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하정우. 사진=CJ엔터테인먼트 제공
지난 12월 20일 서울 종로구 소격동의 한 카페에서 하정우를 만났다. 블랙 컬러의 스웨터를 걸치고 뿔테 안경을 착용한 그는 하루 동안 몰린 인터뷰에 다소 피곤해 보였지만 대부분 질문에 막힘없는 답변으로 취재진을 안심시켰다. ‘그’ 이병헌과 함께 투톱 주연으로 제작비 260억 원의 대작 ‘백두산’을 이끈다는 것도 그랬지만, ‘국민 첫사랑’ 수지와 첫 호흡이 부부라는 것에 먼저 놀랐을 대중을 배려해주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저는 늘 제 연기를 보면 부족하다고 느끼거든요. 이번에 수지 씨와 찍은 장면도 영화관에서 볼 때 ‘아 좀 어색해 보이지 않나’ 그렇게 생각했어요(웃음). 제가 영화에서 맡은 조인창 대위 역할도 어떻게 보면 다 예상 가능한 재난영화의 스토리라인에서 나올 법한 캐릭터보다는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려고 노력했거든요. 원래 시나리오에선 이런 캐릭터가 아니었는데 제가 해석해서 (감독에게) 제안한 거예요. 특수요원이지만 전투병은 아니고, 단면적으로 멋있게만 보이는 게 아니라 반대로 허술하고 당황하고, 우왕좌왕하는 그런 모습을 더 극대화시켜서 표현하고자 했어요. 보면 병헌이 형하고 제가 각자 정반대 모습을 보여드렸던 것 같아요. 병헌이 형은 다 때려 부수고 인간 병기 같은 느낌이라면, 저는 반대로 막 쫄고, 우왕좌왕하는 거죠(웃음).”
실제로 영화 ‘백두산’ 속에서 조인창 대위의 모습은 그와 비슷할 것이라 예상됐던 ‘PMC: 더 벙커’ 속 에이햅과 정반대 모습을 보인다. 능글맞지도, 유들유들하지도 않고 장갑차 속에서 어린 아이처럼 다리를 동동 구르며 “나 전역해야 하는데 왜 이런 데에 끌려 온 거야”라며 징징거리는, 결말에서야 영웅으로 치켜세워지더라도 어디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소시민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2010년대 중반부터 지금까지 하정우가 출연했던 작품들을 하나씩 곱씹어 본다면 다소 거리감이 느껴지는 캐릭터의 구축일 수도 있다. 하정우 역시 그런 점을 깊이 생각했다고 했다.
“제가 영화 ‘그린 북’을 굉장히 좋아해요. 그 작품에서 비고 모텐슨 배우가 나오는데, 그 분의 전작을 보면 전부 다 카리스마 있고 센 캐릭터거든요. 그런데 ‘그린 북’에서는 인간적이고 허술해 보이는 모습을 보여주잖아요? 저는 그런 캐릭터가 정말 좋더라고요. 사실 ‘신과 함께’에서 강림 같은 캐릭터는 저한테 너무너무 어려운 캐릭터였어요(웃음). ‘PMC: 더 벙커’도 마찬가지예요. 그런 종류의 캐릭터는 배우가 표현할 수 있는 한계가 있거든요. 마치 머리 위에 캡을 쓰고 연기하는 느낌인 거죠. 반면 조인창 대위 같은 캐릭터는 리준평(이병헌 분)에게도 입체적으로 다가서는 모습을 보이잖아요. 표현할 수 있는 폭이 많이 보장된다는 느낌이에요. 그래서 ‘백두산’을 찍을 때 일하는 게 즐겁다고 느꼈던 것 같아요.”
11월 19일 ‘백두산’ 제작보고회에 참석한 이병헌 배수지 전혜진 하정우(왼쪽부터). 사진=박정훈 기자
극중 북한의 이중 스파이 리준평 역을 맡은 이병헌은 소시민 하정우와의 찰떡궁합 ‘티격태격’ 신을 보여주면서 그들의 촬영 뒷이야기를 궁금하게 만들었다. 앞선 인터뷰에서 이병헌은 “촬영하면서 하정우 씨가 유튜브를 많이 보기에 저도 따라서 보게 됐다”며 ‘먹방’에 한동안 빠졌던 이유를 밝히기도 했다. 반면 하정우는 “그거 병헌이 형이 먼저 본 건데”라며 선후관계가 잘못됐다고 억울하다는 듯이 반박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상대 배우에 대한 애정어린 칭찬도 아끼지 않았다.
