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A는 지난 12월 13일 오후 보도자료를 통해 “윤석민이 은퇴를 결심했다. 구단은 선수의 의견을 존중해 그 결정을 받아들였다”고 밝혔다. 2005년 2차 1라운드 지명으로 KIA에 입단한 윤석민은 KBO 통산 12시즌 동안 398경기에 등판해 77승(75패) 86세이브 18홀드, 평균자책점 3.29의 기록을 남기고 마운드를 떠난다.
KIA 타이거즈와 국가대표팀에서 오른손 에이스로 오랜 기간 활약해온 윤석민이 은퇴를 발표했다. 사진=연합뉴스
한때는 화려했던 야구인생이다. 워낙 재능이 남달라 입단 첫 스프링캠프부터 곧바로 1군 주전감으로 분류됐고, 팀에서 어떤 역할을 맡겨도 제 몫을 해내면서 빠른 속도로 존재감을 키웠다. 동시에 리그 최고 오른손 에이스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특히 2011년에는 17승(5패) 1세이브, 탈삼진 178개, 평균자책점 2.45, 승률 0.773를 기록해 투수 4관왕(다승, 평균자책점, 탈삼진, 승률)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이 4개 부문 1위를 모두 차지했던 투수는 선동열 전 국가대표 감독과 윤석민 둘뿐이다. 국가대표로도 활약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금메달과 2009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 준우승, 2010년 광저우아시안게임 금메달에 모두 힘을 보태면서 국내 최고 오른손 투수로 각광받았다.
그러나 2015년부터 시작된 어깨 통증이 전성기 기량을 앗아갔고, 2016년엔 어깨 수술까지 받아 오랜 기간 재활을 해야 했다. 윤석민 스스로 부활하려는 의지가 강했지만, 좀처럼 제 실력을 회복하지 못한 채 통증만 재발하는 상황이 반복됐다. 그는 결국 그렇게 다시 마운드에 돌아오지 못하고 유니폼을 벗게 됐다.
#역대 최다패 기록을 딛고 MVP가 되기까지
윤석민의 은퇴 소식을 들은 한 야구 관계자는 “어쩐지 한국 야구의 한 시대가 저무는 느낌”이라고 했다. 그는 20대 초반 젊은 투수였던 윤석민 류현진 김광현이 국가대표 마운드의 주축으로 맹활약한 10년 전을 떠올렸다. 이들이 삼각편대를 이루던 시절, 한국 야구는 국제대회에서 전성기를 누렸고 야구 인기는 불타올랐다. 그 이전은 물론 그 이후에도 당시의 셋처럼 압도적인 국가대표 선발 트리오는 나오지 않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윤석민은 유일한 오른손 투수라 존재감이 더 빛났다. 류현진과 김광현이 확실한 왼손 원투펀치였다면, 윤석민은 유일무이한 오른손 에이스였다. 소속팀과 대표팀에서 꾸준히 선발로만 뛴 류현진이나 김광현과 달리 윤석민은 대표팀에서도 선발과 불펜을 오가면서 마당쇠 역할까지 했다. 여러모로 KIA와 대표팀에 값진 투수였고, 그래서 KIA 팬들을 포함한 수많은 야구팬들은 유독 윤석민을 아끼고 자랑스러워했다.
특급 투수로 올라서는 과정 자체도 드라마틱했다. 77승과 86세이브가 공존하는 통산 성적에서 알 수 있듯 윤석민은 입단 후 선발과 마무리 투수, 불펜필승조를 오가며 변화무쌍한 역할을 섭렵했다. 특히 입단 3년차였던 2007년에는 처음 풀타임 선발 투수로 뛰면서 3.78이라는 준수한 평균자책점을 올렸는데도, 무려 18패를 떠안아 화제가 됐다. 투수 분업화가 정착된 2000년 이후 역대 한 시즌 최다패 기록. 그렇게 많이 지는 동안 윤석민이 따낸 승수는 7승에 불과했다.
