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2일 오전 경기도 수원시 아주대병원 별관에서 엄수된 고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영결식에서 추모객이 헌화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12월 9일 오후 11시 50분 김우중 전 회장 사망 소식이 세상에 알려졌다.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원천동에 있는 아주대병원 장례식장은 3일 내내 추도객이 몰렸다. 1만 명에 가까운 인파가 김 전 회장과 마지막을 함께했다. 김우중 전 회장의 생전 뜻에 따라 장례는 가족장으로 치러졌다.
전직 대우 임원 등에 따르면 김우중 전 회장은 2018년 말쯤 몸이 안 좋아져 귀국했다. 그 뒤 줄곧 아주대병원에서 생활했다. 알츠하이머로 알려졌지만 그 정도까진 아니었다. 나이가 들어 오후쯤 되면 인지능력이 떨어지는 수준이었다. 다만 오전에는 늘 또렷했다고 한다.
한 전직 대우 임원은 “2018년 한 번 고비를 넘긴 적 있었다. 위독했는데 잘 이겨내서 올해 초에는 산책도 좀 하시고 가끔 앉아서 TV도 보셨다. 하지만 올해 하반기부터는 아예 그것도 못하시고 앓아 누우셨다. 산책도 제대로 못 다니셨다. 중환자가 밖으로 돌아 다니면 남에게 감염될 수 있기에 대부분 병실에 계셨다”며 “2018년 고비를 넘긴 것처럼 올해도 잘 넘길 거라 생각했다. 이틀 정도 비상 대기했는데 갑자기 돌아가셨다. 심장이 안 좋으시다가 폐렴으로 이어져 끝내 눈을 감으셨다”고 고인의 마지막을 전했다.
김우중 전 회장은 음식을 가리지 않았다. 병상에서도 병원 밥만 먹었다고 한다. 장남 선협 씨는 “음식을 하나도 안 가리셨다. 옛날부터 음식에 대해서는 중요하게 생각 안 하셨다. 평소에 곰탕, 설렁탕 같이 빨리 먹을 수 있는 것 좋아하셨다. 병상에서도 뭐 먹고 싶다는 게 하나도 없었다. 병원에서 나오는 밥만 드셨다”고 말했다.
따로 유언은 없었다. 선협 씨는 “유언은 따로 없었다. 다만 청년 이야기를 평소에 많이 하셨다. ‘청년이 세계로 나가야 한다. 청년이 많이 나가서 더 넓은 세상을 봐야 한다. 지금 청년은 국내에서만 있는데 외국으로 진출해서 거기서 자리잡고 거기에 큰 사람이 될수록 우리나라가 좋아진다’는 걸 평소 강조하셨다”고 했다.
김우중 전 회장의 청년 사랑은 유별났다. 그는 청년을 키우면 그게 다 자신의 자산이자 자신의 사람이 된다는 걸 잘 알았다. 선협 씨는 “한번은 전화로 ‘전기담요 한 100개쯤 보내라’고 하셨다. 왜냐고 물으니까 ‘베트남은 겨울이 꽤 춥다. 근데 여긴 난방이 잘 안 된다. 애들 춥다. 애들 쓰게 좀 보내라’고 했다”고 덧붙였다.
김우중 전 회장은 늘 청년을 강조했다. 대우그룹 주요 인사가 모여 만든 재단 대우세계경영연구회는 이런 김 전 회장의 뜻에 따라 김우중 사관학교로 불리는 ‘글로벌 YBM(Young Business Manager)’ 사업을 2011년부터 진행해 왔다. 한국 청년을 모아 베트남, 인도네시아, 태국, 미얀마 등지로 보내 현지어를 익히게 하고 일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프로그램이다. 이제까지 키운 청년이 700명을 넘어섰다. 이들은 각 나라 현지 기업에서 하나씩 성장하고 있다. 김 전 회장은 새로운 기수가 오면 늘 직접 청년을 챙겼다. 하지만 몸이 안 좋아진 2018년부터 이마저도 어렵게 됐다.
12월 12일 오전 8시 아주대병원 별관 대강당에서 영결식이 진행됐다. 김우중 전 회장의 청년 관련 이야기가 담긴 목소리가 영상에 재생되자 한데 모인 ‘대우가족’ 수백 명이 눈물을 흘렸다. 마지막 대우 사장을 지냈던 장병주 대우세계경영연구회장이 억울함을 풀지 않고 돌아가셔서 가슴 아프다는 말을 하자 흐느낌은 곳곳에서 커졌다. 모두가 함께 “육대주 오대양은 우리들의 일터다. 온누리 내 집 삼아 세계로 뻗자”는 그룹 사가 ‘대우 가족의 노래’를 부르며 영결식을 마무리했다.
가족 및 주요 임직원 등이 탄 버스 5대는 오전 9시 40분쯤 병원을 떠나 정오쯤 장지인 충남 태안군 인평리의 한 둔덕에 이르렀다. 장지에 이르며 대우그룹 출신 인사의 옛날 이야기가 많이 오갔다. 대우 사태에 따른 세상의 비난을 김우중 전 회장은 많이 억울해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밖에 하지 말라고 했단다.
