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아닌 현실에서 이런 사건이 발생했다. 그것도 프로기사 입단대회다. 한국기원 사상 초유의 일이다. 과거와 달리 송수신기로 소형카메라와 휴대전화(블루투스 이어폰)을 이용하고, 외부 고수가 사람이 아닌 인공지능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AI가 프로 실력을 뛰어넘은 시대여서 가능해진 사건이다.
K 씨가 왼쪽 귀에 붕대로 감고 있던 이어폰. 아래는 소형 카메라와 연결된 충전기와 부품들. 사진=한국기원
만 21세 K 씨. 과거 한국기원 연구생이었다. 당시도 입단대회 본선까진 오르기 어려운 실력이었다고 한다. 지방에서 생활하던 K 씨는 1월 12일 시작한 제145회 일반입단대회 예선에 참가했다.
예선 1, 2회전은 더블일리미네이션(3~4명이 조를 이뤄 2~3판을 두고 최종 2명이 남는 방식)으로 치러졌다. K 씨는 예선 1회전 첫판을 지고, 두 번째 판을 이겨 2회전에 올랐다. 다음 날 열린 예선 2회전에선 2승을 거둬 본선에 진출했다.
K 씨를 포함해 총 39명이 본선에 올랐다. 시드자 25명을 더해 다시 64강전이 펼쳐졌다. 문제는 14일 열린 본선 1회전(64강)에서 발생했다. 본선도 더블일리미네이션 방식으로 열렸다. 첫판은 이겼지만, 두 번째 판은 부정행위를 들켜 실격패 당했다.
K 씨는 재킷 단추 부근에 소형 카메라를 설치했고, 옷 안에 휴대전화를 몰래 소지했다. 블루투스 이어폰을 감추기 위해 귀에는 치료용 붕대를 감고 있었다. 카메라로 전송된 바둑판을 외부조력자가 보고 바둑 인공지능 프로그램으로 분석해 다음 착점을 말해주는 수법이었다.
범행이 발각된 후 K 씨는 “예선전은 외부조력자와 연락이 끊어져 부정행위를 할 수 없었다. 실제로 전자기기를 이용한 건 본선 1회전(64강)뿐이었다”고 주장했다. 이 진술은 믿을 수가 없다. K 씨와 예선대국을 치른 상대들은 “그가 바둑판은 안 보고 몸을 자주 앞으로 기울이며 고개를 숙이고 대국했다. 이상하다”라는 이야기를 동료들에게 전했다.
14일 오전 본선 첫 대국이 열렸다. K 씨의 기이한 대국자세를 전해 들은 L 씨는 우연히 대국 도중 같이 화장실에 다녀오던 중 K 씨가 정수기 앞에서 물을 마시던 순간 그의 팔에 숨겨진 전자기기를 목격했다. 그러나 자신도 한창 대국하던 도중이라 바로 문제 삼기 어려웠다. 국후 이 사실은 당시 심판을 맡았던 조연우 초단에게 전해졌다.
범행 현장을 잡은 조연우 심판. 사진=박주성 제공
조연우 심판은 일요신문 인터뷰에서 “소지품 검사 후 진행요원이 K 씨에 대해 말했다. 아침에 대국장 와이파이가 되는지를 물었다고 한다. 이상하게 생각해 K 씨가 맡긴 무선이어폰 통을 확인하니 한쪽밖에 없었다. 왼쪽 귀에 붕대를 감고 있어 부정행위를 확신했다”라고 말했다.
오후 대국 중에 K 씨와 몇 차례 눈까지 마주치자 조연우 심판은 대국을 잠시 중단시키고 다시 몸수색을 했다. 코트에서 카메라와 연결된 배터리를 먼저 찾았다. 이어서 왼쪽 귀에 감은 붕대를 풀자 무선 블루투스 이어폰이 나왔다. 한국기원에서 열리는 대국은 휴대전화, 스마트워치 등 전자기기 반입 및 소지를 금지하고 있다. 이를 위반하면 ‘반칙패’ 처리한다. K 씨의 경우는 전자기기 소지뿐 아니라 부정행위 가능성이 있었기에 ‘실격패’다. 범행현장을 잡은 조연우 심판은 K 씨를 바로 기원 직원에게 인계했다.
하루가 지난 15일 오전 10시 10분, K 씨는 한국기원에 다시 와서 진술서를 썼다. 그는 “인터넷사이트(타이젬) 채팅으로 알게 된 어떤 사람(외부조력자)에게 카메라를 이용해 대국 상황을 모니터링하고 이어폰으로 다음 수를 알려주는 방법을 알았다”면서 “입단대회에 사용이 가능한지 확인하고 필요한 전자장비는 입단대회 두 달 전 택배로 받았다. 사례는 입단 후에 하기로 했다”고 썼다.
