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1월 8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자유한국당 2020년 영입인사 환영식에서 탈북자 출신 인권운동가인 지성호 나우 대표의 손을 들어 올리고 있다. 사진=박은숙 기자
황 대표의 수도권 험지 출마가 공식화된 것은 지난 1월 3일. 그는 이날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장외집회에서 단상에 올라 “통합을 위해 저부터 앞장서겠다. 올해 총선에서 수도권에 험지에 출마하겠다”고 말했다. 그간 설로만 가득했던 황 대표의 출마 지역이 일단 수도권으로 정해진 셈이다.
집회에 참석한 의원들은 황 대표의 갑작스런 발언에 화들짝 놀랐다고 한다. 그런데 더 큰 충격파는 그 이후 발언에서 불거졌다. 황 대표는 “우리 당에 뜻있는 모든 의원, 모든 동지가 험지로 가서 죽어서 살아나는 기적을 만들어내겠다”며 “우리 당에 중진 의원들 계시는데, 중진 의원들께서도 험한 길로 나가주시면 좋겠다”고 중진 험지 출마론을 꺼내들었다.
영남권 등 노른자위에 머무는 중진 의원들을 향해 함께 수도권에 출격하자는 의미로 풀이된다. 황 대표 측 관계자는 “험지보다 더한 험지도 대표가 솔선수범에 나선다는 것”이라며 “영남이라는 기득권을 깨고 필사즉생의 각오로 총선에 임해야 한다고 구상해왔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 같은 요구에 중진들이 강하게 반발하는 기류가 포착된다. 그간 터를 닦아 놓은 지역을 버리고 수도권에 무작정 나서는 것이 총선 승리에 도움이 되겠느냐는 지적이다. 한 영남권 3선 의원은 “여기까지 고스톱 쳐서 얻은 자리가 아니다. 어느 곳도 험지가 아닌 곳이 없다”며 “전략적 구상을 해야지 당의 자산인 중진들을 사지로 내몰아서 어쩌자는 것이냐”라고 비판했다. 역시 영남권 4선 의원은 “대표가 전당대회밖에 치러보지 않아서 지역선거에 대한 이해가 너무 떨어진다”며 “하다못해 당원 모집 하나도 대표 손으로 직접 해본 일이 있느냐, 그렇게 쉽게 얘기할 부분이 아니다”라고 꼬집었다.
대권 잠룡인 홍준표 전 대표와 김태호 전 경남지사 역시 수도권 출마를 일축하고 영남권을 택하는 ‘마이웨이’를 고수하는 상황이다. 특히 홍 전 대표는 황 대표를 향해 “입당 1년도 안 된 사람이 험지 출마를 선언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라며 “그게 무슨 큰 희생이라고 다른 사람들까지 끌고 들어가느냐”고 맞받았다. 그는 총선에서 대구 동구을이나 경남 밀양·의령·함안·창녕 출마를 저울질하고 있다.
홍준표 전 자유한국당 대표. 사진=박은숙 기자
다만 이러한 중진들 반발에 대항해 초재선 의원들의 수도권 험지 출마 호응도 적지 않은 상황이다. 향후 중진들의 거취 문제가 당 내홍의 ‘불씨’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있는 셈이다. 한 수도권 초선 의원은 “영남권 중진들은 당의 미래는 상관없이 공천만 받아서 자리만 유지하면 만사형통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몰려 있다”며 “과감하게 험지로 나서 희생하는 모습을 보여야 당이 생명력을 얻고 총선에도 승산이 있다”라고 말했다.
초재선 의원들은 지난해 11월 지도부에 공천 위임 각서를 제출한 사례를 들기도 한다. 거취를 지도부에 백지 위임하는 모습을 중진도 보이라는 압박이다. 최근 총선기획단에서도 ‘당 대표급 중진들의 전략적 지역 출마’를 권고한 바 있어 중진들의 험지 출마는 이제 대세가 됐다는 주장도 나온다. 초재선 의원들의 이러한 움직임에 중진 의원들은 재반박을 이어가는 양상이다. 한 중진 의원은 “역대 최악의 20대 공천으로 들어온 초선들이 얼마나 실력이 있겠느냐”며 “중진이 고인 물이라고 뭐라고 할 것이 아니다. 중진보다 더한 초재선들이 상당하다”라고 지적했다.