그러나 많이 진 투수가 무조건 약한 투수는 아니다. 많이 졌다는 건 그만큼 많은 경기에서 많은 공을 던졌다는 의미다. 통산 최다승 투수인 송진우가 통산 최다패 기록도 함께 보유하고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당시 KIA 사령탑이던 서정환 감독은 “윤석민이 나가면 이상하게 팀이 많이 졌다. 그렇지만 확실한 가능성이 보였기에 한 시즌 내내 선발 로테이션에서 빼지 않고 계속 투입했다”며 “투수는 꾸준하게 던지면서 타자에게 많이 맞아보고 져봐야 이기는 법을 안다”고 했다.
실제로 윤석민은 이후 급속도로 성장했다. 18패 이듬해인 2008년 14승을 올리며 데뷔 첫 두 자릿수 승수를 기록했다. 그해 평균자책점 1위(2.33)도 윤석민에게 돌아갔다. 투수로서 한 단계 도약한 시즌으로 평가받는 해다.
이후에도 빛과 그림자는 계속됐다. 2010시즌에는 다시 좀처럼 승운이 따르지 않고 부상까지 겹치면서 최악의 한 해를 보냈다. 전반기 마지막에는 다 잡았던 승리를 놓친 뒤 라커룸에서 문을 내리치다 새끼손가락이 골절되는 사고를 당했고, 후반기에는 투구 도중 상대 타자가 얼굴에 공을 맞고 수술을 받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일부 팬들의 비난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러나 다시 다음 시즌인 2011년 투수 4관왕과 함께 정규시즌 최우수선수(MVP)와 투수 부문 골든글러브를 석권하면서 자신의 능력을 만천하에 공인받았다.
윤석민은 KIA뿐 아니라 국가대표팀에서도 보직을 가리지 않고 올림픽 등 굵직한 대회에서 활약을 이어갔다. 사진=연합뉴스
#짧은 빅리그 도전과 복귀 그리고 어깨 통증
국내에서는 더 이상 이룰 게 없었던 윤석민이다. 유독 새 구종을 빠르게 익히는 감각을 타고난 덕에 빠른 직구에 팔색조 변화구까지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윤석민과 투수 부문 개인 타이틀을 다투던 류현진과 김광현조차 “체인지업과 슬라이더를 동시에 잘 던지기는 무척 어려운데 석민이 형은 그걸 쉽게 해낸다”고 부러워했을 정도다. 결국 윤석민은 더 큰 무대에 도전장을 내밀기로 결심했다. 1년 후배인 류현진이 2013년 LA 다저스 유니폼을 입고 빅리그 첫 시즌 14승을 올린 직후였다.
2014시즌을 앞두고 자유계약선수(FA) 자격을 얻은 윤석민은 볼티모어와 3년 총액 575만 달러에 계약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새로운 무대에서 새 마음으로 새출발하겠다는 의욕이 충만했다. 그러나 야심찬 도전은 1년 만에 실패로 끝났다. 한 시즌 동안 메이저리그 마운드를 밟지 못한 채 트리플A에 머물렀고, 그마저도 좋은 성적을 올리지 못한 채 부진을 거듭했다. 결국 남은 계약기간 2년을 채우지 못하고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금의환향은 아니었지만 친정팀 KIA는 돌아온 에이스를 두 팔 벌려 환영했다. 당시 투수 최고액이던 4년 90억 원에 사인하면서 상처 입은 자존심을 살려주고 따뜻하게 맞이했다. 계약금이 40억 원이고, 연봉이 매년 12억 5000만 원씩 지급되는 조건이었다.
윤석민은 복귀 첫 시즌인 2015년 팀 사정상 마무리 투수로 활약했다. 51경기에 나서면서 데뷔 후 처음이자 KIA(전신 해태 포함) 선수로는 역대 네 번째로 30세이브 고지를 밟았다. 하지만 2016년부터는 팔 상태가 급격히 나빠져 1군에서 이탈해 있는 기간이 많았다. 그해 1년간 31이닝을 던지는 데 그쳤다. 부상이 원인이었다. 시즌이 끝난 뒤 오른쪽 어깨 위에 웃자란 뼈를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다.
이후 KIA 마운드에 공백이 생길 때면 늘 윤석민의 복귀 여부와 시점이 관심사로 떠올랐다. 윤석민이라는 투수가 마운드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상대 타자에게는 위압감을 줄 수 있다고 믿었던 시절이었다. KIA가 정규시즌 1위를 질주하던 2017년엔 윤석민의 조기 복귀를 점치는 기사가 여러 차례 나왔고, 후반기에는 합류할 수 있다는 희망적인 소식도 꾸준히 들렸다. 그러나 그때마다 피칭 도중 부상이 재발해 다시 재활 과정으로 돌아가기를 반복했다. 그 사이 시즌은 끝나버렸고, 윤석민은 팀이 한국시리즈 정상에 오르는 순간을 함께하지 못했다.
