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현진은 메디컬테스트와 입단식 등을 위해 지난 12월 25일 토론토로 출국했다. 사진=연합뉴스
#에이전트의 크리스마스 선물
류현진이 토론토 블루제이스의 최종 제안을 받아들인 시기는 한국 시간으로 12월 23일 새벽이다. 로스앤젤레스(LA) 현지 시간으로는 오전 10시 무렵. 류현진이 개인 통역과 트레이너를 두는 데 대한 구단의 지원이 포함된 내용이었다(2019시즌 LA 다저스에서의 개인 트레이너 비용은 선수가 담당했다). 류현진으로서는 조금 더 시간을 갖고 토론토의 제안을 천천히 검토해볼 생각이었지만 토론토 구단은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다고 대응했다. 그동안 충분히 기다려줬다고 판단한 것이다.
알려진 대로 토론토는 류현진이 FA 시장에 나왔을 때 가장 적극적으로 움직인 구단이었다. 류현진이 LA에서 한국으로 출국하기 전부터 토론토는 에이전트를 통해 류현진에 대한 관심을 표명했다. FA 시장에 나온 선수 입장에서는 토론토의 제안을 염두에 둔 채 또 다른 구단의 오퍼를 기다려야만 했다. 처음 제안을 해온 구단과 협상하는 FA 선수는 흔치 않기 때문이다.
류현진의 에이전트인 스캇 보라스는 자신의 회사와 계약된 여러 명의 FA 선수들 협상을 이어가면서도 류현진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안겨주고 싶어 했다. 즉 FA 협상을 질질 끌기보다 선수의 요구를 충족시킬 만한 제안이 들어왔다면 그 제안을 통해 선수를 설득시키려 한 것이다. ‘그날’이 바로 12월 23일 새벽이었다.
#다른 팀 오퍼는 어떻게?
그동안 류현진에게 관심을 보인 구단은 텍사스 레인저스, 미네소타 트윈스,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LA 에인절스, LA 다저스, 필리델피아 필리스, 그리고 토론토 블루제이스인 것으로 알려졌다. 텍사스는 사이영상 2회 수상에 빛나는 코리 클루버를 트레이드로 영입하면서 일찌감치 류현진 영입 대열에서 벗어났다.
남은 팀들 중에서는 토론토와 미네소타가 가장 적극적으로 류현진 에이전트와 접촉했다는 후문이다. 류현진 측 관계자는 “올해 FA 시장에 나온 게릿 콜, 스티븐 스트라스버그가 팀을 찾아 떠난 후 그들을 놓친 팀들 중 선발 투수를 필요로 하는 팀에서는 대부분 류현진에게 관심을 나타냈다”고 설명했다.
중요한 건 그 ‘관심’이 어느 정도인지다. 선발투수가 필요한 모든 팀이 류현진에게 관심을 나타낼 수는 있지만 영입을 위한 관심인지 막연히 문만 두드리고 철수하는 소극적인 관심인지도 중요했다. 그 부분을 골라내는 건 에이전트의 몫이었다.
일요신문 취재 결과 액수가 적힌 공식 오퍼를 제안한 곳은 토론토가 유일했다. 협상 중 선수의 계약 기간과 몸값을 언급한 팀도 있었지만 이메일을 통해 구체적인 제안을 보낸 곳은 토론토였다. 즉 토론토는 류현진을 향해 일관된 태도를 보이며 영입 의지를 꺾지 않았다.
#중요했던 메이저리그 윈터 미팅
메이저리그 스토브리그에는 두 차례 중요한 회의가 열린다. 30개 구단 단장들이 모이는 단장 회의와 윈터 미팅이다. 스캇 보라스는 단장 회의가 열린 애리조나주 스코츠데일과 윈터 미팅이 개최된 샌디에이고에서 가장 바쁜 에이전트였다. 단장 회의 때는 보라스코퍼레이션 소속 선수들 중 메이저리그 지형도를 뒤흔들 만한 거물급 FA 선수들의 향방을 가늠해야 했고, 윈터 미팅 때는 거물급 FA 선수들을 위해 실질적인 협상 테이블을 꾸려가야만 했다.
