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 씨 이야기
“피고인 윤OO를 무기징역에 처한다.” 스물두 살 청년의 세계는 단 한마디로 산산조각 났다. 지금까지의 삶도 앞으로의 미래도 재판부의 주문과 함께 사라졌다. 항소와 상고까지 두 번의 재판을 더 받았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검사가 속사포처럼 범죄사실과 구형량을 낭독하면 재판부는 그대로 선고하고, 얼굴조차 몰랐던 변호사가 결과를 알려주는 일만 반복됐다. 대법원 선고가 내려진 1990년 5월 8일, 이날부터 윤 씨의 이름은 무기수였고 누구도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
세 번의 재판을 받는 동안에만 세 곳의 수감시설을 거쳤다. 안양에서 수원으로, 다시 원주로 옮겨 다녔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생각해볼 틈도 없이 하루가 정신없이 지나갔다. 불편한 왼쪽 다리로는 그곳의 ‘평범한’ 일과를 따라가는 것만 해도 벅찼다. 하루는 좁은 화장실에 겨우 쪼그려 앉아 일을 보고 있는데, 밖에서 빨리 나오라고 다그치는 소리에 급히 추스르다 그대로 주저앉아버렸다. 모든 게 원망스러웠다.
대법원 선고가 내려지고 다섯 달이 지나 다시 청주교도소로 옮겼다. 1990년 10월의 마지막 목요일이었다. 당시 장애인 전담교도소로 지정되면서 다리가 불편한 윤 씨도 그곳으로 갔다. ‘별 일 없으면’ 이곳에 쭉 있게 될 것이란 설명과 함께. 교도소에 만들어진 공장에 나가기 시작했다.
일이 손에 익고 일과도 따라 가게 됐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답답했다. “내가 왜 여기 있어야 하나.” 근본적인 의문이 가시질 않았다. 명치끝이 꽉 막혀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티를 내면 곧바로 징벌과 독방 수감 등 ‘별 일’이 생긴다. 매일 밤 가슴만 부여잡고 끙끙 앓았다. 지옥, 윤 씨는 교도소 수감생활 3년을 그렇게 표현했다.
이춘재 8차 사건으로 지목된 윤 씨와 박준영 변호사. 사진=고성준 기자
#교도관 김대근 이야기
“쟤가 ‘화성’ 건으로 들어온 그 친구다.” 청주교도소 근무 5년째, 특별관리 대상 수감자가 들어왔다. 보통 문제수 또는 특정강력범을 관리 대상에 올리는데 ‘그 친구’는 후자였다. 교도소 전체가 술렁였다. 나라를 뒤흔든 화성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이 들어왔다는 소문이 퍼지자 모두의 시선이 그의 하얗고 앳된 얼굴에 쏠렸다. 교도관들도, 수감자들도 그를 비난했다.
불편한 다리 말고는 특별히 눈에 띄는 게 없었다. 잔혹한 범죄를 저지른 무기수들은 그 말고도 많았다. 거의 대부분의 재소자들이 침울한 표정으로 매일을 보냈다. 멍하게 있다가 한숨 내쉬기를 반복하는 걸 보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충분히 알 것 같았다. 실컷 밖을 시끄럽게 만들고 왔으니, 안에선 소란스럽지 않게 조용히만 지냈으면 했다.
그런데 몇 년 사이 그가 달라졌다. 교도관, 재소자 가릴 것 없이 복도를 지나치며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웃는 시간이 많아졌고 먼저 다른 사람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전혀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 오가다 인사를 주고받고 한두 마디 던지다 보니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길어졌다. 금방 ‘사오칠(457·수인번호)’보다 ‘윤OO(본명)’가 더 익숙해졌다. 화성 사건의 범인이 아닌 내 앞에 선 ‘윤OO’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1996년 특별관리 대상자에서 해제되더니, 3급수로 시작했던 그가 1급 모범수가 됐다.
2019년 12월 30일 만난 김대근 전 교도관. 윤 씨가 처음 청주교도소로 이감된 이후부터 그를 옆에서 지켜봤다. 사진=문상현 기자
#윤 씨 이야기
“너 그렇게 하면 안 된다.” 출소를 앞둔 장기수 선배가 한 마디 툭 던졌다. 그동안 말없이 윤 씨를 지켜보기만 했던 그였다. 구석에 앉아 누구와도 대화하지 않고, 밥도 제대로 먹지 않으면서 시키는 일만 겨우 하는 그가 안타깝다며 던진 말이었다. 법원 판결이 내려지고, 이 자리에 있게 된 이상 결코 예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일러줬다. “살아라. 나중에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거다. 일단 살아라.”
윤 씨는 그의 말을 듣기 전까지 3년의 시간을 적응기간이라고 말한다. 그 짧은 한 마디에 살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안에선 ‘앞날이 없는 사람’으로 통하는 무기수가 ‘내일’을 떠올렸다. 교도관이든 재소자든 모두에게 친절하고 웃는 일부터 시작했다. 남들보다 한 발 빨리 움직이는 건 힘드니 먼저 일어나 두 발 더 움직였다. 그를 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달라졌다.
#교도관 최병관 이야기
윤 씨를 지켜보기 시작한 건 1995년부터였다. 행정업무를 볼 때였다. 먼발치에서 어디가 아픈지, 어떻게 생활하는지 간접적으로 볼 뿐이었다. 직업훈련 담당을 한 뒤로 가까워졌다. 윤 씨는 늘 웃었고, 뭐든 배우겠다며 열심히 하겠다고 했다. 양복을 만드는 양재(洋裁) 공장에서 일해오던 그가 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해 얼굴 앞에 내밀었다. 글을 배워 검정고시에도 합격했다.
