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리그는 전체 규모가 작은 편이다. 지난 5년 동안 후원사가 내는 금액은 일괄적으로 조금씩 늘었지만, 선수에게 오는 대국료엔 큰 변화가 없었다. 전체 규모를 키울 방법은 없을까? 현재는 후원사가 내는 금액이 모두 균등하다. 여력 있는 기업이 더 내면 전체 규모는 당연히 커진다. 유일한 방법은 구단제다. KB리그도 지난 10년째 구단제 구호를 외치고 있지만, 이미 덩치가 커져 개혁이 극히 어렵다. 여자리그는 다행히(?) 작은 규모라 변화 가능성이 조금은 있지 않을까?
2020 한국여자바둑리그는 타이틀스폰서부터 구해야 한다. 8개팀이 모두 들어갈지도 미지수다. 2019 여자바둑리그 개막식 장면. 사진=한국기원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
어떤 리그든 출범 후에는 ‘관성의 법칙’을 따른다. 규정은 한번 만들면 도중에 손보기가 매우 어렵다. 운영주체와 후원사 그리고 출전선수들 이해관계가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여자리그는 2015년 출범하면서 ‘용병제’를 도입했다. 당시 관계자는 “구단제를 겨냥한 포석이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용병제는 성공적으로 안착했다. 중국 왕천싱·위즈잉·가오싱·루이나이웨이, 일본 후지사와 리나, 대만 위리쥔 등 각국 기사들이 참가하며 여자리그에 맛을 더했다. 2020리그가 열리면 아마도 일본 인기기사 스미레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용병제의 성공을 보며 ‘여자리그가 처음부터 구단제였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선수선발식에서 매년 볼 수 있는 순번추첨을 한다. 쑥스럽지만 감독의 ‘뽑기 실력’이 팀 성적과 직결된다. 선수드래프트 자체가 평준화된 여덟 팀을 만들기 위한 구조다. 후원사 입장에선 똑같은 돈을 내고 다른 팀에 비해 전력이 떨어지면 기분이 안 좋다. 후원사 눈치를 봐야하는 실무팀은 매년 공정함을 가장한 쇼를 벌인다. 바로 드래프트 순번추첨이다. 팀과 선수가 직접 연봉계약을 하게 해주면 이런 코미디는 사라진다.
구단제를 못하는 이유를 물으면 한국기원에선 대부분 ‘후원사가 반대해서’라는 이유를 든다. 그러나 집행부를 잘 아는 한 바둑계 인사는 “후원사 때문이 아니다. 지금 한국기원이 의지가 없다. 안 해도 되기 때문에 안 한다. 공무원조직보다 더 심하다”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여자리그도 한번은 크게 변화해야 한다. 누군가 총대를 메고 구단제로 가야 한다. KB리그는 어려워도 여자리그라면 당장도 가능하다”라고도 했다.
구체적 방안을 묻자 그는 “지금은 후원사에게 구단제를 권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구단제가 되면 팀에서 더 투자를 해야 한다. 그 대가가 무엇인가. 예를 들어 리그기간에 팬들이 와서 응원할 여건이 되는가? 만약 어떤 바둑기사 팬클럽이 10만 명이라고 가정하자. 기업들이 구단제 하기 싫어할까? 한국기원에서 나서서 인기 프로기사 몇몇은 팬클럽이라도 만들어주라”라고 말했다.
2019리그 챔피언결정전. 1국 오유진(왼쪽, 부안 곰소소금 1주전)과 조승아(서귀포 칠십리 2주전)의 대국. 부안 곰소소금이 정규리그 1위에 이어 챔피언결정전 우승으로 통합우승을 이루어냈다. 사진=한국기원
판을 깨뜨려선 안 된다.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여자리그 감독 중 한 명은 “구단제가 되면 자기가 노력한 만큼 대가를 받는 거다. 가장 합리적이다. 물론 현재 구단제를 도입해도 최정, 오유진 같은 선수만 실질이 있고, 나머지 기사들에겐 자극을 주는 효과밖에 없다. 그래도 이 길이 전체 파이를 키우는 유일한 방법이다”라고 말한다.
