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약처 관계자는 “기획재정부와 국회를 상대로 의료용 대마에 대한 예산 확보에 힘을 썼지만 실패했다”면서도 “시급하다고 판단되지 않았기 때문에 예산 배정에서 빠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이 관계자는 “현재로선 (CBD 오일 재고 확보에 대한) 별다른 대책이 없다. 희귀약품센터와 논의해볼 것”이라고 덧붙였다.
식품의약품안전처(식약처)는 CBD 오일 구매 대행을 위탁한 한국희귀필수의약품센터(희귀약품센터)에 시급하지 않다는 이유로 의료용 대마 관련 예산을 배정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이의경 식약처장이 2019년 10월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제안설명을 하고 있는 모습. 사진=연합뉴스
앞서 2019년 3월 식약처는 의료용 대마 구매에 서너 달이나 걸려 환자에게 무용지물이라는 비판 여론이 일자 예산 확보를 약속하며 희귀약품센터에 은행 대출을 받아 물량을 확보하라고 지시했다. 희귀약품센터가 은행에서 20억 원을 빌려 CBD 오일 2000병을 일괄 구매하면서 구매에 걸리는 기간이 일주일로 짧아졌다.
기존엔 환자가 의사 처방전을 받은 뒤 식약처에 승인을 얻어 희귀약품센터에 접수하면 그때부터 해외에서 CBD 오일을 사기 시작했다. 기간이 오래 걸린 이유다. 그런데 희귀약품센터가 일괄 구매해 확보한 물량을 처방전 받은 환자에게 지급하면서 구매 기간이 크게 단축됐다. 희귀약품센터는 식약처 약속을 믿고 1억 원에 가까운 연 대출 이자를 부담하며 기다렸지만 결국 예산을 배정받지 못했다. 마지막 희망을 걸었던 국회의 예산안 증액도 물거품이 됐다.
희귀약품센터가 CBD 오일 재고를 확보하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면서 다시 구매 기간이 일주일에서 최대 넉 달로 늘어날 예정이다. 희귀약품센터는 CBD 오일을 판매한 돈으로 대출 원금을 상환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다. 환자를 위해서라도 CBD 오일 물량을 확보해두고 싶지만 대출 이자 부담이 크기 때문이다.
희귀약품센터 탓만 하기도 어렵다. 희귀약품센터는 식약처 산하기관이지만, ‘CBD 오일 구매 대행’을 위탁받은 비영리 단체다. 식약처와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재무를 관리해야 하기 때문에 대출 부담은 희귀약품센터가 고스란히 떠안을 수밖에 없다. 희귀약품센터 관계자는 “지금 내려온 예산도 아주 빠듯하다. 이제는 설립 20년 만에 처음으로 직원들 월급이 밀릴까 걱정하는 상황”이라며 “환자와 가족에게 불가피하게 물량 확보가 어려우니 CBD 오일을 최대한 적게 사용해달라고 공지할 수밖에 없었다”고 전했다.
이에 식약처 관계자는 “희귀약품센터 CBD 오일을 판매한 돈으로 물량을 다시 재구매하면 된다”며 “국민 권익을 위해 존재하는 센터가 이자 부담 때문에 CBD 오일 판매한 돈으로 원금 상환하는 것은 무책임하다고 본다”고 반박했다.
2018년 4월 20일 국회의사당 앞에서 한국 의료용 대마 합법화 운동본부 회원들이 의료용 대마법 국회통과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고성준 기자
CBD 오일 재고 확보에 문제가 생기면서 그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환자와 그 가족에게 돌아간다. CBD 오일은 현재 국내에서 난치성 뇌전증(간질), 드라벳증후군(영아기 중근 근간대성 간질), 레녹스-가스토증후군(소아기 간질설 뇌병증) 환자에게 처방된다. 주로 난치성 뇌전증 환자가 처방 받는다. 호흡곤란, 근육강직, 근육실조나 급성 발작으로 심하면 사망에 이를 수 있는 뇌전증 환자에겐 CBD 오일은 한 줄기 희망이다.
CBD 오일이 뇌전증을 완전히 없애주진 않지만 확실히 증세를 완화해준다. 성장기 아이의 경우 한 번 증상이 발생할 때마다 신체 발달이 멈추거나 더뎌지거나 혹은 퇴화할 위험까지 동반한다. 환자나 그 가족은 CBD 오일이 없는 공백 기간 동안엔 어딜 가거나 불안하고 위축될 수밖에 없다. 국내 난치성 뇌전증 환자는 10만 명 정도다.
한번에 많은 양을 구매하고 싶어도 현실적으로 쉽진 않다. 식약처에선 의사 처방전만 있으면 대량 구매도 가능하다고 설명하지만 처방은 일선 의사 재량에 맡겨진다. 뇌전증에 대한 이해가 깊은 의사라면 중복 처방 위험을 감수하지만, 보통 향정신성 마약류인 CBD 오일을 한 번에 100mL 기준으로 2병 이상 처방하길 꺼린다. 국내에 CBD 오일을 처방할 수 있는 의사 또한 20명도 되지 않는다고 알려졌다.
체중과 증상 정도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하루에 3~5mL 오일을 아침과 저녁에 나눠서 복용한다. 평균 100mL CBD 오일로 한 달 정도 버틸 수 있는 셈이다. 경제적 부담도 크다. 100mL CBD 오일 1병에 165만 원가량 한다. 넉 달을 기준으로 한다면 최소 100mL CBD 오일 5병을 사야 한다. 그 비용만 해도 825만 원 정도나 된다.
현직 의사이자 난치성 뇌전증 아이를 둔 황주연 씨는 “CBD 오일이 절대적인 약은 아니지만 CBD 오일이 없는 공백 기간엔 위축될 수밖에 없다. 비행기를 타기도 어렵다”며 “작년엔 식약처가 발 빠르게 물량 확보를 하면서 대응해서 긍정적이었는데 그 조치가 이렇게 빨리 끝나서 좀 황당하다”고 말했다.
CBD 오일 공백기가 찾아오면 뇌전증 환자나 가족은 불법을 감수하고서라도 CBD 오일 ‘해외공동직구’를 할 가능성도 크다. 미국 등 해외에선 의료용 대마인 CBD 오일 구매가 비교적 간단하고 쉽기 때문이다. 실제로 최근에도 CBD 오일 공동 구매가 이뤄지고 있다.
강성석 의료용대마합법화운동본부 대표는 “형편이 좋은 가정 아이만 병이 있는 게 아니다. CBD 오일 가격 또한 만만치 않다”며 “한번에 많이 구매하면 된다거나 시급하지 않다고 판단한 식약처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실정을 모르고 행정적으로만 생각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박현광 기자 mua123@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