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권상우가 올해 첫 코믹 액션 영화로 포문을 연다.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지난 16일 오후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권상우는 회색 비니모자를 착용하고 있었다. “소라게를 의미하는 거냐”는 질문에 “원래 비니를 자주 쓴다”고 천연덕스럽게 답했다.
2005년 MBC 수목드라마 ‘슬픈 연가’에서 시청자들에게 스토리보다 더 큰 인상을 남겼던 그의 ‘집으로 들어가는 소라게 신’은 15년이 지난 지금 재평가를 받고 있다. 카카오톡 이모티콘으로 패러디된 것은 물론,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권상우를 한 번도 안 본 사람은 있어도 소라게 사진을 한 번만 본 사람은 없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그런 만큼, 촬영 당시 상황이나 드라마 분위기와 상관없이 장면만 유머로 소비한다는 지적도 함께 일 수밖에 없었다. 당사자의 입장은 어떨까.
“저는 소라게 장면을 흑역사라고 생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어요. 그 당시 잘나가던 멜로드라마의 명장면이잖아요. 오히려 자부심을 느끼는데요(웃음). 젊은 친구들한테는 그게 희화화돼서 알려진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저는 그게 기분 나쁘지 않아요. 어쨌든 저를 다시 생각해 주는 거잖아요? 배우는 대중이 잊으면 잊히는 사람인데 제가 쉬는 동안에도 계속 그렇게 회자되는 건 재밌고 즐거운 현상 같아요.”
실제로 권상우는 지난 1월 15일 방송된 MBC 예능 ‘라디오스타’에 출연해 다시 한 번 소라게를 소환해 냈다. 카카오톡 소라게 이모티콘도 사용 중이라고 밝혀 대중에게 국민 소라게의 자부심을 뽐내기도 했다.
배우 권상우는 영화 ‘히트맨’에서 완벽한 코믹 연기를 구축했다.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소라게에서 보듯 권상우는 망가진다는 것에 대한 주저함이 없는 배우다. 몸짱 배우로 먼저 이름을 알렸던 멜로-액션 전문 배우가 망가짐을 전제로 하는 코미디를 택하는 데는 도전 이상의 결단이 필요했을 수 있다. 이에 대해 권상우는 “찰리 채플린의 영화도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지 않느냐”는 말로 코미디 장르에 대한 호감을 설명했다.
“아무래도 코미디는 표현해내는 게 좀 더 어려운 느낌이 있죠. 우리만 재미있어야 하는 게 아니라 관객들의 웃음을 이끌어내야 하니까요. 제가 시사회 때 보니까 관객들 반응이 어느 지점에서 터지는지 다 다르더라고요. 사실 코미디가 사람들한테는 B급 정서처럼 느껴질 수 있고, 조금은 인정을 못 받는 장르인 것 같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표현하는 데) 최상위 장르인 것 같아요. 그래서 관객들에게 잘 먹히면 성취감도 제일 높은 게 아닐까 싶어요.”
1월 22일 개봉 영화 ‘히트맨’에서 그는 전직 국정원 소속 ‘전설의 암살 요원’이면서도 안 팔리는 웹툰 작가로서 권상우만의 코믹 연기를 완벽하게 구축해 냈다. 극중 권상우가 맡은 ‘준’은 사정없이 망가지고, 한없이 쭈그러지기에 피와 총알이 사방으로 튀는 액션 신을 펼쳐도 잔인하거나 무겁다기보다 관객들로 하여금 개그 신의 연장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자칫 잘못 하면 뚝뚝 끊길 수 있는 액션과 코미디의 키를 잡고 적절하게 완급 조절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이번에 ‘히트맨’ 같은 경우는 일단 장르적으로 다양한 연령층의 사람들이 봤으면 하는 영화거든요. 액션이 세긴 하지만 어린 친구들이 봐도 너무 잔인하거나 그런 건 없는 것 같아요. 장르의 그 톤에 맞춰서 관객들이 이해해주시길 바라는 마음으로 연기했어요. 아마 ‘추격자’ 버전의 ‘히트맨’이었다면 저는 또 다른 방식으로 연기하지 않았을까요?(웃음). 이번 작품은 유쾌함을 바탕으로 접근하려고 했던 것 같아요.”
영화 ‘히트맨’에서는 실제 미술학도였던 권상우의 옛 모습이 겹쳐진다.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극중 웹툰 작가로 분하다 보니 그가 맡은 캐릭터 준의 방은 만화책과 미술도구로 가득 차 있다. 능숙하게 태블릿 펜을 잡고 거침없이 선을 그어 나가는 모습이나 전문가의 손길로 4B 연필을 깎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미술학도였던 그의 과거가 눈앞에 그려지는 듯하다. 한남대학교에서 미술교육을 전공한 권상우는 실제로 극중에 등장하는 준의 초상화에 직접 덧칠을 하기도 했다고.
