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릴섭지와 김수빈 선수가 메인 매치에 앞서 코스튬 플레이로 경기를 치르고 있다. 사진=박현광 기자
12월 21일, 65번째이자 2019년 마지막 ‘슈퍼노바’ 매치가 열렸다. 슈퍼노바는 한국 프로레슬링 명맥을 이어오는 대회 가운데 하나다. 이날 매치에 참여한 선수는 총 5명, 관객은 총 8명이었다. 열기만큼은 메이저 프로레슬링 대회인 WWE(World Wrestling Entertainment) 못지않았다. 관객 가운데 일본인 여성은 이 경기를 보러 일본에서 왔을 정도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에 위치한 30평(99㎡) 남짓한 컨테이너에 긴장감이 꽉 들어찼다.
이날 매치는 코스튬 플레이로 시작했다. 다른 선수의 옷과 기술을 따라 하는 경기로, 일종의 팬 서비스였다. 일대일 메인 매치 두 경기가 이어졌다. 각각 챔피언 벨트가 딸린 타이틀도 걸렸다. 팬들은 선수들 동작 하나하나에 열광했다. 로프에서 뛰어 내리고, 상대방을 들어 돌려 찍고, 촙(Chop) 공격에 선수들은 가슴과 등짝이 시뻘게졌지만 팬들 환호에 웃음 지었다. 오후 6시 30분에 시작한 경기는 저녁 9시가 다 돼서야 끝났다. 여전히 거친 숨을 잠재우지 못하면서도 선수들은 링 아래로 내려와 팬들과 대화를 나눴다. “와줘서 고맙습니다.”
김남석 대표가 코스튬 플레이에 깜짝 참가해 관객들을 즐겁게 하고 있다. 사진=박현광 기자
슈퍼노바 매치는 한 달에 한 번 셋째 주 토요일에 치러진다. 이 매치를 여는 단체는 PWF(Pro Wrestling Fit)다. 소속 프로레슬러는 5명. 가끔 타 단체나 프리랜서 프로레슬러를 초청하기도 한다. 입장료는 1만 원, 관객이 많을 땐 30명까지도 오지만 수익을 내긴 턱없이 부족하다.
현직 프로레슬러이자 PWF 대표인 김남석 대표(34)는 2014년 1월부터 꼬박 6년 동안 지치지 않고 대회를 개최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무작정 이왕표체육관을 찾아가 프로레슬링을 시작한 그였다. 김 대표는 점점 시들해진 인기를 어떻게든 살려보고 싶었다. 아니, 명맥이라도 유지하고 싶었다.
한국 프로레슬링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PWF(Pro Wrestling Fit)는 매달 한 번 경기를 개최한다. 벌써 65번째 매치다. 꼬박 6년 동안 지치지 않은 결과다. 사진=박현광 기자
시작이 쉽진 않았다. 일본에서 선수생활을 하다가 한국으로 건너왔을 때 프로레슬링 시장은 황무지와 같았다. 후원사를 찾긴 어려웠다. 일단 사비를 들여 컨테이너를 임대했다. 프로레슬링용 무대를 제작하는 업체가 없어 직접 설계해 공장에 제작을 맡겼다. 프로레슬링 무대는 일반 권투용 무대와 다르다. 몸으로 떨어지는 동작이 많은 탓에 충격 흡수가 관건이다. 로프의 탄성도 다르다. 로프를 타기 위해선 특수 제작할 수밖에 없었다. 김 대표는 인터넷 블로그에 글을 올려 선수들을 모집했다. 1년 가까이 훈련시킨 뒤 대회를 열기 시작했다.
소속 프로레슬러들은 각자 생업이 있다. 직업군이 다양하다. 제약회사 영업사원부터 에어컨 설치 기사, 농부, 바리스타도 있다. 이들은 프로레슬링이 좋은, 그야말로 프로레슬링에 ‘미친’ 사람들이다. 7년 전 김남석 대표가 인터넷 블로그에 올린 프로레슬러 모집 공고를 보고 무작정 지원해서 여기까지 왔다. 김 대표와 같이 그 전부터 프로레슬러를 꿈꾸며 훈련하던 사람도 있지만 앞구르기도 못 하던 사람도 있었다. 이들은 주말마다 한 번씩 모여 합을 맞추는 훈련을 한다. 기초체력 훈련은 주중에 각자 시간을 내서 한다.
정하민 선수와 하다운 선수가 경기를 치르고 있다. 이 둘은 레슬링이 좋아 일본 유학을 가거나 일본어를 배웠을 정도로 애정이 남다르다. 사진=박현광 기자
베드릴섭지 선수(30)는 경남 거제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올라온다. 집에는 아직까지 비밀이다. 걸렸다간 ‘큰일’난다. 훈련 때마다 친구 집에 놀러 가거나 출장 핑계를 댄다. 버스를 타고 장장 4시간이 걸리지만 좋아서 하는 일이라 즐겁다. 김수빈 선수(34)는 ‘학교 다닐 때 책상 미뤄두고 교실 뒤편에서 헤드록을 걸며 놀았던’ 기억을 간직하고 살다가 생일에 프로레슬러 모집에 지원했다. 인생에 한 번쯤 가슴 뛰는 일을 하고 싶었다. 스스로에게 준 선물이었다. 평소엔 바리스타다.
