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그룹은 지난 12월 19일 지주사를 비롯해 유통·식품·화학·서비스 부문 50여 계열사의 2020년 정기임원인사를 단행했다. 이번 롯데 인사의 핵심은 롯데그룹 상징인 유통사업 부문의 초고강도 조직개편이다. 기존 롯데그룹 유통비즈니스유닛(BU) 아래 백화점, 마트, 슈퍼, 이커머스, 롭스, 5개사마다 대표이사가 관장하던 체제에서 한 명의 BU장이 ‘원톱(One Top) 대표’로서 다섯 곳을 모두 통솔하는 통합법인 체제로 재편됐다.
롯데백화점 대표였다가 이번에 부회장으로 승진한 강희태 부회장이 유통BU장과 롯데쇼핑 대표이사를 동시에 맡기로 했다. 기존 유통BU장 이원준 부회장은 일선에서 물러났다. 마트를 제외한 백화점, 슈퍼, 이커머스, 롭스, 4개 사업부 수장이 모두 교체됐다. 롯데그룹 관계자는 “의사결정 단계를 축소하고 빠른 실행력을 확보하기 위해 개편됐다”라고 설명했다.
지난 12월 19일 단행한 롯데그룹 정기인사의 핵심은 롯데그룹 상징인 유통사업 부문의 초고강도 조직개편이다. 사진=연합뉴스
지난 10월 말 인사를 두 달 앞당겨 단행한 신세계그룹은 백화점과 이마트 수장을 모두 바꿨다. 신세계백화점과 신세계인터내셔날은 각각 대표이사를 맞바꿨고, 이마트는 6년 동안 회사를 이끌어온 이갑수 대표를 교체했다. 강희석 베인앤드컴퍼니 파트너가 이마트의 새 수장이 됐는데, 외부인사가 대표가 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관련기사 이마트 인적쇄신에 ‘오너 책임경영 회피’ 논란 이는 까닭).
베인앤드컴퍼니는 미국계 경영전략 컨설팅 회사다. 2018년부터 삼성전자와 (주)LG, 포스코 등이 이 회사 출신 인물들을 ‘전략통’으로 영입하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대기업들이 시장 변화를 분석하고 신사업을 발굴하는 컨설팅 등 기업 프로젝트를 맡았던 인물들을 데려와 새 전략을 짜고 있다. 이마트도 강희석 대표에게 같은 역할을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롯데쇼핑과 이마트가 각각 사업본부를 통합하고 대표를 교체하는 등 초강수를 둔 배경은 실적 부진에 있다. 두 회사 모두 2019년 처참한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먼저 롯데쇼핑은 3분기 누적 기준 매출액은 13조 3080억 원으로, 1년 전에 견줘 1000억 원 넘게 줄었다. 수익성도 크게 악화됐다. 영업이익은 3844억 원으로 전년 같은 기간에 비해 25% 넘게 감소했다. 롯데마트의 영업이익이 3분기에 전년보다 61% 급감한 영향이 가장 컸다.
신세계그룹의 캐시카우였던 이마트는 어닝쇼크를 기록했다. 올해 2분기 회사 창립 이래 처음으로 적자를 냈다. 지난 3분기 연결기준 매출이 5조 633억 원으로 전년 같은 기간보다 7% 늘어나 흑자 전환에 성공했지만, 영업이익은 1년 전보다 40.3% 줄어든 1162억 원을 기록했다. 별도 기준으로는 총매출이 전년 같은 기간보다 4.1% 감소한 3조 9127억 원, 영업이익은 36.4% 뒷걸음질 친 1261억 원이다.
신세계그룹의 이마트는 회사 창립 이래 처음으로 외부인사를 대표로 영입했다. 사진=박정훈 기자
이커머스 업계가 성장하는 동안 오프라인 유통업계는 시장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고 현실에 안주했다는 지적을 받는다. 이커머스 업체들이 1인가구 증가, 온라인과 모바일로의 소비패턴 변화에 빠르게 대응했던 것과 달리 오프라인 유통업계 온라인 쇼핑몰은 백화점이나 마트를 보조하는 역할에 그쳤다.
