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춘재의 중학교 졸업 사진. 이춘재가 화성 연쇄살인사건 범인으로 밝혀지자 당시 한국 사회 모든 이슈를 빨아들이던 ‘조국 사태’를 덮으려는 기획이라는 음모론까지 등장했었다.
2019년 9월 18일 화성 연쇄살인사건 범인이 특정됐다. 3차, 5차, 9차 사건 현장 유류품에서 이춘재 DNA가 검출됐다. 갑작스럽고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당시 한국 사회 모든 이슈를 빨아들이던 ‘조국 사태’를 덮으려는 기획이라는 음모론까지 등장했다. 그의 범행이 화성은 물론이고 그 이외의 지역에서도 벌어진 만큼 이제는 ‘이춘재 연쇄살인사건’이라 부르는 게 더 적합해 보인다.
‘이춘재 연쇄살인사건’은 1986년 9월부터 1991년 4월까지 경기도 화성군 일대에서 10차례에 걸쳐 여성 10명이 희생된 연쇄살인 사건을 말한다. 당시 화성은 물론 대한민국을 공포로 몰아넣은 이 사건 범인은 연인원 205만여 명이라는 막대한 경찰력 동원에도 잡히지 않았다. 세계 100대 살인사건으로 꼽힐 정도로 극악 범죄였다.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 자백한 이춘재
이춘재는 1994년 1월 당시 20세이던 처제를 강간살해한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부산교도소에 수감 중이었다. 1급 모범수 생활을 이어가며 가석방을 노리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의 동생은 주변 사람들에게 “형이 곧 가석방될 것”이라고 말하고 다녔다고 한다.
2019년 10월 2일 이춘재는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며 경찰에 범행 일체를 자백했다. 1차부터 10차 사건은 물론 추가로 4건의 살인과 30여 건의 성범죄를 털어놨다. 그의 살인은 총 14건으로 늘었다. 경찰은 10월 14일 이춘재를 피의자로 정식 입건했다.
이춘재는 월급날이면 어머니에게 용돈을 챙겨주는 살뜰한 아들이자 이웃사촌을 죽이는 또 다른 얼굴을 가진 살인마였다. 10차례 연쇄살인 가운데 8건은 이춘재 집이 있는 화성군 태안읍 진안1리(현재 화성시 진안동)에서 불과 반경 3km 안에서 발생했다. 6차 사건 발생 장소는 직선거리로 불과 50m도 채 안 되는 뒷산이었다.
집안에서 살해된 8차 사건(모방 범죄로 알려졌지만 이춘재가 자신의 소행이라고 밝힘) 피해자인 중학생 박 아무개 양(14)은 말 그대로 진안1리 한동네에 살던 이웃 동생이었다. 이춘재는 범행 뒤 자신의 집 창문 너머로 살해 현장을 바라보며 비뚤어진 성적 욕구를 충족시켰을지도 모른다.
#뒤바뀐 범인, 8차 사건의 진실 그리고 재심
이춘재가 1988년 9월 16일 발생한 8차 사건을 자신의 소행이라고 밝히면서 이춘재 사건은 또 다른 국면을 맞는다. 8차 사건은 가정집에서 자고 있던 박 아무개 양(14)이 강간살해당한 사건이다.
지난 11월 13일 오전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수원지방법원에서 화성연쇄살인 8차 사건으로 복역 후 출소한 윤 아무개 씨(52)와 이주희 변호사, 박준영 변호사, 김칠준 변호사가 재심청구서를 제출하기 위해 이동하고 있다. 사진=최준필 기자
8차 사건 범인으로 무기징역을 받고 20년 옥살이를 한 사람이 있었다. 윤 아무개 씨의 억울한 목소리는 그제야 세상의 주목을 받는다. 그는 잠을 재우지 않고 쪼그려 뛰기를 시키는 등 경찰의 가혹행위에 못 이겨 허위 자백했다고 주장했다. 세 살 때 소아마비를 앓아 한쪽 다리를 절뚝이던 윤 씨였다. 몸이 불편한 그가 담장을 넘어 범행을 저질렀다는 사실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이춘재 진술은 구체적이었다. 범인이 아니면 알기 어려운 ‘비밀의 폭로’가 포함돼 있었다. 이춘재는 당시 피해자 박 양을 강간한 뒤 새 속옷을 입혔다고 진술했다. 사체로 발견된 박 양은 자신의 속옷이 아닌 다른 속옷을 입고 있었다. 이춘재가 범인이라는 결정적 증거였다. 결국 윤 씨는 변호인단(박준영 김칠준 이주희)의 도움을 받아 지난 11월 13일 수원지방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억울한 누명을 벗겨달란 윤 씨의 호소에 이제야 모두가 귀기울이게 됐다.
#현장에서 발견된 음모 중 남은 2가닥이 관건
윤 씨를 범인으로 만든 핵심 증거는 사건 현장에서 나온 음모 8가닥이었다. 경찰은 당시 최신 수사기법인 ‘방사성 동위원소 감별법’으로 윤 씨를 범인으로 특정했다.
