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석의 데뷔 초 모습. 사진=일요신문DB
그는 2006년 MBC ‘무한도전’의 진행자로 나서며 본격적인 상승세를 보였다. 초창기에는 3% 시청률을 면치 못했으나 2년 안팎의 숨고르기를 마친 뒤 ‘무한도전’은 전무후무한 예능 프로그램으로 자리매김했다. 2018년 이 프로그램이 끝난 뒤 ‘유재석의 위기’라는 진단이 여러 곳에서 나왔으나, 그는 2019년 ‘유산슬’이라는 예명으로 트로트 시장을 부흥시키며 화려하게 부활했다.
유재석이 2020년 데뷔 30주년을 맞는다. 1991년 ‘KBS 대학개그제’로 데뷔해 묵묵히 걸어온 유재석의 30년을 짚어본다.
#KBS ‘대학개그제’(1991) 유재석의 등장
유재석은 1991년 처음 열린 ‘대학개그제’를 통해 데뷔했다. 동기인 최승경과 함께 장려상을 받았지만, 호명된 후 무대 위로 나가던 유재석은 왼손을 바지주머니에 넣고 오른손으로 귀를 파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수상 성적에 만족하지 못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후 정식으로 개그맨이 된 뒤 한 기수 위 선배가 “그때 귀 판 녀석 누구야?”라고 외쳤고, 유재석은 호되게 신고식을 치른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의 호기와 선배의 꾸짖음이 훗날 겸손함의 대명사가 된 유재석의 발판을 마련한 것인지도 모른다.
톱스타가 된 뒤는 물론이고 자신의 결혼식장에서도 유재석은 메뚜기춤을 추게 된다. 사진=임준선 기자
유재석의 대표적 별명은 ‘메뚜기’다. 메뚜기 탈을 쓰고 누비던 그의 신인 시절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그가 처음 메뚜기 탈과 만난 건 1997년 방송된 KBS ‘코미디 세상만사’의 코너 ‘남편은 베짱이’ 중에서다. 정통 개그 무대에서 별다른 두각을 보이지 못하던 그에게 김석윤 당시 KBS PD(현 JTBC콘텐트허브 제작부문장)가 손을 내밀었다. 유재석은 “처음으로 내게 메뚜기 탈을 쓰게 한 분”이라며 “아무도 손을 안 잡아줄 때 내 손을 잡아줬다. ‘네가 예능을 하고 싶으면 이걸 해야 한다’고 했다”고 말한 바 있다. “솔직히 메뚜기 탈을 쓰기 싫었다”던 유재석조차 ‘국민MC’가 된 뒤에도 메뚜기춤을 추게 될지는 몰랐을 것이다. ‘메뚜기도 한철’이라는 말이 있지만, 유재석에게 만큼은 메뚜기가 사시사철이다.
#MBC ‘스타 서바이벌 동거동락’(2000) 메인 MC가 되다
리포터나 고정 출연진으로 전전하던 유재석에게 드디어 기회가 왔다. MBC ‘목표달성 토요일-스타 서바이벌 동거동락’의 진행자를 맡으며 메인 MC로 나서게 됐다. 당대 최고의 스타였던 가수 유승준과 환희, 김성수, UN 김정훈 등이 게스트로 참여했고 ‘방석퀴즈’와 ‘비몽사몽퀴즈’ 등이 유재석 특유의 깐족거리는 진행 스타일과 찰떡궁합을 자랑하며 화제를 모았다.
2010 KBS 연예대상 시상식에 참석해 대화를 나누고 있는 유재석과 강호동. 사진=연합뉴스
유재석은 2000년대 초반부터 두각을 보이기 시작한다. 그 가운데 ‘슈퍼TV 일요일은 즐거워-MC대격돌’의 ‘공포의 쿵쿵따’는 지금도 대중이 술자리에서 즐기는 전설적인 게임이다. 유재석은 강호동과 처음으로 호흡을 맞춘다. 이때만 해도 두 사람이 몇 년 후 ‘국민MC’자리를 두고 쌍벽을 이룰 것이란 상상을 누구도 하지 못했다. 이후 유재석과 강호동은 2003년 SBS ‘일요일이 좋다-X맨’에서 다시 만났다. 당시 각각 ‘강팀’과 ‘유팀’의 팀장을 맡아 승부를 겨루며 ‘당연하지’ 등의 명코너를 낳았다.
