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낙연 국무총리. 사진=박은숙 기자
지난 10월 28일 이낙연 총리는 881일째 임기를 맞았다. 이명박 정부 시절 김황식 전 총리의 880일을 깨고 1987년 대통령 직선제 도입 이후 ‘최장수 총리’ 기록을 세웠다. 소감을 묻는 질문에 이 총리는 “어제와 다르지 않은 오늘인데, 특별히 소감이라고 할 건 없다”면서 “그런 기록이 붙었다는 것은 저에게 분에 넘치는 영광”이라고 몸을 낮췄다. 기록은 지금도 매일 경신되고 있다.
여기엔 말 못할 여권의 고민이 숨겨져 있다. 이낙연 총리는 그동안 여러 번 교체될 뻔했다. 본인도 사의를 표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줄곧 차기 지지율 1위를 달리고 있는 이 총리로선 적절한 시기에 정치권으로 ‘컴백’하는 게 향후 대권 행보에 도움이 된다. 특히 ‘이낙연 총선 역할론’과 맞물리면서 이 총리 교체는 정가의 화두 중 하나였다. 하지만 이 총리는 바뀌지 않았다. 아니 바꿀 수 없었다. 친문계로 분류되는 한 초선 의원은 이렇게 설명했다.
“대안이 없었다. 정부 출범 후 계속 위기가 있었는데 이 총리처럼 조직을 장악할 후임이 마땅히 없었다. 이 총리가 물러날 뜻을 두세 차례 문 대통령에게 전한 것은 맞다. 그때마다 문 대통령이 고사했다. 이 총리 개인 입장이나 당을 생각하면 보내주는 게 맞지만 문 대통령도 어쩔 수가 없었다. 이 총리도 이러한 대통령 판단을 이해해줬다. 문 대통령이 이 총리에게 빚을 진 셈이다.”
공직자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선 총선 90일 전에 출마해야 한다. 내년 1월 16일 이전엔 그만둬야 이 총리의 총선 출마가 가능하다는 얘기다. 일각에선 ‘전국구 인지도’를 가진 이 총리가 지역구 출마가 아닌 비례대표 순번을 받아 유세를 다녀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이 경우 이 총리 교체는 늦춰질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문 대통령은 조국 전 장관 사퇴(10월 14일) 직후 이 총리 교체 방침을 정하고 후임을 물색한 것으로 전해졌다.
청와대와 여권 복수 관계자들에 따르면 처음엔 여성을 최우선 후임으로 올려두고 인사 검증을 시작했다고 한다. 노무현 정부 시절 한명숙 전 총리 사례를 벤치마킹할 것이란 관측이 돌았다. 유은혜 교육부총리,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 추미애 의원(법무부 장관 후보자)을 포함한 여성 정치인, 그리고 학계와 시민단체 소속 인사들이 거론됐다. 이들 중 몇몇에 대해선 실제로 세평을 듣는 등 검증 작업이 이뤄졌다.
그런데 민주당을 비롯한 여권 내에서 비토 기류가 빠르게 퍼졌다. 검찰이 청와대를 정조준하고 있는 상황에서 하마평에 오른 인사들이 이 총리를 대신하기엔 ‘체급’이 약하다는 이유에서였다. 또 다른 친문 의원은 “여성이라서가 아니었다. 집권 후반기 총리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조직 장악력이다. 그러지 못하면 공직사회 권력 누수를 막을 수 없다”면서 “무게감 있는 정치인의 발탁이 필요하다는 게 당의 판단”이라고 귀띔했다.
김진표 의원이 급부상한 것도 이 무렵이다. 4선 중진에 ‘경제통’이라는 점까지 더해지면서 사실상 단독 후보로 추려졌다. 그런데 의외의 암초가 떠올랐다. 문 대통령 핵심 지지층에서 김 의원 반대 여론이 빠르게 퍼졌다. 친여 성향으로 분류됐던 민주노총과 참여연대도 김 의원 반대 목소리를 냈다. 김 의원의 과거 경력과 행적들이 발목을 잡았다. 민주당 친문 의원들도 김 의원 임명 가능성에 우려를 나타냈다.