윤 씨가 1989년 7월 자백한 직후 그가 작성한 진술서. 자필 진술서는 총 3건, A4용지 10쪽 분량이다. 사진=이종현 기자
8차 사건을 직접 조사하겠다고 나선 검찰은 지난 12월 23일 브리핑을 열고 현장에서 나온 음모가 조작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발표했다. 쉽게 말해 윤 씨 음모를 채취한 경찰이 현장에서 채취한 음모라고 속였을 가능성이 제기된 것이다. 이에 경찰은 그런 일은 없다고 반박했다.
경찰은 당시 윤 씨를 범인으로 오해한 이유에 대해서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연구자가 측정값을 임의로 판단한 ‘오류’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수사권 조정 문제를 두고 갈등을 빚어온 검찰과 경찰은 현재 8차 사건을 두고 치열한 대립을 보여주고 있다.
당시 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8가닥 음모 가운데 2가닥은 국가기록원 나라기록관에 보관돼 있다. 음모 2가닥을 분석하면 실체적 진실에 다가설 실마리를 얻게 된다. 물론 음모 2가닥에서 윤 씨 DNA가 나온다고 하더라도 윤 씨의 범행이라고 단정할 순 없다. 여전히 현장에서 나온 음모가 아닌 바꿔치기 된 것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경찰은 음모 2가닥을 압수수색하겠다고 법원에 영장을 신청했지만 기각됐다. 검찰은 12월 27일 현재 같은 영장을 법원에 신청해둔 상태다.
#재심 법정 서겠다는 이춘재 정말 고백할까
앞서 말했지만 이춘재는 이미 처벌할 수 없는 범인이다. 현행법에선 이춘재 범죄의 공소시효가 지났다. 2015년 7월 형사소송법 개정안인 ‘태완이법’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살인죄 공소시효는 사라졌지만 소급적용은 되지 않았다. 2001년 8월 이전 살인죄는 처벌받지 않는다.
하지만 여전히 이춘재 입에 모두의 이목이 쏠린다. 이춘재는 경찰에 8차 사건 재심 재판에 나올 뜻을 밝혔다. 이춘재는 경찰 조사에 “윤 씨에게 미안하다”며 “재심이 개시되면 법정에 나갈 의향이 있다”고 했다. 이춘재를 처벌할 순 없지만 이춘재가 법정이라는 공개적인 자리에서 자신의 범행을 시인한다면 ‘이춘재 사건’의 실체적 진실은 법정을 통해 공식적으로 기록되는 셈이다.
이춘재에게 농락당할 우려도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당시 핵심 수사 관계자는 일요신문과 인터뷰에서 “이춘재가 법정에 서서 말을 뒤집을 수도 있다. 그땐 검찰이랑 경찰에게 얼마나 망신일지 모르겠다”며 “지금 이춘재에게 검경이 놀아나는 것”이라고 했다.
일요신문은 장기간 이춘재 연쇄살인사건 취재를 바탕으로 앞으로 8차 사건 재심 공판을 보도하고, 윤 씨와 인터뷰를 이어갈 예정이다. 나아가 당시 수사 형사들의 이야기를 듣고 실체적 진실을 다각도로 담을 계획이다.
그동안 일요신문은 여러 건의 재심 사건을 심층 탐사보도 해왔으며 2019년에는 ‘낙동강변 2인조 살인사건’의 재심 공판 과정을 중점적으로 보도했고 비로소 그 끝이 보이고 있다. 낙동강변 사건의 재심 개시 여부는 2020년 1월 초 결론이 날 전망이다.
박현광 기자 mua123@ilyo.co.kr
화성 초등생 실종 사건 유골은 대체 어디에… 1989년 7월 발생한 ‘화성 초등생 실종 사건’이 이춘재 소행으로 밝혀지면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이어 경찰 조사 결과 당시 수사 형사들이 초등생 유골과 가방이나 속옷 등 유류품을 발견하고도 유가족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부실 수사 논란이 일었다. 화성 초등생 실종 사건 유골 수색 사흘 동안 아무것도 나오지 않자 닷새째 되는 10월 5일부터 수색 속도를 내기 위해 굴삭기를 동원했다. 사진=박현광 기자 당시 마을 주민에 따르면 이 아무개 화성경찰서 형사계장과 이 아무개 형사는 줄넘기에 묶인 손목뼈를 발견했지만 이를 덮었다. 이들은 초등생을 실종 처리하고 수사를 종결했다. 앞서 이춘재는 초등생 손목을 줄넘기로 묶어 유기했다고 진술했다. 경기남부경찰청은 지난 12월 17일 기자회견을 열고 이 형사계장과 이 형사를 입건해 사건의 진실을 규명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초등생 유골이나 유류품이 발견되기는 어려울 전망이다. 앞서 경찰은 11월 2일부터 일주일 동안 하루 100명이 넘는 인력을 동원해 초등생 시신 유기 장소로 추정되는 공원을 수색했지만 성과를 얻지 못했다. 당시 핵심 수사 관계자에 따르면, 초등생의 유골과 유류품이 발견된 장소에 현재는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박현광 기자 mua123@ily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