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 최고의결기구인 기금운용위원회는 최근 국민연금의 적극적 주주권 행사 대상 기업과 절차 등을 규정한 가이드라인(지침)을 의결했다. 이에 따라 횡령·배임·사익편취 등으로 기업가치가 추락하고 주주권이 침해됐는데도 개선 의지가 없는 투자기업에 대해 국민연금이 이사 해임, 정관 변경 등의 강도 높은 주주 제안을 할 수 있게 됐다. 국민연금이 공식적으로 오는 3월 정기 주주총회에서부터 사용할 수 있는 ‘칼자루’를 쥔 셈이다.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는 최근 적극적 주주권 행사 대상 기업과 절차 등을 규정한 가이드라인을 의결했다. 사진=연합뉴스
한국경제연구원 집계를 보면, 국민연금이 경영권 개입이 가능한 지분 5% 이상을 가진 기업은 273곳(2018년 말 기준)이다. 이는 국민연금이 주식 의결권을 보유한 국내 상장사(716곳)의 40%에 달한다. 또 국민연금이 최대주주로 있는 기업은 19곳, 2대 주주는 150곳이다. 716곳 중 266개사에서 5대 주주 이상의 지위에 올라 있다.
금융투자업계 등은 국민연금이 5% 이상 지분을 확보한 상장사가 2019년 말에는 300개 가까이 늘어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실제 국민연금은 지난 1월 6일과 7일 이틀에 걸쳐 2019년 4분기 주식보유변동 내역을 공시했는데, 이를 종합해본 결과 기업들에 대한 지분을 대거 사들였다. 바로 전 분기인 3분기와 비교해 지분을 늘린 종목은 105개였다.
국민연금 ‘장바구니’에는 코스피 시가총액 상위 30개 종목 가운데 12개 기업의 지분도 담겼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현대자동차, 네이버, 카카오, 포스코, 셀트리온 등이다. 셀트리온(8.11%)를 제외하면 보유 지분은 10~11% 수준이다. 시총 30위 기업 중 지분 축소를 공시한 기업은 현대모비스와 엔씨소프트, SK(주), 3곳에 그쳤다.
국민연금이 주주권 행사의 기준을 만들고 지분까지 대거 늘리자, 금융투자업계와 재계에선 벌써부터 오는 3월 주주총회에서 국민연금의 ‘타깃’이 될 만한 기업들이 거론되고 있다. ‘과소배당’이라는 낙인이 찍혀 있는 기업들이 대표적이다. 남양유업, 넷마블, 대양전기공업, SBS미디어홀딩스, S&TC 등이다. 최근 3년간 배당정책에 변화가 없거나 오히려 배당금을 줄여온 기업들이다.
특히 남양유업, S&TC, 대양전기공업, 3개사는 국민연금의 ‘저배당 블랙리스트’에 올라 지속적인 압박을 받고 있다. 국민연금은 그동안 이들 회사 주총에서 반대의결권을 행사해 왔는데, 올해도 회사들의 배당정책에 변화가 없다면 국민연금이 주주제안부터 이사 해임까지 보다 강도 높은 대응을 할 것으로 관측된다.
임원 보수가 과도하게 많은 곳도 국민연금의 압박 대상이 될 수 있다. 국민연금은 지난해 3월 임원 보수 과다를 이유로 하나투어, 네이버, 에스비에스, 한국단자공업, 한국전력공사, DB하이텍, 코오롱인더스트리, 셀트리온, 키움증권 등의 주총 안건 승인을 반대했다.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올해 주총에서도 국민연금이 반대의결권을 행사하게 되는 기업은 이번에 확정된 가이드라인에 따라 중점관리사안 대상 기업에 오르고, 향후 경영 개입의 ‘1차 대상’으로 꼽히게 될 것으로 보인다”고 전망했다.