이처럼 당내 공방을 일으킨 수도권 험지 출마론을 쏘아올린 황 대표로서는 지역구 선택에 더욱 신중할 수밖에 없게 됐다. 상징성과 효과, 승리 가능성 및 패할 경우 출구전략까지 모든 점을 고려하는 상황이다. 지도부 한 관계자는 “수도권 지역을 대상으로 시뮬레이션을 통해 후보군을 압축하고 있다”며 “대표는 아직 이렇다 할 언급을 하지 않았다. 고심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라고 귀띔했다.
후보군으로는 서울 종로, 용산, 구로을, 은평갑, 관악갑 등이 오르내리는 모습이다. 노무현·이명박 전 대통령이 거쳐간 ‘정치 1번지’ 종로의 경우 그간 가장 유력하게 거론되며 출마 여부에 관심이 집중돼 왔다. 이곳에 출마한다면 이낙연 국무총리와의 ‘대선 전초전’이 벌어질 수 있다는 관측도 제기된다.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와 심재철 원내대표가 9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2020 총선 국민승리 공약개발단 출범식에서 참가자들과 총선 승리를 다짐하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사진=박은숙 기자
참모진들 사이에선 종로 출마가 상징성면에서 가장 좋은 카드라는 분석도 나온다. 야권의 유력주자로서 종로 출사표가 큰 의미가 있다는 이유에서다. 만약 패배하더라도 다른 지역보다 타격이 덜하다는 얘기도 나온다. 낙선하더라도 정치 1번지에 도전한 명분을 챙길 수 있다는 것이다. 황 대표는 “죽어야 비로소 사는 길을 가겠다”고 강조한 바 있다.
하지만 여권 유력주자인 이낙연 총리가 대결을 벼르는 상황에서 패배는 치명상이 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오히려 여권의 페이스에 말려 들어가는 것이 아니냐는 시각이다. 앞서 종로를 지켰던 민주당 정세균 의원이 닦아놓은 지역기반도 무시할 수 없다. 오세훈 전 서울시장의 경우 지역기반 없이 ‘고공전’을 펼쳤다가 낙선한 아픈 사례도 있다.
용산은 진영 행정안전부 장관 불출마 선언으로 무주공산이 된 상태다. 황 대표가 출마한다면 유력 중진들과 함께 ‘한강벨트’(용산·강남4구·동작·강서)를 꾸리고, 이를 진두지휘하며 수도권 바람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이란 관측이다. 여권에서는 권혁기 전 청와대 춘추관장 등이 출마를 준비하고 있어 정권 심판론을 더욱 강조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박영선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의 지역구이자, 문재인 대통령의 최측근 윤건영 청와대 국정기획상황실장의 출마가 유력한 서울 구로을 역시 험지 중에 험지로 꼽힌다. 노동계 성향이 강한 지역으로, 16대 국회 이후 보수 정당에서 당선자를 한 번도 내지 못했다. 은평갑 역시 여권 강세 지역으로 민주당의 젊은 주자인 박주민 의원이 자리해 험지로 분류된다. 황 대표가 공언한 수도권 험지에 정확히 해당되는 지역이라는 얘기다. 이 밖에 관악갑의 경우도 여권의 지지세가 강한 지역으로, 황 대표의 측근인 원영섭 조직부총장의 최근 부산 출마 결정에 따라 자리가 비었다.
정치권에선 조만간 황 대표가 산행을 통해 출마 지역을 암시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북악산, 청계산, 관악산 등이 후보지로 전해진다. 만약 북악산에 오를 경우 종로 출마에 무게를 두는 행보라는 해석이 나올 수 있다. 한국당 한 관계자는 “어느 산에 오르느냐가 출마지를 유추할 수 있는 단서가 될 것”이라고 귀띔했다.
권준혁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