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현(31)의 에이전시 측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 협상 과정이 비밀리에 진행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협상이 어느 정도 마무리됐을 때 세인트루이스 구단이 제일 먼저 내건 조건이 보안 유지였다는 것. 그러나 구단의 바람과 달리 김광현의 출국 사실이 국내 언론을 통해 알려졌고, 김광현이 메디컬테스트를 위해 세인트루이스에 도착했을 때는 미국 언론에서도 구단과 선수의 행보를 주목할 수밖에 없었다.
김광현은 2년 보장금액 800만 달러에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 계약했다. 사진=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페이스북
지난 18일 김광현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 2년간 보장 금액 800만 달러(옵션 포함 1100만 달러)에 계약했다. 출국부터 메디컬테스트, 입단 기자회견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됐던 김광현과 세인트루이스 협상 과정을 소개한다.
김광현 측이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구단 관계자와 처음 접촉한 것은 12월 9~13일(한국시각) 미국 샌디에이고에서 열린 메이저리그(MLB) 윈터미팅 기간이었다. 김광현의 한국 대리인인 김현수 대표는 김광현의 미국 현지 에이전트인 존 복스(JBA스포츠)와 함께 윈터미팅 현장에서 김광현에게 관심을 나타낸 구단 관계자들과 협상을 시작했다.
협상 테이블에 앉은 구단은 모두 4팀. 그중 세인트루이스는 3순위였다는 후문이다. 김광현 측은 선수에게 관심을 보인 구단들의 정체에 대해 “충분히 예상 가능한 팀들”이라고만 설명했다. 그 내용을 토대로 꼽는다면 그동안 꾸준히 거론되었던 시카고 컵스, 뉴욕 메츠, 캔자스시티 로열스,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일 가능성이 높다.
실제 윈터미팅이 열리는 동안 샌디에이고 구단과 김광현 측이 만난 사실이 현지 언론을 통해 알려졌다. 샌디에이고의 A.J. 프렐러 단장 또한 지역 매체와 인터뷰에서 “우린 김광현을 오래 지켜봤다. 그를 좋아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샌디에이고와 접촉이 관심을 끌었던 이유는 2014년 당시 김광현이 포스팅(비공개 경쟁 입찰) 시스템을 통해 메이저리그 진출을 꾀했을 때 200만 달러의 포스팅 비용으로 단독 교섭권을 얻은 샌디에이고와 협상을 진행하다 무산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악연’이 이번에는 ‘인연’으로 이어질 수 있을지 궁금증을 불러 일으켰지만 취재한 바, 실제 협상 과정이 미국 언론에 알려진 만큼 뜨겁지는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샌디에이고 구단이 그만큼 적극적으로 달려들지 않았다는 것. 그렇다면 윈터미팅 기간에 갑자기 등장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 협상은 어떻게 진행된 것일까.
‘수훈 선수’는 세인트루이스 스카우트 총괄 책임자인 맷 슬레이터다. 맷 슬레이터는 2016년 오승환에게 세인트루이스 유니폼을 입힌 주인공. 밀워키 브루어스, 볼티모어 오리올스, LA 다저스에서 일하며 아시아 시장에 관심을 가진 그는 2012년부터 세인트루이스 스카우트로 활약 중이다. 스카우트계의 베테랑인 그가 김광현 측과 접촉했을 때는 구단이 제시할 수 있는 최선의 계약 조건에다 진심을 담았다는 전언이다.
세인트루이스가 협상 우선순위가 아니었음에도 성공적인 계약으로 이어질 수 있었던 건 맷 슬레이터가 김광현 측에 진정성 있게 다가갔기 때문이라고. 김광현 측 관계자는 “비즈니스에서 감정적인 부분은 최대한 배제하는 게 당연했지만 맷 슬레이터는 협상 내내 우리의 마음을 움직였다”면서 “그 부분이 선수한테 진심으로 전달됐다”고 설명했다.