유통업계 관계자는 “출점 제한과 같은 오프라인 유통업계 규제와 해외 이슈 탓에 손발이 묶인 탓이라는 시각도 있지만, 이미 수년 전부터 시장판도 변화는 감지되고 있었다”며 “유통 대기업들도 이커머스 사업에 상당한 관심을 보여왔고, 2019년 특히 변화가 클 것으로 예상됐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전통적인 매장 할인 판매 방식인 ‘초저가 전략’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가까스로 체면치레만 했다”고 강조했다.
롯데와 신세계는 2020년부터는 수장을 교체한 만큼 공격적인 대응을 예고하고 있다. 각각 국내 유통 1인자(롯데)와 오프라인 대형마트 1인자(이마트)로 통하지만 이커머스 업계에서만큼은 도전자 입장이다. 침체에서 벗어나기 위해 총력전을 펼칠 것으로 전망된다.
롯데는 2020년 새해부터 그룹 차원에서 디지털 전환을 본격적으로 추진한다. 주요 유통 계열사를 통합한 애플리케이션 ‘롯데ON’ 론칭이 대표적이다. 지난 4월부터 시범 서비스를 해왔는데 새해 상반기 정식 출범할 계획이다. 롯데그룹 물류와 고객서비스를 통합해 쇼핑 사업 부문 전체 효율성을 끌어올릴 방침이다.
전환 작업의 중책은 조영제 롯데쇼핑 이커머스사업부장 전무가 맡게 될 전망이다. 조영제 전무는 롯데지주에서 유통전략을 담당했다. 2011년 롯데백화점의 온라인 플랫폼 ‘엘롯데’도 그의 손에서 나왔다. 또 지주사 전략실이 경영전략 수립뿐만 아니라 M&A(인수·합병) 업무도 진행해왔던 만큼 롯데가 2020년 이커머스 업계, 또는 관련 부문 M&A에 나설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2019년 한 해 롯데쇼핑은 티몬과 인수설로 꾸준히 연결돼 왔다.
신세계그룹은 ‘SSG닷컴’을 중심으로 사업을 확대한다. 2018년 이마트와 신세계에서 각각 온라인몰을 분할·합병해 출범한 SSG닷컴은 ‘그룹의 미래’로 통하며 온라인 사업을 책임지고 있다. SSG닷컴은 2019년 정기인사에서 상품과 SCM운영, 플랫폼 개발 담당 임원 등 총 3명을 임원으로 승진시켰다. 2018년 인사에선 상무보 승진자는 1명에 그쳤다. 사실상 온라인 사업 전 분야에 힘을 실은 셈이다.
물류에도 경쟁력을 키운다. 당장 12월 말, 경기도 김포에 세 번째 온라인 전용 물류센터 ‘네오(NE.O) 003’을 연다. 네오는 신세계의 이커머스 통합 플랫폼과 각 유통채널 온라인몰의 주문을 담당한다. 이커머스 업체들이 선점한 새벽배송에 더해 신세계그룹의 주무기인 신선식품을 앞세울 계획이다. 신세계그룹 관계자에 따르면 SSG닷컴에 2021년까지 약 1조 원을 투자한다. SSG닷컴은 추가 물류센터 부지 등을 물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롯데와 신세계가 이커머스에 사활을 거는 데 우려의 시각도 있다. 2023년 이커머스 시장 규모가 200조 원에 달하는 등 앞으로도 성장가도를 달릴 것으로 전망되지만, 업계 전체가 만성 적자에 시달리고 있어 수익성은 담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쿠팡과 티몬, 위메프 등 주요 이커머스 업체들은 2019년 각각 1조 원, 1200억 원, 390억 원대 적자를 냈다. 적자폭은 매년 커지고 있다. 새해에도 비슷한 수준을 유지할 것으로 시장은 관측한다.
아직까지 확실한 1위가 없는 이커머스 업계의 과도한 출혈경쟁이 원인인데, 지금까지 롯데와 신세계가 구상하고 있는 온라인 사업 밑그림도 앞서의 이커머스 업체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유통업계 다른 관계자는 “롯데와 신세계는 오프라인에서 쌓은 유통 노하우와 물류시스템, 빅데이터 등을 활용하면 충분히 시장 판도를 바꿀 만한 경쟁력은 있다”면서도 “다만 팔면 팔수록 손해 보는 이커머스 시장 특성상 자칫 수익성 측면에서 발목을 잡힐 수 있다. 달라진 시장 상황에 대응하다 적자를 피하지 못하는 딜레마에 빠지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