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박정환이 나아간다. 이제 이세돌은 추억이다. 사진=박주성 제공
#이세돌과 추억, 4년 전 이야기
당시 박정환은 한국 랭킹 1위를 2년 넘게 유지하고 있었다. 물론 국내 대회에선 놀라운 승률을 기록했다. 국내 기사들에겐 공포의 대상이었지만, 그게 세계무대에서 잘 통하지 않았다. 일부 팬들은 과거 이창호, 이세돌과 비교하며 ‘국내용’이라고 비난했다.
그 국내에서도 가끔 이세돌에게 발목이 잡혔다. 물론 세계대회 8강, 4강까지 잘 오르는 초일류였다. 결정적 한 방이 부족했다. 번번이 중국기사에게 막혔다. 두 번이나 준우승에 머문 응씨배에서 타격이 컸다. 첫 출전부터 결승에 올랐지만, 세 살 어린 판팅위에게 1-3으로 패했다. 4년 후 2016년 벌어진 8회 대회는 동갑내기 탕웨이싱에게 2-3으로 졌다. 응씨배 우승은 박정환에게 아직도 남겨진 숙제다.
2016년 1월 벌어진 명인전 결승 5번기. 박정환(왼쪽)과 이세돌. 사진=박주성 제공
대관식(?)을 치른 지 꽤 됐는데 황제는 여전히 이세돌인 느낌이었다. 통산 전적은 30전 18승 12패로 이세돌이 조금 앞선다. 여기서 결승전 번기승부도 다섯 번이나 있었다. 당시 박정환이 이세돌을 넘어서지 못했다고 평하는 건 2016년 1월에 열린 명인전 결승 5번기 때문이다.
몽백합배에서 커제와 격전을 치르고 돌아온 이세돌은 마치 한풀이하듯 박정환을 몰아붙였다. 결승 1, 2국 모두 초반부터 대마를 한 움큼씩 뜯었다. 초반은 폭풍처럼 사나웠고, 중반 수읽기는 차원이 다른 경지였다. 박정환은 3국에서 겨우 한 판을 건졌다. 그러나 이세돌이 다시 4국에서 다시 무시무시한 힘을 보여주며 3-1로 명인타이틀을 쥐고 정상에 복귀했다.
명인을 헌납한 랭킹 1위를 ‘일인자’라 부를 순 없었다. 사실 이런 묘한 상황은 과거(이세돌-이창호)에도 있었고 현재(신진서-박정환)도 진행 중이다. 이세돌 또한 타이틀을 다수 차지하고도 유독 이창호만 압도하지 못해 안달복달한 기간이 있었다. 지금 한국바둑계 중심에 있는 신진서에게 박정환도 마찬가지 존재다. 현재 공식 대국에선 박정환이 신진서를 상대로 9연승 중이다. 통산전적도 박정환이 15승 4패로 앞선다. 최소한 2019년은 신진서가 랭킹 1위에 오르고도 ‘내가 최고다’라고 외칠 수 없었다. 4년 전 박정환이 그랬다.
2019년 국내 대회는 박정환이 평정했다. 신진서와 대결한 용성전 결승복기 모습. 사진=박주성 제공
#2020년 ‘박정환 시대’를 열어라
최근 박정환이 많이 달라졌다. 뭐라고 집어서 말하긴 어렵지만, 분위기 자체가 묘하게 변했다. 과거 바둑 수에 골몰하던 어두운 고시생 이미지가 있었다. 지금은 벚꽃이 피기만 기다리는 합격자 같다. 여유가 뿜어 나온다. 자주 그리고 아주 마음 편한 웃음을 보여준다. 나이가 들어서일까? 그럴 수도 있겠다. 1993년생이다. 박정환 하면 입단 당시 어린 소년 이미지를 기억하는 바둑팬이 많겠지만, 그도 이미 20대 후반이다. 13년 차 프로기사로 우승횟수만 30회에 달한다.
성적은 부침 없이 꾸준하다. 올해 세계무대에선 전반기 활약이 돋보였다. 하세배 우승, 월드바둑챔피언십 우승, 춘란배 우승. 하반기는 LG배 결승까지 올랐다. 지난 삼성화재배와 몽백합배에서 좀 주춤했다고 묻자 박정환은 “더 노력하겠다. 앞으로 잘하겠다”라면서 부드럽게 웃었다. 시간이 많이 흘렀으니 이제는 말할 수 있을까? 앞서 언급한 명인전 5번기에서 느낀 이세돌에 대해서도 물어봤다. 가장 인상 깊은 패배였다.