팬들은 어느새 그를 ‘유령 투수’라 부르며 손가락질하기 시작했다. 윤석민의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쳐갔다. 그는 FA 4년 계약이 만료되는 2018년에도 끝내 과거의 위력을 되찾지 못했다. 28경기에서 8승 11세이브, 평균자책점 6.75를 남기는 데 그쳤다.
#10억 5000만 원 삭감된 연봉, 돌아오지 못한 마운드
4년 전 ‘윤석민’이라는 선수의 가치를 90억 원으로 평가했던 KIA는 결국 올해 연봉을 현실에 맞게 조정했다. 지난해 연봉 12억 5000만 원에서 무려 10억 5000만 원이 삭감된 2억 원에 재계약을 했다. 역대 KBO 리그 연봉 최다 삭감액. 삭감률이 무려 84%에 달했다. 구단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고, 윤석민으로서는 거부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그는 담담하게 상황을 받아들이고 인정했다. 지난 세 시즌의 부진이 남긴 안타까운 결과였다.
그런데도 재활의 터널은 길기만 했다. 윤석민은 올해 2월 1일 시작된 일본 오키나와 스프링캠프에 참가했지만 캠프 시작 열흘 만에 중도 귀국했다. 고질적인 오른 어깨 통증과 허벅지 내전근 통증이 재발해서다. 다시 한 걸음 뒤로 물러섰고 더 이상 전진하지 못했다. 2018년 10월 12일 롯데전을 끝으로 1군 엔트리에 단 한 번도 이름을 올리지 못한 채 2019시즌을 끝냈다. 2군에서도 4월 두 경기에 출전한 게 전부. 1년을 재활군에서만 보냈다. 수술로 깎아냈던 어깨 위 웃자란 뼈가 다시 자라고 있다는 얘기도 들려왔다.
그러다 결국 끝이 왔다. 윤석민은 시즌 초부터 서서히 ‘은퇴’라는 단어를 떠올렸고, 시즌이 끝난 뒤 구단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굳혔다. 자신과 후배들과 팀 모두를 생각한 결단이었다. 그는 은퇴를 발표하면서 구단을 통해 “다시 마운드에 서기 위해 노력했지만 정상적인 투구가 어려운 상황”이라고 이유를 털어 놓았다. “더 이상 재활군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기보다 후배들에게 기회를 더 주기 위해 은퇴를 결심했다”고 했다.
또 “선수로 뛰면서 팬들의 넘치는 사랑을 받았다. 응원과 사랑에 보답하지 못한 것 같아 죄송한 마음뿐”이라며 “앞으로도 팬 여러분이 보내주신 사랑을 가슴에 새기고 살겠다. 정말 감사드린다”는 인사를 전했다. “그동안 기회를 주시고 지도해주신 감독님과 코치님, 구단 직원들에게도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는 말도 했다.
이후에는 다시 자신의 SNS를 통해 팬들을 향한 더 깊은 속내를 털어 놓기도 했다. KIA 유니폼을 입은 사진과 함께 “(선수 생활을) 끝내고 보니 내가 받았던 과분한 사랑과 응원, 격려가 너무 생생하게 기억난다”고 썼다. 또 “어릴 때는 야구에 집중하느라 너무 예민한 성격이어서 경기 당일에는 팬분들에게 사인을 못해드린 게 지금 제일 많이 후회된다”며 “그래도 끝까지 응원해주신 팬들은 잊을 수가 없다. 나의 진심이 어떻게 전달이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너무 감사했고 사랑한다”고 적었다.
그렇게 윤석민은 광주의 마운드에서 내려왔고, KIA 역사의 중요한 한 챕터도 닫혔다. 그리고 한국 야구는 또 한 명의 재능 있는 특급 투수를 떠나보냈다. 유독 잊을 수 없는 명장면을 많이 선사했던 윤석민이기에 쓸쓸하기만 한 마지막이 더 짙은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배영은 일간스포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