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사냥은 고대부터 왕실과 귀족의 취미 활동이자, 민간에서 대대로 이어져온 자연친화적인 수렵활동이자 전통문화였다. 사진=연합뉴스
매사냥이란 매나 기타 맹금을 길들여서 야생 상태에 있는 사냥감을 잡도록 하는 전통 사냥이다. 매사냥은 아시아의 초원지대에서 발달하여 무역과 문화 교류를 통해 다른 지역으로 퍼져나가며 4000년 이상 지속돼 왔다. 처음에는 유럽, 북아프리카, 동아시아로 전해졌고, 16세기 후반에는 나머지 세계로까지 확산된 것으로 추정된다. 역사상 고대 및 중세시대에 행해진 매사냥은 세계 곳곳에 기록으로 남아 있다.
우리 선인들은 아득한 고대부터 매사냥을 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도 매사냥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삼국사기’에는 백제 아신왕이 매사냥을 즐겼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고려시대에는 매의 사육과 사냥을 전담하는 응방이라는 관청까지 생겨나 조선시대에도 존속했다. 특히 태종 이방원은 매사냥을 즐겼는데, ‘조선왕조실록’(태종실록)에는 매사냥을 나가려는 태종과 이를 그만둘 것을 주청하는 대간 사이에 논쟁하는 장면이 담겨 있기도 하다.
이처럼 매사냥은 왕실과 귀족이 즐기는 취미 활동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민간에서 대대로 이어져온 서민들의 자연친화적인 수렵활동이자 전통문화였다. 우리나라에서 매사냥은 한로와 동지 사이에 새끼 매를 잡아서 길들인 후 주로 겨울 동안 성행했다. 처음 잡은 매는 야성이 강하여 매섭게 날뛰기 때문에 숙달된 ‘봉받이’(매를 부려 사냥을 하는 사람)가 길들이기를 한다. 매를 길들이기 위해서 방 안에 가두어 키우는데, 이 방을 ‘매방’이라 부른다. 매를 길들이는 매 주인은 매방에서 매와 함께 지내며 친근해지고 유대감을 쌓은 뒤에야 사냥에 나설 수 있었다. ‘보라매’란 이렇게 길들여서 사냥에 쓰는 매를 뜻한다. ‘시치미 떼다’라는 우리말도 매사냥에서 나왔다. 매 주인이 자신의 매임을 표시하기 위해 붙이는 이름표를 ‘시치미’라고 하는데, 다른 사람이 매를 탐내어 이름표를 뗀 데서 유래한 단어다.
매사냥은 개인이 아니라 팀을 이루어 진행된다. 전통적으로 꿩을 몰아주는 몰이꾼(털이꾼), 매를 다루는 봉받이, 매가 날아가는 방향을 봐주는 배꾼 등 최소 5~6명으로 팀이 구성된다. 대자연을 무대로 펼쳐지는 매사냥은 그 광경도 장관이지만, 인간으로 하여금 자연과 융합하는 지혜를 일깨워준다. 어찌 보면 매사냥꾼의 역할은 매와 사냥감이라는 두 배우를 자연이라는 무대 위로 모두 불러들이는 데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세계 18개국이 매사냥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공동등재했다. 꿩 잡는 매. 사진=연합뉴스
매사냥은 문화에 따라 고유한 전통 및 윤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매사냥꾼은 비록 배경이 되는 환경이 서로 다를지라도 보편 가치와 전통, 기술을 공유한다. 또한 매사냥 유산을 전승하는 과정은 매사냥 공동체에게 그들이 공유하는 역사적 기억을 되살아나게 할 뿐만 아니라 문화 정체성 또한 보다 다채롭게 해준다. 매사냥이 대한민국을 비롯해 독일, 사우디아라비아, 오스트리아, 벨기에, 아랍에미리트 등 여러 나라가 함께 공유하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자리매김한 배경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서 매사냥은 일제강점기 때까지도 성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1931년 3월 18일자 ‘동아일보’에는 ‘매사냥 인구가 너무 많아 당국이 수를 제한할 방침’이라는 내용의 기사가 눈에 띈다. 이 기사에 따르면 당시 전국에 걸쳐 매사냥꾼이 2492명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매사냥의 전통이 끊기다시피 한 일본이 우리나라 응사들을 초빙해 매사냥을 부흥시키려 한다는 내용도 담겼다.
그러나 광복 이후 한국 전쟁과 국가 재건 과정을 거치면서 급격한 도시화로 인해 매사냥 전통은 급격히 위축되기 시작했다. 현재는 각각 시도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매사냥 기능보유자 2명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힘겹게 명맥이 유지되고 있다. 최근 기념우표 발행을 계기로 매사냥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이 다시 되살아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자료협조=유네스코한국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