#MBC ‘무한도전’(2006) 인생작 탄생
2005년 ‘무모한 도전’ ‘무리한 도전’을 거친 ‘무한도전’은 2006년부터 제 이름을 찾고 본격적으로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대한만국 평균 이하 남성 6명의 다양한 도전기를 그린 ‘무한도전’은 원년 멤버인 유재석·박명수·정준하·정형돈·노홍철·하하를 시작으로 전진·길·황광희·양세형·조세호 등이 들고나며 12년 동안 명맥을 유지했다. 당시만 해도 ‘애국가 시청률’ 수준인 3%대를 전전하던 ‘무한도전’은 2008년 사극 ‘이산’에 카메오 출연 특집으로 최고 시청률 30.4%를 기록하며 ‘역사’를 썼다. 2015년 광복 70주년을 맞아 한국갤럽이 실시한 ‘광복 이후 최고의 TV 프로그램’ 설문조사에서 ‘전원일기’를 큰 차이로 제치고 1위에 오르기도 했다.
그 중심에는 항상 유재석이 있었다. 스튜디오를 박차고 나간 그는 무리를 진두지휘하며 한국 예능의 지평을 넓혔고, 리얼 버라이어티 시장을 활짝 열었다. 이후 유재석은 본격적으로 ‘국민MC’라는 타이틀을 달았고, 지상파 3사를 종횡무진하며 무려 14차례 연예대상을 품에 안았다. 이 프로그램 안에서 그의 존재감을 고려할 때, ‘무한도전’의 유재석이 아니라 유재석의 ‘무한도전’이라 해도 무방하다.
코리아 스피드 페스티벌(KSF) 레이싱 대회에 참석한 ‘무한도전’ 멤버들. 사진=일요신문DB
#SBS ‘런닝맨’(2010) 한류스타로 발돋움
한류가 아시아 전역을 휩쓸었지만 가수, 배우에 비해 예능인의 진출은 더뎠다. 시청자들의 웃음을 이끌어내야 하는 예능 프로그램의 특성상 언어적 장벽이 높고 웃음 코드를 맞추기도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재석이 이끄는 SBS ‘런닝맨’은 중국에서 방송돼 소위 ‘대박’을 터뜨렸다. 결국 중국에서 리메이크 판권을 정식 수입하는 쾌거를 일궜다. 이와 함께 ‘런닝맨’ 멤버들은 아시아 전역을 돌며 팬 미팅을 열었다. 2015년에는 KBS ‘해피투게더’ 녹화 때문에 투어에 참여하기 어려운 유재석을 ‘모시기’ 위해 중국 주최 측이 전용기를 보내기도 했다.
#MBC ‘놀면 뭐하니?’ & tvN ‘유퀴즈 온더 블록’(2019) 가장 낮은 곳으로…
‘무한도전’이 끝난 뒤 “유재석의 전성기가 지났다”는 평가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덧 50대를 향해 가는 유재석은 그의 권위와 권좌를 모두 내려놓으며 대중의 마음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유퀴즈 온더 블럭’에서는 전국 각지를 돌며 시민들과 만났다. 그들의 마음의 빗장을 열고 꾸밈없는 웃음과 눈물을 이끌어내는 솜씨는 명불허전이었다. ‘무한도전’의 화려함보다 ‘유퀴즈 온더 블럭’의 소박함에 더 반했다는 평가가 잇달았다.
‘무한도전’의 김태호 PD와 다시 손잡은 ‘놀면 뭐하니?’에서 그는 트로트 가수 도전기를 그린 ‘뽕포유’를 통해 유산슬로 거듭나며 다시 만개했다. 신인의 자세로 KBS 1TV ‘아침마당’에서 트로트 신인들과 생방송 무대를 꾸민 것은 압권이었다. 그는 ‘국민 (위에 군림하는) MC’가 아니라 ‘국민(과 손을 잡는) MC’였다.
넷플릭스 예능 ‘범인은 바로 너!’ 제작발표회 겸 레드카펫에 참석해 시민들과 어울리고 있는 유재석. 사진=박정훈 기자
지난 12월 19일 김태호 PD가 기획한 ‘유재석만 몰랐던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그에게 향후 계획을 물었다. 2020년 데뷔 30주년을 맞는 유재석은 그다운 대답을 내놨다.
“별다른 계획을 세우고 사는 스타일이 아니라 맡겨진 일을 해나갈 계획입니다. 어떤 도전을 하게 될지는 몰라도, 실패하더라도 누군가는 해야 할 새로운 일에 도전하겠습니다. 잘못된 방향이면 언제든 잘못됐다고 얘기해주십시오. 트렌드를 만들 능력은 없지만 트렌드를 따라갈 생각은 없습니다.”
안진용 문화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