설에 팔릴 뻔했지만 최종계약이 이뤄지지 않았다. 직후 우발채무 문제가 불거지면서 호반건설은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대우조선해양도 한때 한화그룹에 팔릴 뻔했지만 중도에 계약이 깨졌다. 한화가 당시 대우조선을 인수했다면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조선업 불황의 직격탄을 맞았을 수도 있다. 대우조선해양은 올해 현대중공업의 품에 안겼지만, 성공 여부는 아직 미지수다.
사업적으로는 연관이 없지만 공교롭게 어려움에 직면한 곳들도 있다. 대우인터내셔널을 인수한 포스코는 이후 해외 계열사 부실 문제로 곤욕을 치렀고, 대우일렉트로닉스를 인수했던 동부그룹(현 DB그룹)은 주력인 동부제철이 부실화되면서 비금융 부문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나마 대우증권은 미래에셋에 안기며 독보적인 1위 증권사가 됐지만, 최근 박현주 회장의 공정거래법 위반 혐의가 불거지면서 논란의 중심에 섰다.
#무차별 차입과 회계부정
‘대우 사태’가 발생한지 5년 8개월 만인 2005년 6월, 해외 도피생활 끝에 한국에 돌아와 대검찰청에 압송되고 있는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사진=임준선 기자
단군 이래 최대 규모의 분식회계와 천문학적 차입금은 협력업체와 금융권에 직격탄을 날렸다. 대우가 발행한 회사채, 이른바 대우채는 부도수표가 되면서 금융권에 부실 도미노를 낳았다. 보증기관인 한국보증과 대한보증에 11조 원의 공적자금이 투입됐지만 피해를 다 막지 못했다. 발행주체의 신용도에 따라 채권가치가 시장에서 매겨지는 채권시가평가제가 도입된 것도 대우채 사태가 결정적 계기였다.
1998년과 1999년 대우그룹의 분식회계 규모는 금감원 추산 23조 원, 검찰추산 49조 원이다. 단일기업 기준 세계 최대다. 온갖 기상천외한 수법들이 모두 동원된 것으로 알려졌다.
어째든 대우 사태 이후 국내 기업들에 만연했던 회계부정은 크게 줄어든다. 공교롭게도 최근 적발된 가장 큰 규모의 회계부정도 ‘대우’다. 대우조선해양이 5조 원 규모의 분식회계를 한 사건이다. 대우건설 역시 5년 전 2조 원에 가까운 규모의 부실을 감춘 사실이 적발됐다.
#PEF의 원조 김우중
1967년 대우실업으로 출발해 1976년 대우그룹이 되기까지 채 10년이 걸리지 않았다. 고속성장 시대에 초고속 성장이었다. 과감한 차입과 공격적인 인수·합병(M&A) 덕이다.
김우중 전 회장은 빌린 돈으로 투자하고, 돈을 번 후 갚는 차입 투자의 고수였다. 초기 자본 부담을 줄이며 빠른 사업 확장이 가능했고, 성공 시 높은 수익률을 거둘 수 있었다. 자산이 불어날수록 차입 규모도 커졌다. 대우의 M&A가 시간이 갈수록 대형화된 이유다.
차입과 M&A에는 권력 핵심과의 관계도 중요하다. 사모펀드(PEF)에 명문가 자제들이 많은 이유이기도 하다. 김우중 전 회장 역시 그랬다. 김 전 회장의 부친 김용하 씨는 대구사범 교장과 제주도지사를 지낸 명사였다. 대구사범 재직시 박정희 전 대통령이 교사로 있었다.
김우중 전 회장은 경기고, 연세대를 졸업해 학맥이 탄탄했다. 특히 경기고 동문을 통해 하나회와 인연이 닿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오래된 대기업들이 미군정청과 자유당 정권에서 적산기업을 불하받으며 기반을 마련했다면, 대우는 군사정권 아래에서 주요 기업들을 인수·합병하며 덩치를 키운 셈이다.
#경영인? 투자가?
김우중 전 회장은 인수한 기업의 가치를 높이는 데에 열중했다. 빌린 돈도 갚을 수 있고, 기업공개(IPO)를 통해 많은 돈을 끌어 모을 수 있어서다. 우회상장도 주저하지 않았다. (주)대우를 당시 보기 드물게 그룹 지주사격으로 만들어 투자에 유리한 구조를 만들었다.
대우그룹의 마지막을 장식했던 승부수도 M&A였다. 대우자동차 경영이 어려워지자 돌파구로 택한 것이 1998년 쌍용차 인수, 이듬해 대우전자와 삼성자동차 빅딜 시도였다. 자동차 사업에 끝까지 애착을 갖고 규모의 경제, 선택과 집중으로 위기를 타개하려던 노림수였다.
돈을 굴리는 기법도 남달랐다. 1990년대 공산권 붕괴로 동구권과 인도차이나 반도 국가들이 경제개방에 나서자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한국의 경제발전 모델을 내세우고 특유의 로비력을 바탕으로 이들 국가 최고 핵심에 접근, 사업 기회를 얻었다.
대우그룹은 국외 금융을 관리하기 위해 영국 런던에 두었던 비밀 금융조직 BFC를 정점으로 수백억 달러의 외화를 해외 현지에서 차입했다. 아무리 대기업이지만 해외에서 정상적으로 그 같은 거액을 차입하는 것은 대단한 능력이라는 해석도 적지 않다.
최열희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