딱 한 번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한 적이 있다. 2014년 8월 김 전 회장은 신장섭 싱가포르국립대 교수와 나눈 대화를 ‘김우중과의 대화: 아직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라는 책으로 엮어 냈다. 책에는 1998년 IMF 외환위기부터 2002년 대우그룹 해체 때까지의 과정이 적나라하게 기록돼 있었다. 그의 마지막 항변이 담겼다.
“DJ(김대중) 정부 경제팀이 대우가 삼성자동차를 인수하고 대우전자를 삼성에 내주는 ‘빅딜’을 강요했다. 빅딜이 무산되자 법정관리 신청도 할 수 없게 막았다. 그들은 사재 출연을 포함 13조 원의 자산을 채권단에 맡기면 10조 원을 지원하고 자동차를 포함한 계열사 8곳을 경영하게 해줄 수 있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담보로 다 내놓자마자 워크아웃으로 넘겨버렸다. 법정관리로 가면 자기들 마음대로 할 수 없기 때문에 이렇게 한 것이다. 그렇게 해놓고 대우자동차를 GM에 헐값에 넘기는 등 진행한 구조조정은 결국 국가 경제에 막대한 손실을 끼쳤다.”
책은 DJ 사후에 나왔다. 김우중 전 회장은 책을 펴내기에 앞서 박지원 의원에게 작은 부탁을 했다고 한다. 다른 전직 임원은 “김 전 회장이 책을 내기 앞서 박 의원에게 연락을 했다. ‘이희호 여사에게 언질을 좀 주라’는 내용이었다. DJ 정부 때 이야기가 책으로 나가니 알고 계셨으면 한다는 말이었다”고 했다. 늘 관료주의 비판에 앞장섰던 김 전 회장은 DJ 정부 때 관료와의 대립각이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로웠다. 하지만 DJ의 대북정책에는 늘 솔선수범했다.
고인의 장지는 입구와 출구도 없는 그냥 작은 동산 위였다. 누구나 오갈 수 있는 마을 터 한편이었다. 12시 30분쯤부터 안치가 시작됐다. 봉분 터 옆에 놓인 간이 플라스틱 의자에 앉은 부인 정희자 씨의 눈에서는 그제야 눈물이 흘렀다. 30분 정도 천주교식 장례가 치러졌다.
아무런 장식 없는 민무늬 솔송 2단관에 담긴 고인은 1.5m 지하에 묻혔다. 유가족과 전직 대우 임원 일부가 흙을 세 번씩 삽으로 흩뿌렸다. 2m가량 파였던 구덩이는 어느새 평지가 됐다. 현장 인부에게 봉분 조성을 맡기고 모두가 점심 식사 자리로 이동했다. 장지에서 13km 정도 떨어진 충남 서산시 읍내동의 한 갈비탕 집에 추모객이 모여 밥을 먹었다. 식사가 끝난 2시 30분쯤 참배객 모두 해산했다.
3시가 돼서야 봉분이 완성됐다. 상석, 둘레석, 망부석 하나 없이 봉분 주변에 남은 거라곤 멋대로 뻗은 소나무 12그루뿐이었다. 식당에서 조문객을 모두 마중 보낸 뒤 털모자를 쓰고 다시 봉분 근처로 돌아온 아들 선협 씨는 그 자리에 홀로 남아 마지막 봉분 조성이 마무리되는 걸 보고 자리를 떴다.
김우중 전 회장의 묘 앞 전경. 상석, 둘레석, 망부석 하나 없이 봉분 주변에 있는 건 소나무 12그루가 다다. 사진=최훈민 기자
김우중 전 회장의 세계경영 정신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2010년 6월 포스코인터내셔널의 전신 대우인터내셔널은 포스코에 인수되기 앞서 ‘마지막 대우맨’을 공채로 뽑았다. 이 가운데 한 명이 일요신문에 추도사를 보내 왔다.
“한 사람이 국가와 세계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 회장님께 배웠습니다. 시대와 세계의 거인이 처음 세운 회사에서 근무할 수 있게 되어 영광입니다. 부디 영면하소서.”
마지막 대우맨의 배턴을 이어 받아 대우의 명맥을 잇고 있는 건 글로벌 YBM이다. 1기 기장 김보원 씨(37) 역시 김우중 전 회장에게 편지를 남겼다.
“회장님, 우리 할아버지. 전 세계를 호령하시던 회장님이셨지만 저희에겐 영원한 할아버지이십니다. 8년 전 베트남 남부 시골 도시 달랏의 한 식당에서 편식하지 말아야 한다며 손수 달걀말이를 챙겨주시던 우리 할아버지. YBM이라는 회장님의 큰 그림에 초석이 되는 행운을 누릴 수 있어 정말 행복했습니다. 부디 영면하소서. 할아버지.”
최훈민 기자 jipchak@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