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빈소가 마련된 경기도 수원시 아주대병원 장례식장에 10일 오전 조문객들이 조문하고 있다. 사진=박정훈 기자
1999년 그룹 해체 후 두문불출하던 김우중 전 회장이 공식석상에 모습을 처음 드러낸 것은 이명박 정부 첫해인 2008년 3월 열린 대우 창립 42주년 기념식에서였다. 이를 두고 당시 재계와 정치권에선 대우 출신 박영준 전 차관에 주목했다. 정권 초반 최고 실세로 꼽히며 ‘왕차관’으로 통했던 박 전 차관이 김 전 회장 재기에 어떤 식으로든 도움을 줄 것이란 관측이었다.
대우 임직원들 모임인 세계경영연구회 관계자는 “김대중(DJ) 정부와 노무현 정부 땐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기업인 출신이자 자신과도 친분이 있던 이명박 전 대통령이 당선된 후 김 전 회장도 기대를 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실제 박영준 전 차관 등 정권 인사들은 정부 역점 과제였던 자원외교 추진을 위해 김 전 회장의 세계 인맥을 활용할 필요성이 있다는 논리를 펴며 직·간접적으로 지원사격을 했다.
하지만 김 전 회장 앞엔 17조 원에 달하는 추징금이 놓여 있었다. 이를 해결하지 않고선 싸늘한 여론을 돌리기는 힘들었다. 이와 관련해 앞서의 전직 대우 임원은 “김 전 회장은 거액의 추징금에 대해 법적으로 한 번 다퉈보고 싶어 했다. 하지만 주변에서 만류했던 것으로 안다”면서 “정권 차원에서 풀어주거나 현실적으로 금액을 조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명박 정부 때도 김 전 회장과 측근들이 노력을 기울였지만 실패했다”고 귀띔했다.
박근혜 정부 들어 김 전 회장 측 움직임은 더욱 빨라졌다. 2014년 8월 ‘김우중과의 대화-아직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를 펴낸 김 전 회장은 대우 몰락은 김대중 정부 기획에 의한 것이며 자신은 희생양이라며 주장했다. 세계대우경영연구회 특별 포럼에선 “시간이 충분히 지났으니 잘못된 사실을 바로잡아야 한다”며 눈물을 쏟기도 했다. 김 전 회장은 박근혜 정부 때가 명예회복을 위한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다는 후문이다.
김우중 전 회장은 박근혜 전 대통령과 인연이 깊다. 김 전 회장 부친 김용하 씨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졸업한 대구사범학교 윤리 교사였다. 김 전 회장 친형 김덕중 전 교육부 장관은 박 대통령의 서강대 은사다. 부녀가 김 전 회장 일가로부터 교육을 받은 셈이다. 박 전 대통령 동생 박지만 EG그룹 회장의 사업 자금 중 일부를 마련해준 것도 김 전 회장이다. 김 전 회장은 박 회장이 EG그룹 전신 삼양산업에 투자할 당시 8억 원을 빌려줬다.
‘김우중 키즈’들의 약진도 김 전 회장 행보에 힘을 실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 브레인으로 꼽혔던 이한구 전 의원, 강석훈 전 의원, 안종범 전 경제수석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김우중 세계경영의 싱크탱크 역할을 했던 대우경제연구소 출신이다. 대우 재직 시 최연소 임원에 오르며 김우중 전 회장의 각별한 신뢰를 받았던 백기승 전 청와대 국정홍보비서관 역시 친박 실세로 꼽혔던 인물이다. 친박 좌장 최경환 전 의원 역시 김 전 회장 인맥의 한축인 연세대 라인이기도 하다.
박근혜 정부 초반 김 전 회장 측과 친박 실세들 간엔 김 전 회장의 추징금과 관련된 물밑 공감대가 형성됐던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이들은 권력형 비리도 아닌 경영상 책임 때문에 17조 원이라는 천문학적 추징금을 부과한 법적 판단에 대해 재검토를 할 필요가 있다는 논리를 폈다. 당시 김 전 회장 측 한 인사는 “안 내겠다는 것은 아니다. 납부할 수도 없는 상징적인 돈을 부과해놓고 왜 안 내느냐며 비난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면서 “청와대에서도 이런 부분을 감안해 현실적인 조치를 취하자는 견해들이 있었다”라고 귀띔한 바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 역시 김 전 회장이 처해있는 상황에 대해 주변 참모들에게 안타까움을 토로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김 전 회장 측 대리인으로 알려진 한 인사는 2014년 5월경 청와대를 직접 방문해 박 전 대통령과 이 문제를 논의했다고 한다. 이 과정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는 한 친박계 의원은 “박 전 대통령이 김 전 회장을 직접 보고 싶어 했다. 하지만 여러 조건상 이뤄지진 않았고, 대리인이 청와대를 방문한 것”이라면서 “박 전 대통령은 추징금 문제 등과 관련해 김 전 회장 쪽 입장을 최대한 들어주려 했고, 이를 참모들에게 검토해보라고 지시했다”고 말했다.
김우중 전 회장 측은 한껏 기대감에 부풀었다. 2014년 8월 김 전 회장이 책을 펴내고 포럼에 참가하는 등 활동 반경을 넓혔던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았다. 하지만 박 전 대통령 의지에도 불구하고 김 전 회장 꿈은 수포로 돌아갔다. 당시 청와대에서 김기춘 비서실장을 비롯한 참모들이 세간의 여론 등을 보고하며 강하게 반대했기 때문으로 알려졌다. 또한 당에서도 비슷한 취지의 주문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박 전 대통령 역시 한 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앞서의 친박 의원은 “김우중 문제로 인해 청와대가 뒤숭숭했었다. 대통령 지시사항인데 누가 토를 달겠느냐. 그런데 후폭풍이 너무 우려스러웠다. 그래서 아마 비서실장 포함 참모들이 단체로 건의했던 것으로 안다. 2013년 전두환 추징금을 끝까지 받아내겠다고 했을 때를 예로 들면서 추징금 문제는 법적 문제가 아닌 국민정서법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간곡히 말했다고 한다”고 털어놨다. 박근혜 정부 한 전직 청와대 비서관도 “박 전 대통령이 김 전 회장 측에 미안함을 전달한 것으로 들었다”고 말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