주총에서 검찰 수사를 받고 재판에 넘겨진 오너들이 사내이사 임기가 끝나 재선임을 추진하는 경우에는 ‘법령위반 기업’으로 지정될 수 있다. 계열사 부당 지원 혐의로 기소된 조현준 효성그룹 회장과 이해욱 대림산업 회장은 오는 3월 주총에서 사내이사 임기가 만료된다. 국민연금은 과거에도 이들의 사내이사 선임 안건을 반대했다. 특히 대림산업의 경우 국민연금은 지난 2019년 10월까지 지분을 꾸준히 줄여오다가 최근 다시 늘리기 시작했다(11.63%→12.21%, 관련기사 이해욱 회장 기소…대림산업 3월 주총 ‘운명의 날’ 되나).
카카오의 경우 올해 김범수 의장의 임기가 만료된다. 김범수 의장은 현재 공정거래법 위반 혐의로 대법원의 상고심을 앞두고 있다. 국민연금의 적극적인 주주활동 가이드라인의 직접적인 영향권에 있는 만큼 김 의장의 재선임안이 주주총회 안건으로 상정된다면 국민연금이 반대의결권을 행사할 가능성이 높다.
오너가 형사처벌과 관련 없어도 안심할 수 없다. 국민연금은 그동안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정몽원 한라그룹 회장 등에 대해 ‘장기 연임’ 등의 이유로 사내이사 선임을 반대해왔다. 이들의 임기도 올해 3월 끝난다. 앞서의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이들이 올해도 사내이사로 재선임될 경우 국민연금은 ‘지속적 의결권 반대에도 개선이 없는 기업’으로 판단하고 경영 개입 절차에 착수할 수 있다.
반면 국민연금이 가족 간 경영권 분쟁을 겪는 한진그룹 개입 가능성은 높지 않다는 관측이 나온다. 국민연금은 지난해 4분기 대한항공 지분을 9.90%에서 11.36%로 늘리고 한진 지분도 7.54%에서 9.62%로 확대했다. 특히 주가 등락 없이 한진 지분을 사들인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한진칼 지분은 5% 미만을 유지하고 있다. 한진그룹 경영권의 핵심은 한진칼 지분에 있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지난해 오너 일가 논란으로 국민연금이 대한항공, 한진 투자에서 큰 손실을 봤을 것”이라면서도 “다만 두 회사는 주가가 저평가된 측면이 있다. 연금 특성상 가족 간 갈등이 얽히고설킨 상황에서 경영에 개입해 불필요한 논란을 키우기 보다는 투자 목적으로 자금을 투입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말했다.
국민연금 ‘타깃’이 된 회사 관계자들은 공식적으로 주총까지 아직 시간이 남았고, 국민연금으로부터 별다른 입장을 전해 듣지 못한 만큼 “현재까지 별다른 입장은 없다”고 입을 모았다. 다만 국민연금의 주주권 확대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는 못했다. 한 회사 관계자는 “기업별로 사정이 각각 다르고 변수도 많다. 국민연금이 가이드라인을 확정했다고 하지만 최선의 결정을 내릴 수 있을 지는 의문”이라고 말했다.
국민연금의 주주권 확대 영향이 일부 기업에 국한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다른 회사 관계자는 “국민연금이 최대주주가 아닌 2대주주 이하라면 기업들이 버틸 가능성이 높다”며 “특히 오너일가가 있는 곳들은 그들의 지분율이 압도적이기 때문에 국민연금이라도 제 목소리를 내기 힘들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와는 별개로 국민연금의 독립성 문제도 풀어야 할 숙제로 꼽힌다. 국민연금이 정치적 압박이나 정부의 입김에서 과연 자유로운 역할을 충실히 할 수 있느냐는 지적이다. 재계 관계자는 “국민연금의 존재 목적은 국민 노후 보장에 있는 만큼 기금 운용과 수익률 확대가 1차 목표가 돼야 한다”며 “주주권 행사와 관련해선 외부의 입김과 관계없이 충실한 ‘관리자’ 역할을 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