외부조력자는 텔레그램(보안 채팅프로그램)으로 연락했다. 범행이 발각된 14일 저녁에는 관련 증거자료를 소멸하라고 K 씨에게 지시했다고 한다. 아직 외부조력자의 인적사항은 파악되지 않았다. 그런데 한 도장 관계자는 “과거 연구생 OOO이 도장에 와서 원생들과 어떤 대국을 같이 검토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K 씨와 도장선수가 14일 오전에 둔 내용이었다”라고 말했다.
입단대회는 수순중계를 하지 않는다. 이 대국내용을 제3자가 어떻게 알았을까? 이후 기자가 K 씨에게 “OOO을 아느냐”고 물었다. 그는 바로 고개를 흔들며 “모르는 사람이다”라고 강하게 부정했다.
15일 오후 2시 한국기원 입장을 듣고 있는 도장 관계자와 참가 선수들. 사진=박주성 제공
#현장의 아우성
K 씨에게 진술서를 받은 한국기원에선 오전 11시부터 대책회의를 시작했다. 원래 본선 32강을 시작해야 할 오후 2시 30분, 한국기원은 ‘대국 일정 연기’를 일방적으로 통보해 도장 관계자와 선수들에게 원성을 샀다.
한국기원 담당자는 “14일 1차 조사를 마치고, 15일 사실 확인을 했다. 부정행위자 진술에선 본선에서만 썼다고 말했지만, 예선에도 피해를 발생했는지 알기 어렵다. 현재 조사 중이다. 이대로 32강 입단대회를 계속 진행하면 차후 피해자 구제가 어렵다고 생각했다. 사안이 중대해 구체적 방안이 나오기 전까지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급하게 대회 중단을 요청했다”라고 해명했다.
도장 원장들부터 즉각 반발했다. 설왕설래를 거듭하다 결국 사무총장이 선수들에게 직접 의견을 묻고 대회 속개를 결정했다. ‘피해자 구제 등은 따로 논의하고 당장은 기존 32강으로 대회를 진행한다’는 결정이다. 이후 한국기원은 이런 공식 입장문을 냈다.
16일 오전 대회장에 들어온 입단대회 참가자가 휴대전화를 지정된 가방에 보관하고 있다. 사진=박주성 제공
지난 16일 오전 참가자들이 전자기기 스캐너로 보안검색을 받고 있다. 사진=박주성 제공
“한국기원이 주관하는 모든 대회에서는 경기 전 휴대전화와 스마트워치 등 전자기기 반입 및 소지를 금지하고 일괄 수거해 귀가 시 수령할 수 있게 운영하고 있습니다. 대국 중 전자기기가 발견되면 몰수패 처리하고 있지만, 인공지능의 급속한 발전으로 자발적인 방법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절감했습니다. 이번 일을 교훈 삼아 한국기원은 전자기기를 반입할 수 없도록 모든 조처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전자기기를 이용한 부정행위가 발생하지 않도록 철저한 대책을 마련하겠습니다.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해 선의의 피해를 본 대회 참가자와 관계자, 바둑팬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아울러 미숙한 운영으로 대회 진행에 차질을 빚은 점도 고개 숙여 사과드립니다. 피해자의 의견도 청취 중입니다. 향후 사법기관에 의뢰하는 것을 포함한 모든 방안을 강구해 선의의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한국기원은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바둑도장 원장들은 “아이들을 기준으로 사태를 처리했으면 좋겠다. 상처를 치유하고 희망을 줄 수 있는 구제책을 바란다”고 입을 모았다. K 원장은 “입단대회와 달리 실시간 중계가 되는 프로대국도 문제가 될 수 있다. 한국기원에 철저한 방지책을 바란다”는 주장도 했다. “바둑대회에 공정성은 최고의 가치다. 이런 근원적인 문제조차 명쾌한 해답을 못 주면 향후 스포츠토토 도입 같은 건 바랄 수가 없다”는 의견도 있었다. P 원장은 “이건 입단대회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번 처리결과에 따라 향후 바둑계 전반적인 질서가 바뀔 수도 있다. 결과적으로 미비한 제도를 개선하고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고 조언했다.
이런 소란을 겪은 후 열린 16일 오전 입단대회(본선 32강)에선 보안 검색이 공항 수준으로 격상되었다. 한국기원은 운영위원회를 열어 향후 대책을 논의할 예정이다. 제145회 입단대회는 159명이 참가했다. 최종 입단자 5명을 선발한다. 예선을 거쳐 39명을 선발했고, 본선시드자 25명이 합류해 14일부터 22일까지 대회를 치른다.
박주성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