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대그룹은 최근 수년 동안 AI와 블록체인, 증강·가상현실(AR·VR) 등 대표적인 4차 산업혁명 관련 사업을 두고 옥석가리기를 해왔는데, AI를 주요 사업으로 최종 낙점했다. 세계적으로 AI가 반도체, TV가전, 자율주행 등 분야 경계를 무너뜨리고 부가가치를 만들어 내는 미래 핵심 사업으로 통하고 있어서다. 특히 4대그룹 총수들이 그룹 미래를 걸고 직접 AI 전담조직을 구성하며 AI 연구·개발(R&D) 네트워크 확장을 지휘하고 있는 만큼 2020년부터 AI 관련 사업 확대 발걸음이 더욱 빨라질 것으로 관측된다.
문재인 대통령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등이 지난 4월 30일 오후 경기 화성 삼성전자 화성사업장에서 열린 ‘시스템반도체 비전 선포식’에서 웨이퍼 칩 공개를 위해 버튼을 누르고 있다. 사진=청와대 제공
#시스템 반도체에 ‘사활’ 삼성전자
삼성전자 2020년 반도체 사업의 핵심은 시스템 반도체에 맞춰져 있다. 반도체는 정보를 담는 메모리 반도체와 데이터를 해석, 계산, 처리하는 시스템 메모리(비메모리반도체) 분야로 나뉜다. 삼성은 데이터를 저장하는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 세계 시장 선두를 달리고 있지만 AI, 자율주행차 등 4차 산업혁명 관련 사업의 필수적인 시스템 반도체 분야에서는 뒤처져 있다. 시스템 반도체를 개발할 때 마다 설계도 원본 격인 설계자산(IP)을 가진 업체들에게 로열티를 내야 한다. 제품을 많이 팔면 팔수록 로열티도 그만큼 늘어나는 구조다.
삼성전자는 2019년 ‘반도체 비전 2030’을 발표했다. 2030년까지 133조 원의 막대한 돈을 투자해 시스템 반도체를 기반으로 한 AI 기술을 확보하겠다는 게 골자다. 시스템 반도체 설계도를 가진 업체들을 잠재적 경쟁자로 두고, 새로운 반도체 생태계를 구축하는 게 목표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국정농단 사건 항소심에서 풀려나 경영 재개에 나선 이후 유럽, 북미 등을 오가며 광폭행보를 보여 왔다. 출장 대부분 AI와 관련한 글로벌 석학들과 만나 최신 기술 트렌드를 파악하고 핵심 인력을 영입하는 게 목적이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실제 삼성전자는 이후 AI 관련 인력 영입과 기술 확보 속도를 높이고 있다.
일부 성과는 당장 2020년부터 나올 것으로 관측된다. 삼성전자는 최근 해외 업체에 특허 로열티를 내지 않는 시스템 반도체를 생산하기로 했다. 2세대 5G 이동통신칩을 양산해 새해에 나올 삼성 스마트폰에 넣고, AI 이미지 센서를 향후 생산될 자동차에 적용할 계획이다. 한국인 학자와 미국 UC버클리 학자 세 명을 중심으로 개발된 개방형 IP 시스템을 활용하기로 했다.
미래 AI 분야에서 필수적인 독자 신경망처리장치(NPU)는 삼성전자가 직접 개발하기로 했다. 모바일, 자동차 전장, 데이터센터, 사물인터넷(IoT) 등 전 분야에 적용할 계획이다. NPU(신경망처리장치, Neural Processing Unit) 분야 개발 인력도 2000명 규모로 지금의 10배 이상 확대하기로 했다.
#모빌리티 솔루션 기업을 향해, 현대차
2019년 재계에서 가장 ‘핫’한 인물은 정의선 현대차그룹 수석부회장이었다. “자동차 만드는 비중을 50%로 줄이겠다”고 공언하면서 눈길을 끌었다. 30%는 개인용 항공기, 20%는 로보틱스로 채운다는 계획이다. 자율주행차의 두뇌 역할을 하는 AI 기술을 확보해 자동차 제조 회사를 넘어 ‘스마트 모빌리티 솔루션 제공기업’(Smart Mobility Solution Provider)으로 전환하는 게 목표다. 한 현대차 임원은 “국내 대표적인 보수적 그룹으로 손에 꼽히던 현대차그룹이 어느 곳보다 빠르게 변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정의선 부회장의 ‘비전 선포’를 전후로 그룹 내 AI 전담조직도 구성됐다. 수시채용으로 전환하는 그룹 방침에 따라 AI 관련 인력을 지속적으로 영입하고 있다. 전략기술본부 산하에 ‘인공지능리서치(AIR) 랩’을 신설해 미래차 개발, 모빌리티 서비스 등을 연구하고 있다.
