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 국정원에서 청와대로 지원했던 자금 있지 않습니까. 그거 계속 지원하세요.”
국정원은 비서실과 마찬가지로 대통령 직속 기구였다. 국정원장은 대통령의 지휘권에는 예산에 대한 지시도 포함돼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떤 국정원장은 청와대의 예산을 국정원에서 보관한다고 인식하기도 했다. 그 며칠 후 박근혜 대통령은 독대를 하는 자리에서 국정원장에게 이렇게 명령했다.
“앞으로 매달 5000만 원은 비서실장에게 지원하세요.”
엄상익 변호사
박근혜 전 대통령의 이런 행위가 문재인 정권 적폐청산 대상이 됐다. 검찰은 박근혜 전 대통령이 지원받은 돈을 뇌물로 보고 기소했다. 동시에 국정원장을 회계직원으로 간주해서 횡령으로 인한 국고손실죄로 기소했다. 국정원장을 굳이 회계직원으로 얽어버린 이유가 있었다. 국정원장을 회계직원으로 만들지 않으면 돈을 보관하는 횡령죄의 주체가 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과연 그 돈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까. 범죄의 고의가 있어야 뇌물죄는 성립하기 때문이었다. 감옥에 있던 박근혜 전 대통령이 이런 진술서를 재판부에 보냈다.
‘저는 대통령으로 취임한 후 국정원에서 청와대에 지원하는 예산이 있어 전임 정부에서도 이를 지원받아 업무에 사용했다는 보고를 받고 그러면 이를 지원받아 업무에 활용하라는 지시를 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 구체적인 사용 내역에 대해서는 알지 못합니다. 다만 위 예산들이 공적인 업무수행에 필요한 내용으로 집행됐다고 믿고 있습니다. 여러 국정원장 중 이병호 국정원장은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직책을 훌륭하게 임무를 수행해 낸 분입니다. 평생 군인으로 또 국정원장으로 근무하면서 비난받을 만한 개인적인 비리를 저지른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청렴결백한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책임을 묻는다면 저에게 모든 책임이 있습니다. 이런 사정들을 혜량하시어 억울함이 없도록 살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진정성이 느껴지는 진술이었다. 1·2심법원은 박근혜 대통령이 받은 그 돈은 뇌물이 아니라고 판결했다. 국정원장을 회계직원으로 본 검찰의 무리한 법 적용에 대해서도 고등법원은 이렇게 분명히 했다.
‘회계직원은 재무관, 지출관, 물품출납관 등 현금이나 물품출납에 관계된 직원을 말하는 것이다. 국정원장은 그런 회계직원이 아니다.’
그건 너무 당연한 상식에 속하는 것이었다. 2019년 11월 28일 찬바람이 부는 목요일 오전이었다. 서초동의 대법원 2호 법정에서 최종적인 대법원의 판결 선고가 있었다. 대법원은 1·2심의 판결이 모두 틀렸다면서 다시 재판하라고 했다. 대법원 판결문은 이렇게 지적하고 있었다.
‘국정원장을 회계관계 직원으로 보아야 한다. 또 국정원장 이병호는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대통령에게 뇌물을 공여했다고 보아야 한다. 그걸 무죄로 한 고등법원의 판결은 법리를 오해하고 논리와 경험의 법칙을 위반한 것이다.’
대법원의 법과 논리와 경험은 세상과는 동떨어져 있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뇌물범이 되어야 하는 운명일까. 법은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국정원장을 회계직원으로 보는 대법원의 논리는 앞으로 그 어떤 장관들도 마음먹으면 모두 회계직원으로 볼 수 있었다. 1·2심의 법관들은 오랜 시간 직접 사건 관계자들과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며 진실을 들었다. 대법관들은 직접 보지도 듣지도 않았다. 법리만 판단하는 미명하에 그들은 결론부터 내려놓은 것 같았다. 시대정신이 흔들리고 격랑이 몰아치는 사회다. 법치주의를 위해 세상의 닻이 되어야 할 대법원이 광풍을 일으키는 돛으로 변해 있는 것 같았다.
엄상익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