박정환은 “당시 나도 실력에선 밀리진 않았다. 이세돌 사범님은 공격과 타이밍, 승부호흡이 남다르다. 번뜩인다. 이런 감각은 ‘타고 났다’라고 느껴진다. 내가 많이 배웠다”라고 말했다. “그때 이세돌에게 전수받은 노하우로 요즘 신진서를 똑같이 괴롭히는 거군요”라고 농담을 던지자 답은 없고, 얼굴만 하회탈로 변했다.
2019년 바둑TV배와 용성전 결승에서 박정환은 신진서를 압도했다. 2020년은 LG배 결승 3번기에서 재격돌할 예정이다. 박정환은 무심한 표정으로 “당연히 양보는 없다. 최선을 다하겠다”라고 말한다.
2013년 열린 응씨배 결승 최종국. 첫 출전해 결승에 올랐지만, 판팅위에게 패해 준우승을 했다. 사진=박주성 제공
2016년 응씨배 두 번째 도전. 결승에 올랐지만, 탕웨이싱에게 패해 다시 준우승에 머물렀다. 사진=박주성 제공
2020년은 응씨배도 열리는 해다. 기자가 “4년마다 결승전에서 패해 괴로워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기 너무 힘들었다”라고 투덜대자 박정환은 “새해 응씨배는 편한 마음으로 즐기겠다. 처음에 판팅위에게 질 때는 크게 아프진 않았다. 나이도 어렸고, 앞으로 기회가 많다고 생각했다. 두 번째는 이상하게 부담감을 많이 느꼈다. 특히 결승 최종국이 심했다. 그 대국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5국에서 패한 후엔 너무 괴로웠다. 이후 긴 시간을 아무것도 못 하고 아픔이 지나가기만 기다렸다. 최근엔 승부에 대한 느낌이 좀 달라져서 다가올 응씨배에선 편하게 내 바둑을 둘 수 있을 것 같다”라고 말한다.
졌을 때 술도 마시는지 묻자 “주량은 소주 두 병 정도다. 주종은 맥주를 더 선호한다. 승부에 영향을 준다고 생각해 대국 전날은 거의 입에 대지 않는다”라고 답했다.
질문에 수위를 조금 더 올려봤다. “곧 바둑대상 시상식이 열린다. 지난해엔 신진서 9단이 최우수기사상과 메달(순금 10돈)을 가져갔다. 박정환 9단은 미용실에서 머리까지 새로 했는데 공로상 하나 받지 못했다. 최근 분위기를 살피면 올해 MVP는 최정 9단이 선정될 가능성이 아주 높다고 한다.”
박정환은 “작년에 미용실 간 건 사실이다. 수상 여부는 상관없었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바둑계 중요한 행사다. 나이에 걸맞게 좀 꾸미고 간다는 생각이었다. 물론 시상식에 참석하면 대상을 받을 기대감도 품게 된다. 이번에 최정 9단이 받아도 괜찮다. 충분한 자격이 있다”라면서 “모두가 ‘최우수기사상은 박정환밖에 없다’라고 인정할 때 받아야 나도 마음이 편하다. 2019년은 내가 생각해도 부족한 면이 많았다. 중국과 대결에서 더 힘을 내야한다”라는 말을 더했다.
LG배 결승전이 2020년 2월에 열린다. 포즈를 취하고 있는 신진서(왼쪽)와 박정환. 사진=한국기원
미래 계획을 묻자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좋아하는 바둑만 두며 살 수 있어서 정말 행복했다. 2~3년 승부에 주력해 더 성과를 내고 싶다. 이후 30대가 되면 내 생활을 잘 이해해주는 분을 만나 가정도 꾸리고 싶다”라고 말했다. 짓궂은 질문에도 매번 입 꼬리를 살짝 올리는 순수한 미소가 아름다웠다. 바둑에 대한 절절한 사랑도 느꼈다. 20대 중반을 넘긴 젊음, 그 자체로 빛나는 시기다.
박주성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