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문계 인사들이 ‘친문 공천의 필요성’ 등의 내용이 담긴 문건을 작성해 논란이 일 전망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1월 8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문화예술인 신년인사회 및 신년음악회에 참석해 인사말을 하고 있다. 사진=청와대 제공
문서 작성에 참여한 인사들은 청와대 관계자 및 민주당 의원들이다. 모두 친문재인계로 분류된다. 이들은 비정기적으로 만나 국정 운영과 관련된 논의들을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여권 일각에선 이 모임을 문재인 정부 막후 컨트롤 타워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지난 12월 초 이들이 만날 당시 여야는 패스트트랙과 조국 문제 등으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또 본격적인 총선 채비도 갖춰야 했다. 그만큼 시기적으로 중요한 때였다는 얘기다.
문서의 핵심은 청와대 참모진 및 친문계 인사들의 출마 당위성을 설명하는 내용이다. 총선 공천을 앞두고 예비 후보자들이 경쟁적으로 이른바 ‘친문 경력’을 적시한 것에 대해 비판 여론이 불거지자 이에 대응하기 위한 차원으로 읽힌다. 최근 정치권에선 친문 예비 후보자들을 두고 ‘진문(진짜 친문)’이라는 용어가 등장했다. 2016년 총선을 앞두고 논란이 뜨거웠던 ‘진짜 친박(진박) 감별’을 빗댄 것이다. 민주당 비문 진영에선 인적 쇄신을 명분으로 청와대 참모진들의 낙하산 공천이 이뤄지는 것 아니냐는 의혹이 일기도 했다.
여당과 청와대의 몇몇 친문 핵심 인사가 정국에 대해 논의한 내용을 간략하게 문서로 만들었다. 일요신문은 20페이지에 달하는 이 문건 중 총선 전략 파트 부분을 입수했다.
문서는 우선 2016년 총선을 되짚어보는 것부터 시작한다. ‘2016년 새누리당 패배’의 교훈이라는 제목의 단락이다. 2016년 총선을 앞두고 새누리당(자유한국당 전신) 압승은 거의 확실시됐다. 박근혜 전 대통령과 새누리당 지지율은 40%를 넘겼고, 국민의당 출범으로 야권은 분열한 상태였다. 새누리당은 공공연하게 ‘180석’을 목표로 내세웠다.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123석을 얻은 민주당은 새누리당(122석)을 제치고 원내 1당을 차지했다. 호남에서 불과 3석을 얻는 데 그쳤지만, 수도권에서 압승을 한 덕분이었다.
문건에선 2016년 총선 승리의 원인으로 새누리당 자멸을 꼽았다. 위기 극복을 위해 비상체제로 선거를 치렀던 민주당에 비해 새누리당은 승리를 확신한 나머지 일찌감치 샴페인을 터트렸다는 얘기였다. 이는 진박 공천으로 이어졌다. 당 비판에도 불구하고 박근혜 청와대는 선거에 개입하는 듯한 인상을 줬고, 새누리당은 민심을 도외시한 채 공천 싸움에만 몰두했다. 이러한 내부 총질이 결국 중도층 표심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수도권 선거에서 치명타로 작용했다는 게 친문 핵심 인사들의 분석이었다.
이어지는 ‘진박, 그리고 친문’으로 시작되는 두 번째 단락에선 친문 인사들의 출마를 바라보는 민주당 의원들의 불만을 다뤘다. 출사표를 던진 문 대통령 참모진들은 청와대 근무 경력 등을 홍보 전면에 내세웠다. 더군다나 이들 대부분 정치 신인 가산점을 받기 때문에 공천 심사에서 유리한 위치를 선점할 가능성이 높다. 대대적인 물갈이 공포에 떨고 있는 현역 의원들은 자신들의 빈자리를 친문 인사들이 차지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인적 쇄신은 친문 공천을 위한 명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민주당 의원들은 문재인 대통령을 앞세워 민주당 깃발만 꽂으면 된다는 인식으로는 2016년 새누리당 전철을 밟을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또 친문계의 ‘문재인 마케팅’은 선거에서 질 경우 그 부담을 고스란히 문 대통령이 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국당이 내세울 정권 심판 프레임에 따라 선거 패배는 곧 문 대통령에 대한 반대 여론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친문 공천에 반대하는 현역들은 이번 총선을 철저하게 당 중심으로 치러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게 문건의 설명이다.