정의선 현대차 수석부회장. 사진=연합뉴스
2025년까지 모빌리티 기술과 전략 투자에 41조 원을 투입하는 ‘현대차 통 큰 투자’의 신호탄을 쐈던 미국 자율주행 전문 기업 앱티브와의 협업은 2020년에 가시화 될 전망이다. 현대차는 지난 9월 앱티브와 조인트벤처(JV)를 만들기로 하고 20억 달러(2조 4000억 원)을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앱티브는 인지시스템, 소프트웨어 알고리즘, 컴퓨팅 플랫폼, 데이터 및 배전 등 업계 최고 수준의 모빌리티 솔루션 포트폴리오를 갖고 있다.
#디지털 혁신에 조직 뜯어 고친 LG그룹
4대그룹의 AI 전략은 지난 7월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과 총수들의 만찬 회동 이후 급물살을 탔다는 관측이 많다. 구광모 LG그룹 회장이 지난 7월 손정의 일본 소프트뱅크 그룹 회장 등과 만찬을 위해 회동 장소로 향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지난 11월 LG그룹은 LG전자와 LG화학, LG유플러스, LG CNS 등 계열사 4곳을 통해 소프트뱅크벤처스가 AI 분야에 투자하기 위해 조성한 3200억 원 규모의 펀드에 200억여 원을 공동 출자했다. 현재 LG는 미국 실리콘밸리에서도 벤처캐피탈 ‘LG테크놀로지벤처스’에서 약 5000억 원을 운용해 현지 스타트업에 투자하고 있다.
이번 투자에는 구광모 LG그룹 회장의 AI 경쟁력 강화에 대한 의지가 상당 부분 반영됐다는 게 재계 시각이다. 구 회장은 그룹 사장단에게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Digital Transformation·디지털 혁신)을 여러차례 강조하고 있다. 사물인터넷(IoT), 클라우드 컴퓨팅, 인공지능(AI), 빅데이터 솔루션 등 정보통신기술(ICT)을 플랫폼으로 활용하는 방식인데, 과거 LG그룹이 해오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경영 스타일이라는 게 회사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딥 체인지의 핵심 동력은 ‘AI’ SK그룹
2019년 경제상황과 그룹 경영환경을 두고 ‘전례 없는 위기’라고 표현한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위기 돌파를 위해 AI와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DT) 등의 혁신기술을 그룹 차원에서 추진하고 있는 ‘딥 체인지(Deep Change)’의 핵심동력으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SK텔레콤이 그룹 AI 전략의 중심에 섰다. 12월 단행한 연말정기인사에서 SK텔레콤을 기존 주력 사업인 ‘이동통신사업(MNO)’과 ICT사업 등을 추진하는 ‘신사업(New Biz)’을 양대 축으로 조직개편을 했다. SK텔레콤 기술 조직은 인공지능(AI)을 중심축으로 통합했다. 분산 운영 중인 AI센터, ICT기술센터, DT(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 센터의 사업별 기술지원 기능을 ‘AIX센터(CTO)’로 통합했다. 새해부터는 인공지능이 SK텔레콤이 추진하는 모든 사업의 핵심으로 기능하게 될 전망이다.
최태원 SK그룹 회장. 사진=SK그룹
4대그룹의 AI 전략은 지난 7월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과 총수들의 만찬 회동 이후 급물살을 탔다는 관측이 많다. 당시 일본과의 무역갈등이 촉발된 시점이라 그룹 총수들이 조언을 얻었다는 점이 부각됐지만, 실제 만찬에선 AI와 자율주행, 모빌리티 등의 기술, 비즈니스 협력 방안과 투자 논의가 진행된 것으로 전해졌다. 정부도 지난 12월 17일 AI 국가전략을 선포하고 2030년 글로벌 3위 도약을 목표로 내걸었는데, 4대그룹의 AI 관련 사업 확대에 힘을 실어주겠다는 계획이다.
재계 관계자는 “4대그룹의 AI 전략은 시기뿐만 아니라 총수가 지휘하고 조직 신설, 투자, 인재 영입 등 공통적인 부분이 많다”며 “AI 기반 기술은 경계가 뚜렷하지 않다. 앞으로 4대그룹 간 경쟁구도와 상호협력이 동시에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관측했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