구단과 선수의 협상이 최종적으로 마무리된 건 12월 15일 밤이었다. 메디컬 테스트를 위해 16일 저녁 급히 출국한 김광현은 한국 시간으로 17일 오후 세인트루이스에 도착했고, 18일 5시간 동안 메디컬 테스트를 받은 후 그날 입단식을 겸한 기자회견을 치렀다.
김광현은 기자회견을 갖기 전 구단 관계자와 인사를 나누고 세인트루이스 홈구장인 부시스타디움으로 향했다가 그라운드 전광판을 보고 깜짝 놀랐다는 후문이다. 김광현 측 관계자는 “그 전광판에 김광현 선수의 입단을 축하하는 글과 함께 가족사진이 소개됐다. 선수가 감동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라고 설명했다. 부시스타디움은 투수 친화구장으로 유명하다. 밤새 내린 눈이 하얗게 뒤덮인 그라운드를 본 김광현은 야구장의 아름다운 풍광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구단의 환대가 매우 인상적이었다. 선수도 세인트루이스 사람들이 매우 친절하다고 만족해 했다. 계약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된 터라 앞으로 선수가 잘할 일만 남았다.”
메이저리그 사무국에서 김광현의 포스팅을 공시한 날짜는 12월 6일. 한 달간의 협상 기간이 주어지기 때문에 마감일은 오는 1월 6일이었다. 김광현은 협상 마감일 3주 전에 일찌감치 세인트루이스와 계약을 매듭지었다.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메이저리그 구단들은 크리스마스 전인 24일부터 1월 초까지 휴가를 갖는다. 세인트루이스 구단도 마찬가지였다. 12월 24일부터 1월 4일까지가 휴가라 구단 업무가 잠시 중단된다. 즉 김광현 측 입장에서는 여유를 갖고 구단들과 입단 협상을 벌일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19일 미국 AP통신은 김광현이 세인트루이스 구단과 맺은 세부 옵션을 공개했다. 공개된 내용에 따르면 선발로 15경기 등판 시 30만 달러, 선발 20경기 등판 시 30만 달러, 선발 25경기 등판 시 40만 달러로 총 100만 달러를 추가로 받을 수 있다. 즉 선발 로테이션만 꾸준히 지킨다면 어렵지 않게 받아낼 수 있는 옵션이다. 구원 등판해서 마지막 투수로 경기를 끝냈을 때 40경기 50만 달러의 조건도 붙었지만 이는 실현 가능성이 거의 없는 내용으로 알려졌다.
김광현이 세인트루이스에서 달게 된 등번호는 33번. 김광현은 내심 SK에서 사용했던 29번을 달고 싶어 했지만 현재 세인트루이스의 알렉스 레이에스가 29번을 사용하고 있어 남은 번호들 중에서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한편 김광현 영입에 나섰다가 실패를 맛본 A 팀의 B 스카우트는 “우리의 스케줄보다 김광현 선수의 협상 스케줄이 굉장히 빠르게 진행됐다”면서 “몇 차례 더 선수 에이전트와 협상을 이어가려 했지만 그새 세인트루이스가 속도감 있게 협상을 진행했고, 계약까지 성사시켜 깜짝 놀랐다”는 소감을 전했다. A 팀이 제시한 계약 조건은 세인트루이스의 계약 내용보다 낮은 수준인 것으로 알려졌다.
B 스카우트는 김광현이 세인트루이스로부터 받아낸 조건을 언급하며 “에이전트가 협상을 잘해서 그런지 굉장히 좋은 내용의 계약을 이끌어냈다”면서 “윈터미팅 때 김광현 선수한테 관심을 보인 팀들의 보이지 않는 경쟁이 치열했는데 세인트루이스는 전혀 예상 밖의 구단이라 깜짝 놀랐다”는 소감을 전했다.
SK에서 활약하다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에 입단한 메릴 켈리는 2년 550만 달러의 보장 계약을, 두산의 조쉬 린드블럼은 밀워키 브루어스와 3년 912만 5000달러에 계약을 맺은 터라 김광현의 2년 800만 달러의 보장 계약은 더욱 눈에 띌 수밖에 없다.
이영미 스포츠전문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