앞서의 두 단락을 종합하면 친문 공천에 대해 부정적 내용이 주를 이룬다. 하지만 반전은 이제부터다. ‘2016년과 지금은 다르다’라는 제목에선 현 판세 분석에 초점을 맞췄다. 요약하면 이번 총선은 정권 심판이 아닌 야권 심판 프레임으로 치러질 것으로 봤다. 2016년 총선 때 박근혜 청와대 심판이 표심을 흔들었던 것과는 판이하다는 것이다. 여기에 문재인 대통령 지지율이 완만한 상승 추세로 접어든 것과 보수 세력 사분오열 역시 민주당에 유리한 요소라고 판단했다.
특히 문건은 중도 성향으로 분류되는 부동층들의 한국당 혐오 기류가 강하다는 것에 주목하고 있다. 한국당 심판이 선거의 주 프레임이 될 것이란 전망의 근거다. 여권 지지층은 물론 캐스팅 보트를 쥐고 있는 중도 성향 유권자들 역시 문 대통령 국정에 힘을 실어줘야 한다는 쪽으로 선회하고 있다는 분석도 뒤를 이었다. 곧, 최선의 선거 전략은 문 대통령을 적극 활용하는 것이라는 주장인데 이는 친문 공천 당위성을 뒷받침하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마지막 단락은 노골적으로 ‘친문 공천의 필요성’이라는 제목이 달려 있다. 청와대 참모를 비롯한 친문 인사들의 총선 출마는 정권 초부터 논의됐던 사안이라면서, 장기집권을 위해선 무엇보다 집권당 친정체제 구축이 필요하다는 게 문건에 나타난 친문 공천의 필요성이다. 패스트트랙 처리 과정에서도 알 수 있듯이 범 민주진영과의 연대는 한계가 노출됐고, 당 내에서 빚어진 여러 갈등은 개혁 추진에 걸림돌이 될 것으로 예측했다. 안정적인 의석수 확보를 넘어 여당 내에 확실한 문 대통령 친위대를 만들어야 한다는 얘기다.
현재 128석(2019년 12월 초 기준) 중 50석 안팎이 친문으로 분류되는데 이번 총선에선 최소 50%가량을 목표로 했다. 그 전제 조건으로 청와대 참모 출신 및 친문계 인사들의 적극적인 출마가 이뤄져야 하고, 당 차원에서도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전략 수립이 요구된다고 강조했다. 특히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으로 입법부 위상이 강화되고 나아가 내각제까지 염두에 둬야 한다는 대목이 눈길을 모았다. 국회 내에 안정적이고 결집력 있는 세력을 최대한 늘려 향후 뒤바뀔 정치 지형을 대비해야 한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 문건 작성에 관여했던 한 친문 의원은 “우리끼리 사적으로 보기 위해 만든 자료에 불과하다”며 확대해석을 경계하면서도 “그동안 정권을 창출했던 계파들이 정권 교체로 사라졌던 것은 결국 당 내 주도권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시대정신과 맞지 않는 친박계가 여전히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은 일단 머릿수가 많다는 점에서 이유를 찾아야 한다. 따라서 이번 총선에선 최대한 많은 (친문) 후보자들을 당선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이 문건 내용을 접한 민주당 의원들은 부정적인 반응이었다. 중도 성향의 한 의원은 “결국 친문에게 공천을 주자는 내용 아니냐. 자칫, 공천 과정에서의 공정성 시비가 일 수도 있다. (문건 작성은) 선거를 앞두고 오해를 살 수 있는 부적절한 처신”이라고 꼬집었다. 비문계 의원 역시 “백번 양보해서 비공식 모임에서 만든 개인적 문건이라고 치자. 그런데 내용이 이상하다. 진박 공천의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면서 지금은 상황이 다르니 친문 공천을 해야 한다는 논리가 납득이 안 간다”면서 “친문에게 공천을 주기 위한 억지로 꿰맞춘 궤변이 담긴 문서”라고 폄하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