“예전에는 그림 그려서 친구들에게 선물도 주고 그랬는데…. 언젠가는 또 그리지 않을까 생각은 해요. 하지만 아무래도 지금은 일하는 게 우선이니까 거기에 집중하는 것 같아요. 극중에서 준의 초상화는 웹툰 작가님이 그려주신 건데 제가 촬영하면서 덧칠을 많이 했어요. 사실 저도 미술을 했지만 소묘랑 웹툰, 애니는 전혀 다르더라고요. 학교 다닐 때 반에서 만화를 잘 그리는 친구가 있다고 해도 그 친구가 아그리파(석고상)를 잘 그리진 않잖아요. 그런 거 아닐까요?(웃음).”
권상우가 보여준 연기의 디테일은 함께한 배우들을 통해 더욱 빛났다. 영화에서 첫 합을 맞춘 정준호(덕규 역)와 황우슬혜(미나 역), 이지원(가영 역), 이이경(철 역)은 물론, 앞서 ‘신의 한수: 귀수 편’에서 완벽한 케미를 보여줬던 허성태(형도 역)의 코믹과 액션을 넘나드는 연기를 감상하는 것도 ‘히트맨’의 또 다른 관전 포인트다. 이들에 대한 칭찬도 인터뷰 동안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었다.
“정준호 선배님 출연 소식을 들었을 때 든든했어요. 저보다 선배 연기자가 현장을 지키고 있다는 것에 마음의 짐을 덜기도 했고, 선배님이 자신을 내려놓고 유연하게 연기하시는 모습이 너무 재미있었거든요. 그 덕에 저희들도 더 가깝게 잘 지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성태는 이 영화를 찍을 때 저와 자주 마주치진 않았는데, 영화를 보니까 연기의 방향을 잘 잡은 것 같더라고요. 성태의 오판으로 인해 영화 속 사건이 커지는 거니까요. 황우슬혜 씨는 연기에 순수하게 접근하는 모습과 마음가짐을 보고 굉장히 보기 좋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지원이는… 이 친구는 감독님과 제가 동시에 찍은 아역 원픽이었거든요. 정말 특출한 아이예요. 그냥 연기를 잘하는 정도가 아니에요. 영화를 찍으면서 이 친구가 정말 특별하다는 걸 많이 느꼈어요.”
영화 ‘히트맨’ 스틸컷.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작품마다 연기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던 권상우는 여전히 고민이 많은 배우다. 데뷔 후 20년,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생길 법도 한데 그는 눈앞의 현재와 미래에 집중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앞서 여러 차례 인터뷰에서도 늘 그가 해오던 이야기다.
“제가 20대 때 한 인터뷰를 보니까 ‘30대 초반까지만 연기하고 싶어요’ 그러더라고요(웃음). 그러고 30대에 한 인터뷰는 또 보니까 ‘40대 초반까지 하고 싶어요’ 그러던데, 사실 어렸을 때는 자기가 하고 싶은 걸 다 할 수 있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나이를 먹으니 생각이 좀 달라지더라고요. 제가 병원 나이는 마흔셋이지만 한국 나이는 마흔다섯이잖아요. 물론 마음은 스물여덟에서 멈췄지만(웃음)…. 물리적으로 생각해 봤을 때 ‘내가 주인공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몇 년 남았을까’ 싶은 거죠.”
그렇다고 해서 그의 고뇌가 마냥 비관적인 것만은 아니다. 항상 오를 일밖에 없는 계단을 오르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보다 언제든지 한 칸씩 내려갈 수 있다는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게 그의 이야기다.
“저는 지금까지 잘 왔다고 생각해요. 마무리라고 말하기엔 너무 이르겠지만 좋은 행보를 최대한 이끌어서 내게 기회가 있을 때 열심히 하는 게 중요한 자세니까요. 제가 이런 고민을 우울하게 스트레스 받으면서 하는 게 아니고 실제로는 되게 즐겁게 고민하고 있거든요. 저는 나이를 먹는 게 기분 나쁘지 않아요. 모든 삶은 다 치열한 건데, 작품이 하나 안 되고 (자리에서) 밀리는 느낌이 나고 그러면 불안할 수는 있겠죠. 하지만 자연스럽게 나이가 들면서 내려오는 느낌이 난다면 편안할 것 같아요. 어떻게 잘 내려오느냐가 중요한 거죠. 저는 앞으로 10년이 중요할 것 같아요.”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