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현실을 뜻하는 VR(Virtual Reality)은 헤드 마운트 디스플레이(Head Mount Display, HMD)라 불리는 기기를 머리에 장착하면 어디에 있든 3차원 이미지로 구현된 360도 가상공간 속에 설 수 있다. 체험형 게임을 비롯해 해외 여행지, 박물관 등을 실감나게 간접 구경할 수 있는 VR 콘텐츠들이 등장하고 있는 중인데, 가장 발 빠르게 대응하고 있는 분야는 역시 게임이다. VR 게임 최고 인기작으로 꼽히는 ‘비트세이버’는 100만 장 판매고를 올렸고, 세대를 아우르는 최고 유명 콘텐츠 ‘스타워즈’도 ‘베이더 임모탈(Vader Immortal)’이라는 제목을 단 게임을 출시해 시리즈 최고의 유명 캐릭터 다스베이더의 요새에서 직접 광선검을 휘둘러 볼 수 있는 재미를 선사하고 있다.
물론 게임만 있는 건 아니다. 일례로 우리나라의 온라인 음악 서비스 지니뮤직은 1인칭 시점으로 전 방향으로 나만의 콘서트를 즐길 수 있는 상품을 버추얼 플레이(Virtual Play, VP)라는 이름으로 세계 최초로 출시한다고 밝혔다. 이 상품은 스마트폰용 앱과 더불어 스마트폰을 끼워 쓸 수 있는 전용 HMD 등으로 구성돼 있는 상품으로서 기존 HMD 전문 업체들의 소프트웨어 플랫폼에 종속되지 않은 채 가수 팬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독립된 패키지 상품 형태를 띠고 있다. 첫 VP 음반의 주인공은 인기 보컬 그룹인 마마무다.
VR이 대중 사이에서 실질적으로 부각되기 시작한 것이 2015년이고 보면 불과 4년 만에 비교적 눈에 띄는 사례들을 분야마다 만들어낸 셈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만화 또한 이런저런 시도와 사례들을 만들어냈다.
#만화와 기술의 접목, 그리고 VR
만화는 웹툰의 등장을 전후해 IT 기술에 끊임없이 기민하게 반응해 왔다. 일단 웹툰부터도 웹브라우저로 감상하는 형태로 만화의 형식 자체를 바꾼 것이다. 2011년을 전후해서는 ‘옥수역 귀신’ ‘봉천동 귀신’을 비롯해 웹브라우저 스크롤바의 강제 스크롤로 애니메이션 효과를 연출한 웹툰이 등장하는 한편 스마트폰의 기기 특성을 이용한 만화들의 개발이 모색되었다. 2015년엔 양대 산맥인 네이버와 다음 웹툰이 멀티미디어 효과를 섞을 수 있는 기술을 적용해 각기 ‘웹툰 효과 에디터’라는 도구와 ‘공뷰’라는 브랜드로 내놓은 바 있다. 그리고 2016년을 전후해 만화에 접목되기 시작한 기술이 AR(Augmented Reality, 증강현실)과 VR이다.
VR과 AR 어느 쪽이 좀 더 대중문화 콘텐츠에 맞을까를 놓고 볼 때 스마트폰 외에 별다른 HMD 등의 기기 없이도 볼 수 있는 AR에 무게 중심이 실리는 듯했다. 만화 쪽에서도 2016년 등장한 ‘폰령’과 같은 작품은 AR을 이용해 실제 독자의 공간에 작품 속 이미지를 중첩시킴으로써 공포를 극대화하는 효과를 자아낸 바 있다. 하지만 VR 기술이 발전하면서 HMD를 통한 몰입도가 부각되고 콘텐츠도 다양해지면서 IT 기술이 접목된 콘텐츠의 헤게모니는 점차 VR 쪽으로 기울어가는 모습이다.
만화 또한 VR에 대응하는 업체들이 물 들어올 때를 기다리며 기술력을 쌓아 나가고 있는 상황이다. 2015년 12월 만화를 HMD에서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를 보여준 사례로 꼽히는 ‘Since They Left’가 해외에서 등장한 이래 2016년에는 부천국제만화축제(BICOF)에서 VR과 만화의 접목에 관한 실험(‘2030 코리아 오디세이’, 하민석)과 더불어 세미나 형태로 VR 개발 업체 관계자와의 스터디를 진행했고, 2017년부터는 코믹스V와 스튜디오 호랑, 덱스터 스튜디오 등 VR웹툰을 표방한 업체들이 사업을 본격화하고 있는 추세다. 해외에서는 2016년 모션북이라는 형태로 히어로물 만화 등에 움직임을 주어 제공해 왔던 ‘메이드파이어(Madefire)’가 VR 만화 앱을 출시했다.