김진표 의원. 사진=이종현 기자
이를 두고 청와대 관계자들은 당혹해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한 정무라인 관계자는 “문 대통령과 참모들은 김 의원을 적임자라고 판단했다. 그런데 보수 진영은 물론 지지자들까지 반대하고 나서니 버틸 수가 없었다”면서 “대통령 인사에서 지지자들이 이렇게까지 반발하는 경우는 처음이었다”고 털어놨다. 앞서의 친문 초선 의원도 “지난해 민주당 전당대회 때 친문에선 이해찬 대표가 아닌 김 의원을 밀었다. 하지만 총리는 다르다. 대통령 국정 운영에 부담만 되는 인사라는 게 친문 진영 대부분 생각”이라고 전했다.
청와대는 김 의원 지명을 앞두고 여러 라인을 통해 여론과 세평을 모았다. 대부분 부정적인 내용 일색이었다고 한다. 이 중엔 김 의원이 지명될 경우 인사청문회 통과를 장담하기 어려울 정도의 소문들도 포함돼 있었는데, 그 출처가 친문 의원이라는 점에서 흥미로운 대목이다. 김 의원 임명을 막으려는 내부 암투가 벌어졌던 셈이다. 결국 청와대는 ‘김진표 카드’를 접었고, 총리 인선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그 직후 재계와 학계 등에서 일부 인사들이 추천됐지만 검증 초반 탈락했다는 후문이다.
장고를 거듭하던 청와대의 선택은 국회의장 출신 6선 정세균 의원이었다. 이와 관련해 친문계 한 전략통 인사는 사석에서 “정 의원은 오래 전부터 총리 후보감이었다. 다만, 의전서열 2위인 입법수장(국회의장) 출신이 서열 5위인 총리를 맡는 게 적절한지에 대한 의문이 꼬리표처럼 붙었다”면서 “지금 시점에서 정 의원 말고는 다른 카드는 없다고 보면 된다. 정 의원마저 무산되면 이낙연으로 더 갈수도 있다”고 말했다.
여권에선 정 의원 지명 시 이낙연 총리의 종로 출마 여부에 관심이 높다. ‘정치 일번지’ 종로에 이 총리를 출격시켜 수도권 공략 선봉장으로 세우겠다는 전략이다. 하지만 이 역시 당 내부에선 부정적 인식이 강하다. 이 총리 정도의 거물급을 여당 우세 지역으로 분류되는 종로에 출마시킬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다. 그동안 종로 표밭을 일구는 데 매진했던 정 의원이 총리직을 수락할지도 변수다. 정 의원이 고사할 경우 이 총리 유임 가능성에 무게가 실린다.
정세균 전 국회의장이 10월 10일 오후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아주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빈소에 조문을 마친뒤 취재지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사진=박정훈 기자
이를 두고 정치권 일각에선 이 총리의 당 복귀를 막으려는 세력이 총리 인선에 번번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 아니냐는 ‘음모론’까지 돈다. 유력 차기 주자인 이 총리로의 쏠림 현상을 우려하는 쪽에서 제동을 걸고 있다는 게 골자다. 이 총리와 가까운 한 현역 의원도 “이 총리도 답답해하고 있다. 본인이 거취를 정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니냐”면서 “벌써부터 이런데 당으로 돌아가면 얼마나 많은 견제가 이뤄질지 걱정된다”고 말했다.
청와대는 답답함을 넘어 불쾌해하는 분위기가 감지된다. 정치 논리에 밀려 대통령 인사권이 훼손됐다는 이유에서다. 앞서의 정무라인 관계자는 “(김진표 총리 지명에 대해) 지지층 여론이 나빴다고 치자. 그럼 당에서 먼저 그들을 설득하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 누구도 문 대통령을 지원사격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한 핵심 친문 의원도 “김진표뿐 아니라 다른 후보들도 당 내부 반발이 거셌다고 들었다. 후보의 적격성이 아닌 계파 간 이해득실 때문이었다”면서 “문 대통령 지지율이 예전처럼 높았을 때완 당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총선을 앞두고 각자도생으로 접어들었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상황은 문 대통령 국정 운영에 부담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인사권 행사가 흔들리는 것은 통상 레임덕의 신호탄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역대 대통령들 대부분 집권 4년 차로 접어들면서 인사를 둘러싼 내부 헤게모니 싸움으로 골머리를 앓았고, 이는 결국 통치 기반 약화로 이어졌다. 앞서의 핵심 친문 의원은 “차라리 좋은 후보를 추천해주든가. 그러지도 않으면서 어깃장만 놓고 있다”면서 “총리뿐 아니라 다른 장관 자리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어 개각 때마다 대통령 고민은 깊어질 것 같다”고 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