“유튜브는 병헌이 형이 많이 봤죠(웃음). 저도 형이 먼저 ‘먹방’ 보는 걸 보고 형 때문에 ‘쯔양(유명 먹방 유튜버)’을 알게 된 건데요? 형이 얼굴에 수염을 그렇게 붙이고 옷은 멋있게 딱 입은 상태로 유튜브 먹방을 막 보고 있는 거예요. 보고 있자니 신기하더라고요(웃음). 사실 이병헌 배우가 선배이기도 하지만 배우로서도 정말 너무나 훌륭하잖아요. 특히 이 작품에서는 주연이라는 짐을 같이 나눠 지고 간다는 느낌에 굉장히 의지가 많이 됐어요. 제가 좋은 의미로 ‘연기 기계’라고 표현했는데 형은 정말 흐트러짐이 없어요. 매번 한 테이크 갈 때마다 열정과 에너지가 20대 이상이에요. 이번에 영화를 보고 나니까 그 이상으로 더 (이병헌이) 좋았던 것 같아요.”
투톱 주연에 대해 겸손한 답변을 내놓긴 하지만, 여전히 영화계에선 ‘하정우’라는 이름 석 자가 갖는 영향력이 곧 흥행에 직결된다는 믿음이 있다. 정확히 말한다면 완벽한 ‘흥행 보증 수표’라기보다 ‘믿을 만한 배우’ 가운데 최상위권에 자리 잡고 있는 셈이다. 그 역시 몇 차례 흥행 실패를 겪긴 했으나 대중에게 ‘하정우’가 곧 브랜드로 자리 잡을 정도의 신뢰를 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 하정우가 배우 하정우로, 그리고 ‘하정우’라는 브랜드로 자리매김하기까지, 하정우는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성장의 ‘터닝 포인트’를 꼽았다.
“제가 터닝 포인트로 생각하는 건 일단 ‘추격자’, 이 작품은 제가 일반 관객들에게 처음 영화배우로서 소개됐던 작품이죠. ‘황해’ 같은 경우는 큰 성공은 거두지 못했지만 1년간 그 작품 속 캐릭터로 살아가면서 제 자신이 한계에 부딪치고 바닥을 쳤던 기억이 있어요. 그래서 제 인생에서 한 번쯤 다시 생각하게 되는 큰 터닝 포인트가 된 느낌이에요. ‘허삼관’은 제가 감독과 주연을 동시에 맡으면서 ‘다시는 두 개를 동시에 할 수 없겠구나’ 하고 깨달은 작품이에요(웃음). 영화가 너무 어렵다는 걸 그때 깨닫게 됐거든요. ‘허삼관’을 기점으로 그 이후에 ‘아가씨’ ‘1987’ ‘PMC: 더 벙커’ 등을 찍었는데, ‘허삼관’이 이후 작품을 찍을 수 있는 큰 동력을 준 것 같아요. (배우 인생의) 한 챕터가 ‘허삼관’으로 끝났고, 다시 새로운 페이지로 나가는 느낌인 거죠.”
지난 12월 18일 진행된 ‘백두산’ 제작보고회에서의 하정우. 사진=박정훈 기자
하정우의 배우 인생이 몇 번째 챕터를 맞이하게 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대신 ‘40대’ 배우로서 마음가짐을 한 번 더 생각해 본다고 말했다. 여전히 액션에도 목이 마르고, ‘로맨틱 코미디’ 장르도 손대 보고 싶고, 휴먼 드라마에도 욕심이 난다는 그는 연기에 대해서는 몸 사리지 않을 열정을 강조했다.
“제 무릎 연골 (부상) 얘기들을 하시는데 농구를 많이 해서 그래요(웃음). 운동을 하느라 무릎에 무리가 많이 갔는데 ‘백두산’에서 뛰는 신을 찍다가 연골이 찢어진 거예요. 뛰는데 ‘뚝’ 소리가 나더라고요. 지금은 수술 다 하고 완쾌했어요(웃음). 나이 얘기를 하면 새치를 염색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런 고민이 있긴 해요. 어느 순간 나이를 먹으면서 흰 머리도 자연스럽게 보여야 할 텐데(웃음). 40대에 맞는, 내가 살아온 경험에 맞는 연기와 배우로서의 생활을 해 나가야 할 거고, 촬영장에서도 그런 태도를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관객들이 보시기에 저와 같이 나이 들어가면서, 함께 살아가고 있구나 하는 느낌을 주는 그런 친근한 배우로 기억됐으면 좋겠어요.”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