류현진 영입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토론토 구단은 단장 회의가 열린 스코츠데일에서 스캇 보라스를 만나 류현진과의 미팅을 원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류현진은 한국으로 출국을 앞둔 상태라 일정을 잡기 어려웠다. 무엇보다 류현진의 생각이 확고했다. 류현진은 구단과의 만남은 협상 테이블이 아닌 계약서에 사인하기 위해 만나는 자리여야만 가능하다는 의사를 이미 밝힌 상태였다.
윈터 미팅이 열렸던 12월 9일부터 13일 동안 스캇 보라스는 게릿 콜(뉴욕 양키스), 스티븐 스트라스버그(워싱턴 내셔널스), 앤서니 랜돈(LA 에인절스) 등의 계약을 성사시키며 사흘간 무려 8억 1400만 달러의 계약을 이끌어냈다. FA ‘최대어’들의 협상을 마무리 지었지만 여전히 FA 시장에는 류현진, 댈러스 카이클, 외야수 니콜라스 카스테아노스 등이 남아 있었다. 마침내 댈러스 카이클이 시카고 화이트삭스와 4년 7400만 달러에 계약하면서 포문을 열었다. 이제는 류현진의 등판만 남은 상태.
윈터 미팅 기간 동안 토론토 구단과 다시 마주한 스캇 보라스는 그 자리에 마크 샤피로 사장, 로스 앳킨스 단장이 함께 나타난 걸 보고 토론토가 류현진 영입에 어느 정도의 관심을 갖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 자리에서 영입 관련된 큰 틀을 만들었고, 윈터 미팅이 끝난 후에도 지속적으로 구단과 에이전트가 연락을 주고받으며 세부적인 계약 내용이 진행됐는데 12월 23일 새벽이 돼서야 모든 계약이 마무리된 것이다.
류현진은 2018시즌을 마치고 FA를 선택할 수 있었지만 1년을 기다렸다. 이 선택은 결과적으로 신의 한 수가 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2018년 퀄리파잉 오퍼가 ‘신의 한 수’
류현진은 2018년 시즌 종료 뒤 FA 자격을 얻었지만 다저스가 제시한 퀄리파잉 오퍼(QO, FA 자격을 얻은 선수에게 1년 더 팀에 남아달라고 제안하는 것)를 받아들여 1년 1790만 달러에 계약했다. 이후 류현진은 절치부심한 끝에 2019시즌 14승 5패 평균자책점 2.32로 호투했고, 내셔널리그 사이영상 투표에서 2위에 올랐다. 평균자책점은 메이저리그 전체 1위였다. 류현진의 메이저리그 개인 통산 성적은 54승 33패 평균자책점 2.98. 류현진이 FA 시장에서 ‘거물급’으로 평가받는 중요한 이유였다.
스캇 보라스는 류현진에게 관심을 나타내는 구단들을 향해 그가 어깨와 팔꿈치 수술 후 2018년부터 꾸준히 마운드에 올랐고, 시즌 중 작은 부상은 있었지만 전체 성적에 영향을 미칠 만한 부상이 아니었다고 강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보라스코퍼레이션의 한 관계자는 “류현진이 QO를 받은 게 처음에는 도박이라고 생각했겠지만 결국 그 선택을 ‘신의 한 수’로 만든 이가 류현진”이라고 설명했다.
메이저리그 에이전트 세계에서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치른 스캇 보라스도 류현진이 QO를 받고 FA 재수를 택한 게 얼마나 중요한 일이었는지 여러 차례 언급했다는 후문. QO를 수용한 선수를 1년 후 영입한 구단은 드래프트 지명권을 보상하지 않아도 된다. 그 내용은 협상 테이블에서 유리하게 작용했고, 보라스의 부담을 덜어준 부분일 것이다.
류현진은 지난 12월 25일 오전 아내 배지현 씨와 함께 인천공항을 출발, 토론토에 도착한 다음날인 27일 현지에서 메디컬테스트를 받았다. 곧 토론토 홈구장인 로저스 센터에서 입단식을 겸한 기자회견이 열린다. 이제 본격적으로 류현진의 메이저리그 인생 2막이 토론토에서 펼쳐지는 것이다.
이영미 스포츠전문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