매년 구성원이 바뀌는 팀에 팬들은 응원할 맛이 안 난다. 기원뿐만 아니라 프로기사도 적극적으로 동참해야 한다. 단기적으로는 손해 볼 수도 있다. 무엇보다 바둑팬의 눈에 리그를 맞추는 게 핵심이다.
#독재국가의 자본주의
잠시 시선을 바다 밖으로 돌려보자. 중화인민공화국(중국)은 공산당 일당 독재국가다. 한국기원과 달리 중국기원 직원은 실제로 공무원이다. 그런데 바둑대회들은 기이하게 다채롭다. 그리고 운영방식이나 발상이 한국, 일본보다 자유롭다. 예를 들어 어떤 기업이 바둑대회를 열고 싶다. ① 사설 에이전시 중에 입맛에 맞는 업체를 고른다. ② 원하는 방식으로 대회를 연다. ③ 상금은 선수에게 직접 지급한다. 이게 전부다. 물론 대회를 치른 선수는 나중에 협회에 상금 중 일정 부분을 낸다. 후원사는 자유롭게 원하는 방식으로 대회를 만들 수 있다.
중국기원은 그 과정에서 행사 등을 보조할 뿐 ‘지도’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중국 갑조리그도 팀과 선수가 개별계약을 맺는다. 아이러니하게 이 때문에 어떤 팀이 한번 리그에 들어오면 발을 빼기가 몹시 어렵다. 이런 사연 때문에 (갑조)리그에 들어가기보단 차라리 (언제든 그만둘 자유가 있는) 세계대회를 열겠다는 기업도 생긴다. 한국기원은 다르다. 대부분 대회를 기획, 총괄하고 감독한다. 프로기사 371명을 거느린 독점 소속사다.
2019년 정규리그와 챔피언결정전을 석권한 부안 곰소소금팀. 오유진-허서현-이유진 라인에 일본에서 온 용병 후지사와 리나가 활약했다. 사진=한국기원
처음에 구단제에 적극적이었던 기업도 이제는 기원식 리그시스템에 적응해 이젠 더 변화를 원치 않는다고 한다. 각 팀 실무자들에게 리그전체의 흥행과 재미는 큰 의미가 없다. 굳이 좋은 선수를 데려오려고 돈과 시간을 들여 노력할 이유도 없다. 최고의 인기기사를 보유하면 무슨 소용인가. 보호지명으로 묶어도 어차피 3년 후면 떠나갈 선수다. 여자리그는 매년 정해진 금액만 내면 나머진 한국기원이 다 알아서 해준다. 아주 편하다. 한국기원이 이렇게 열일(열심히 일)하는 사이에 팬도 후원사도 리그에 대한 열의와 관심이 사라지고 있다.
여자리그에 온 중국과 일본 용병선수들은 1년마다 팀과 새로 계약을 한다. 중국에서 오는 일류 용병 연봉은 매년 눈에 띄게 올라간다. 여기서만 각 팀이 경쟁하기 때문이다. 이를 지켜보는 국내 선수들 심정은 어떨까? 최소한 상위 1지명 선수들에겐 용병과 동일한 ‘계약의 자유’를 줘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부분적 구단제다. 매년 조금씩이라도 변화를 더하면 10년 후 모습은 확연히 다를 것이다. 먼저 여자리그를 살리자. 성공사례가 하나 생기면 KB바둑리그까지 바꿀 수 있다. 바둑계 전체에 희망이 생긴다.
한국기원 임채정 총재는 2020년 신년사에서 “그동안 바둑계가 자생력을 키우는 데 소홀하지 않았나 하는 점을 되돌아봐야 합니다. 당장 눈앞의 손익이 아닌 백년지대계를 구상해 바둑계의 미래 경쟁력 강화에 초점을 맞춰야 할 것입니다. 바둑계의 힘찬 변화에 관심을 부탁드리면서, 발전적인 제안에는 항상 문호를 열어놓겠습니다”라고 말했다. 특히 ‘힘찬 변화’에 방점을 찍고 싶다.
박주성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