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이나 변화에 뒤처지지 않아야 하는 제조업이나 서비스업과 달리 금융권의 최우선 가치와 과제는 ‘안전’이다. 고객의 돈을 직접 위탁받아 관리하는 곳이다 보니 사고가 터지면 여파가 걷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보니 금융권은 전체적으로 보수적인 분위기가 강할 수밖에 없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보험권은 CEO를 잘 바꾸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장기계약 위주인 보험업 특성상 성과가 나려면 최소한 5년은 필요하다는 것이 상식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보험업권에서 사장이 바뀌는 회사가 여럿 등장해 관심을 끌고 있다.
한화생명은 지난 11월 30일자로 차남규 한화생명 대표이사 부회장이 퇴임했다고 2일 공시했다. 서울 여의도 63빌딩 앞 한화생명 간판. 사진=우태윤 기자
보험사 중 가장 먼저 CEO 교체 바람의 신호탄을 쏘아올린 곳은 새로운 체제의 시작을 알린 한화생명이다. 2020년 3월 임기 만료를 앞두고 있던 차남규 전 부회장이 지난 11월 30일 용퇴를 선언하면서 예상보다 빨리 경영진 변화가 이뤄지게 됐다.
한화생명은 지난 12월 2일 대표이사 변경 공시를 통해 여승주 사장 단독체제 전환을 공식화했다. 한화생명은 여승주 사장 단독체제 돌입 후 7일 만에 인사 및 조직개편을 통해 ‘여승주 호’의 정식 출범을 위한 전열을 가다듬었다. 또한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의 차남인 김동원 한화생명 상무가 자사주 30만 주를 취득하면서 세대교체에 힘을 실었다.
한화생명의 바통을 이어받은 곳은 NH농협금융이다. 농협은 지난 12월 6일 임원후보추천위원회를 열어 농협손해보험 대표이사에 최창수 농협금융지주 경영기획부문장을 신규 선임했다. 최창수 대표 체제는 오는 2020년 1월 1일 공식 출범한다.
최창수 농협금융지주 경영기획부문장은 1986년 농협중앙회 입사를 시작으로 기획조정실 경영전략팀 팀장, 미래전략혁신팀 팀장, 기획실 구조개혁팀 팀장, 미래전략부 경영전략 TF단 단장, 비서실 실장 등을 거친 기획과 전략의 귀재다. 농협금융 전체 디지털 전환 로드맵 수립과 자회사 자본적정성 강화를 위한 증자 단행 등이 대표적인 성과다. 최창수 예비 대표가 취임하면 실적 개선을 최우선 목표로 두고 경영에 나설 것으로 전망된다.
반면 같은 농협금융 계열인 농협생명은 홍재은 대표 체제를 유지하기로 했다. 홍 대표는 보험업계 불황에도 불구하고 흑자전환에 성공한 점이 연임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금융권은 보고 있다.
AIA생명은 지난 12월 6일 피터 정(Peter Chung) 신임 대표의 선임을 발표했다. 2020년 1월 1일 취임하는 피터 정 신임 사장은 지난 2016년 4월부터 2017년 11월까지 한국 AIA생명에서 최고전략마케팅책임자로 재직해 한국을 잘 알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AIA 헬스케어 프로그램인 ‘AIA바이탈리티’ 서비스를 주도했다.
처브라이프생명은 지난 12월 12일 알버트 김 신임 대표를 선임했다. 대표로 선임된 알버트 김은 한국과 미국을 통틀어 25년의 보험업계 근무 경력을 가지고 있는 베테랑이다. 이 기간 동안 그는 AIG, Allianz 및 AXA에서 생명보험, 손해보험을 두루 거치며 다양한 중책을 맡아왔다.
JKL파트너스로 대주주가 변경된 롯데손해보험도 1973년생인 최원진 대표이사가 선임됐다. 최연소 보험사 CEO인 최 대표는 보험사를 넘어 금융권 전체에 변화의 바람을 예고했다는 평가다. 그는 취임 후 결재판을 없애고 이메일 보고를 전면 실시하는가 하면 신속한 의사결정을 위해 기존조직을 대폭 축소하는 개편을 단행하기도 했다.
여기에다 금융소비자보호 총괄책임자(CCO)에 전연희 상무보를 승진시켜 롯데손보 창사 이래 첫 여성 임원이 나오기도 했다. 2020년 본격 영업에 나서는 온라인 전용보험사 캐롯손해보험의 경우 1972년생인 정영호 대표이사를 중심으로 젊은 조직을 꾸렸다.
반면 KB금융 계열인 KB손보와 KB생명은 올해 말 임기 만료 예정인 두 대표를 모두 연임시키며 안정에 무게를 실었다. KB금융은 지난 12월 20일 계열사대표이사후보추천위원회 회의를 개최해 KB손보와 KB생명 대표이사 후보로 각각 양종희, 허정수 현 사장을 선정했다. 내실 위주의 가치경영을 추진하고 있는 양 사장은 4연임에 성공했다. 양 사장은 KB손보 출범 다음 해인 2016년 3월 대표이사 취임 이후 최초 임기 2년을 마친 뒤 1년씩 두 차례 연임했다. 허 사장은 양 사장과 함께 LIG손보 인수를 지휘했던 KB금융의 ‘인수합병 후 통합관리(PMI)’ 전문가다. 특히 허 사장은 KB금융의 내년 생명보험사 인수·합병(M&A) 추진에 따른 역할이 주목받고 있다.
12월 26일 현재 아직 거취가 최종 결정되지 않은 CEO들도 있다. 이들 중 금융권의 시선이 집중된 곳은 현대해상이다. 현대해상 이철영 부회장은 3연임을 통해 총 10년간 대표이사직을 수행해온 보험업계 대표 장수 CEO다. 2007년 현대해상 대표로 취임한 그는 2010년부터 현대해상자동차 손해사정 이사회 의장직을 지내다 2013년 현대해상 대표로 다시 복귀했다.
그런데 북귀 당시 이 부회장과 함께 각자 대표로 회사를 이끌어온 박찬종 사장이 지난 7월 물러났다. 여기에 지난 11월 말 임원 인사에서 조용일 사장과 이성재 부사장이 총괄로 선임되면서 이철영 부회장의 교체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 현대해상은 올해 3분기 당기순이익이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8.3% 감소하고 영업이익도 20.70% 줄어드는 등 실적이 좋지 못한 상황이다.
금융권 관계자는 “보험사 CEO는 한번 맡기면 오래가는 특성이 있는데, 시기적으로 교체주기가 도래한 데다 경영환경이 급속도로 나빠졌다는 점이 겹치면서 세대교체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이영복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