VR웹툰 사이트 스피어툰(스튜디오 호랑)의 초기 타이틀이자 대표작인 호랑 작가의 ‘초능력자 그녀’. 2D 이미지를 VR에서 보여주기 위해 3D 모델링과 360도 파노라마 이미지를 복합적으로 이용한다.
#만화 시장의 다음 용을 꿈꾸는 이무기들, 관건은?
아쉽게도 VR 만화는 아직까지 ‘결정적인 한 방’을 터트리지는 못했다. 붐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숫자가 필요한데, 게임이 만들어낸 100만이라는 숫자가 만화 쪽으로 연결되기엔 아직 시간이 필요한 모양새다.
VR 만화의 대중화에는 풀어야 할 숙제가 많다. 일단 HMD가 비싸고, 그걸 쓴 채로 어딘가에 접속해야 하며, 360도 3D화면이 만들어내는 멀미를 감수한 채로 이야기를 읽어내야 한다. VR 게임 대부분이 긴 이야기가 아닌 짧은 호흡을 지니고 있는 까닭은 웬만한 사람은 VR 그래픽을 오래 보고 있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내 경우 3D 멀미 탓에 HMD를 쓰고 체험형 게임을 시작한 지 5분도 안 되어 드러눕고 말았다.
풀3D 그래픽이 시야 전체를 압도하는 게임과 똑같진 않겠으나, 360도가 기본인 VR 환경에서 장편 시리즈 웹툰을 적용하기란 아직 쉽지 않다. 게다가 HMD를 쓰고 콘텐츠를 즐기려는 이들의 가장 큰 목적은 가상 세계에 시각적으로 오롯이 빠져 드는 몰입감인데, 스낵컬처형 웹툰은 일단 그래픽의 밀도가 낮다. ‘Since They Left’가 보여주었듯 주어진 스토리를 그대로 따라가게 하지 않고 분기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기존 만화와 차별화를 꾀할 수도 있겠지만, 이 또한 분기가 많아질수록 게임에 가까워진다. 설상가상으로 캐릭터를 과도하게 움직이면 만화가 아닌 애니메이션이 된다. 결국 VR 안에서의 만화는 반드시 그 중간 지점을 찾아야 한다.
현재 VR 환경에서 보기 위한 만화의 형태가 명확하게 결론 나 있지는 않다. 코믹스V의 거대 캔버스 기반 360도 파노라마 뷰, 스튜디오 호랑의 스피어툰이 보여주는 3D 컷과 360도 모델링 화면의 절충, 그리고 메이드파이어가 보여주는 그래픽노블의 극장 스타일 칸 단위 뷰잉 등 VR에서 게임이나 애니메이션이 아닌 만화를 보여주기 위한 다양한 형태가 나와 있지만 어느 쪽이 우선순위를 지니고 있지는 않다. 한 VR 업계 관계자는 2016년 VR 만화와 관련한 세미나에서 오히려 VR 전용 만화가 아니라 VR 환경 안에 구현된 만화책 도서관이라는 역발상적 개념을 제시하기도 했다.
어쩌면 정답이 없는 싸움이겠지만, 중요한 건 기술의 한계란 언젠가 극복된다는 점이다. 스마트폰 화면을 끼워 씀으로써 비용을 줄인 간이형 HMD를 아예 함께 끼워 파는 마마무의 VP 음반 상품이 보여주듯, 궁극적으로는 고가형 HMD의 기술 싸움이 아닌 콘텐츠와 상품 아이디어 싸움으로 귀결될 터다. 관건은 결국 기술과 비용이 대중 기대 수준의 평균치에 다다랐을 때 막상 보여줄 콘텐트가 얼마나 재미난 노출 아이디어와 함께 나와주느냐에서 갈릴 터다. 이미 현실 속에 다가온 VR에 만화가 어떻게 ‘정착’할지 정말 궁금하다.
만화칼럼니스트 iam@seochanhw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