정하민 선수는 어릴 적 비디오테이프로 프로레슬링을 보면서 꿈을 키웠다. 일본에서 활동하고 싶어 일본어까지 배웠다. 하다운 선수도 마찬가지다.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일본으로 넘어가 무작정 프로레슬링을 시작했다.
좋아서 하는 오합지졸처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실력 또한 수준급이다. 현재 프로레슬링 인기가 높은 나라는 미국, 다음으로 일본과 멕시코다. 일본은 점점 인기가 높아지는 추세다. PWF 소속 선수들은 일본으로 초청 경기를 다닌다. 그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는다는 뜻이다.
프로레슬링에선 진다고 꼭 지는 게 아니다. 프로레슬링에선 계속 지는데 인기는 계속 올라가는 경우도 많다. 사진=박현광 기자
김남석 대표는 “WWE에서 활약한 맷사이달과 세미나를 한 적이 있다. 미국에서 하는 훈련과 우리가 하는 훈련이 다르지 않다는 걸 알았다. 일본에서도 경계심을 느낄 만큼 우리 실력이 올라왔다. 우리 선수들의 경기는 돈을 받고 팔아도 될 정도라고 자신한다”고 설명했다.
프로레슬링에서 ‘실력이 좋다’는 말은 ‘기술이 좋다’는 뜻과는 조금 다르다. 기술과 체력은 기본이다. 그것만으론 실력을 인정받지도 스타가 되지 못한다. 무대를 디자인하는 능력과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능력이 중요하다. 김남석 대표의 말을 빌리자면 ‘이타심’과 ‘쇼맨십’이다.
선수들은 경기를 시작 전에 모여 2~3시간 경기를 ‘디자인’한다. 상대 선수와 어떤 기술을 어떻게 쓸지 합을 맞춘다. 이때 서로 각자만 돋보이려고 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 욕심을 내다보면 경기의 재미가 반감된다. 이타심이 필요한 때다. 김 대표는 “꼭 배려를 잘하거나 이타심이 큰 선수들이 세계적인 프로레슬러가 되는 건 아니지만 세계적인 프로레슬러 중에 이기적인 선수는 없다”고 강조했다.
김수빈 선수가 로프에서 날아올라 베드릴섭지를 공격하고 있다. 한국 선수들의 기술은 수준급이라고 한다. 사진=박현광 기자
프로레슬링에선 진다고 꼭 지는 게 아니다. 프로레슬링에선 계속 지는데 인기는 계속 올라가는 경우도 많다. 승패는 선수들끼리 결정하기도 하지만 최종 결정은 보통 소속 단체의 장이 내린다. 선수들은 경기 전 승패를 70% 정도 결정하고 들어간다. 물론 상황에 따라 팬들의 반응에 따라 승패가 달라지기도 하지만 뒤바뀌는 경우는 드물다.
이때 지는 선수는 최대한 ‘맛깔나게’, ‘열심히’ 져야 한다. 그래야 팬들의 인기를 얻고 자신만의 ‘히스토리’를 만들 수 있다. 결국 스타성을 찾으면 팬과 단체장의 인정을 받고, 이기는 선수가 될 수 있다. 물론 무엇보다 열심히 해야 한다. 절박함과 절실함이 묻어나는 진심이 느껴질 때 팬들은 마음을 준다.
베드릴섭지 선수가 쓰러져 있는 김수빈 선수에게 피니시 공격을 가하고 있다. 사진=박현광 기자
그는 한국 나이로 35세다. 더 늦기 전에 미국 무대에 도전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어릴 적부터 꿈꿔왔던 일이지만,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일본에서 선수 생활을 하다가 한국으로 건너와 7년째 고군분투하면서 ‘타이틀’이 필요하단 생각을 했다. 미국에 진출해 인기를 얻으면 한국 프로레슬링을 부흥할 수 있을 거란 희망을 안고 있는 셈이다. PWF의 슈퍼노바는 계속될 예정이다. 조금씩 도와주던 스폰서 기업이 김 대표를 대신해 운영한다.
이날 경기가 끝나자 선수들과 팬들은 서로 고마움을 전했다. 선수는 팬에게 내가 좋아하는 레슬링 보러 와줘서 고맙다고 했고 팬은 선수에게 내가 좋아하는 레슬링 볼 수 있게 해줘서 고맙다고 했다.
신혼의 단꿈을 맛보고 있는 정하민 선수는 “좋아서 하는 거다. 좋으니까. 힘들어도 팬들이 환호해줄 때가 가장 좋다”며 “더 많은 팬들이 보러 와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남석 대표는 “매일 매일이 도전이다. 힘들지만 좋아하는 거니까 그냥 계속하는 거다. 좋아하는 건데 어떻게 그만둘 수가 있겠나”라며 “프로레슬링은 충분한 상업성이 있다. 국내에서 부흥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답했다.
박현광 기자 mua123@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