매년 열리던 충북지방장애인 기능경기대회에 그를 내보내기로 했다. 처음 몇 번은 아무 소득 없이 대회가 끝났다. 바늘에 손을 찔려가며 연습했는데, 잘 안 되니 속상한 듯 그만하고 싶다고 했다. 윤 씨를 차례가 끝나고도 대회장에 계속 세워뒀다. 불편한 다리로 오랫동안 서 있는 게 얼마나 힘들지는 잘 알고 있었다. 앞에서 치열하게 경쟁하는 사람들을 보고 윤 씨 스스로 의욕을 가졌으면 하는 욕심이 앞섰다. 그리고 2002년 4월 28일, 대회에서 윤 씨는 장려상을 탔다.
그해 11월, 그가 뜬금없이 면담을 신청해왔다. 화성경찰서에서 수사접견이 왔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안절부절 하지 못했다. 청주교도소에 처음 이감됐을 때 봤던, 10여 년 만에 보는 표정이었다. 난처한 표정 속에 공포가 보였다. “안 했으면 안 했다고 해라. 고개 숙이지 말고 당당히 말해라”라고 말해줬다. 당시까지만 해도 화성 8차사건(이춘재 8차사건) 외에 단서를 찾지 못했던 경찰은 윤 씨에게 “공소시효가 지났으니 이제는 할 말 없느냐”고 묻고 갔고, 윤 씨는 “할 말 없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윤 씨가 교정시설에서의 일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이종현 기자
# 교도관 박종덕 이야기
1993년 10월 4일 청주교도소에서 첫 근무를 시작했다. 윤 씨가 교도소 생활 ‘선배’다. 막내 생활을 하면서 선배 교도관들을 따라 다니면서 그를 봤다. 아침에 공장에 나가고, 방으로 복귀할 때 물건과 몸을 점검(검신)하면서 마주쳤다. 표정이 늘 밝았다.
2000년 8월 15일, 윤 씨가 광복절 특사로 감형을 받았다. 당시 김대중 정부에서 헌정역사에 남을 대사면을 단행했는데, 윤 씨가 거기에 포함됐다. 늘 공란으로 비워뒀던 출소일이 서류에 찍혔다.
마냥 기쁜 것만은 아니었다. ‘다음’의 삶을 걱정해야 했다. 윤 씨는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다. 가족이 있지만 자주 찾아오거나 챙겨줄 형편으로 보이진 않았다. 가끔 열리는 가족 ‘만남의 날’에도 다른 재소자들이 불고기와 피자를 먹을 때 윤 씨는 김밥 한 줄만 먹었다.
감형이 결정되고 가석방 심사를 여러 차례 받았지만 ‘가족의 빈자리’가 컸다. 주기적으로 가족과 편지를 주고받고, 면회를 하며 돌아갈 곳이 있다면 가석방 심사에서 더 나은 점수를 받을 수 있지만 윤 씨는 출소일이 있는 2009년까지 점수를 받지 못했다.
사회복귀과에 근무하며 알게 된 종교인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천주교인이 된 그를 위해 교도소 봉사활동을 하는 성당 신부, 자매결연을 한 이들에게 윤 씨를 소개해주기도 했다. 그동안 알지 못했던 종교인들도 찾아다녔다. 나호견 뷰티플라이프 원장을 만난 건 그 무렵이었다(윤 씨는 출소 후 3년을 뷰티플라이프에서 머물렀다). 나 원장은 처음 장애가 있는 수감자는 곤란하다며 손을 내저었지만, 윤 씨를 몇 차례 만나보더니 마음이 달라졌다고 했다. 드디어 윤 씨가 갈 곳이 생겼다.
출소를 앞둔 윤 씨는 수감생활 초기부터 일하던 양재공장의 ‘반장’이 돼 있었다. 30~40명의 재소자들을 교도관들에게 위임 받아 관리감독하면서 수백 벌의 옷을 만들어 내는 자리였다. 공장 한 곳에 몇 명 없는 ‘반장’이 되기 위해선 일의 숙련도는 물론 교도관과 수감자 모두의 신뢰를 받아야 한다.
2008년 4월, 청주교도소에 출소를 앞둔 재소자들을 대상으로 한 취업지원시스템이 처음 만들어졌다. 회사나 공장 등과 재소자를 연결해주고, 취업보증서를 받아 사회의 일원으로 돌려보내는 과정이다. 고맙게도 윤 씨를 받아주겠다고 하는 공장과 회사가 나타났다. 2009년 8월, 윤 씨가 다시 세상에 나갔다.
1월 9일 대전에서 만난 박종덕 대전교도소 교감. 윤 씨가 출소 후 지낼 곳과 취업자리를 직접 찾았다. 박 교감은 2017년 법무부 제35회 교정대상을 수상했다. 윤 씨가 이 상을 수상할 때 추천서를 써줬다고 한다. 사진=문상현 기자
#행복을 말하다
김대근, 최병관 교도관은 각각 2015년과 2019년에 퇴직했다. 박종덕 교도관은 현재 대전교도소에서 교감으로 재직 중이다. 이들은 윤 씨에 대해 각각 다른 기억을 가지고 있었지만 공통적으로 윤 씨가 일관되게 무죄를 주장해왔으며, 재심에 대해 알아봐 달라며 여러 차례 부탁했다고 했다.
김대근 전 교도관은 “윤 씨와 사건 얘기를 하다보면 그는 늘 ‘눈 떠보니 범인이 돼 있더라’면서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를 체모를 갖다 놓고 나를 범인으로 몰아세웠다’라고 말했다”고 설명했다. 실제 윤 씨는 2019년 10월 경찰 재조사 과정에서 당시 경찰의 가혹행위와 허위자백을 주장했으며, 최근 검찰은 8차사건 국과수 체모가 조작(경찰은 오류라고 공식발표)됐다고 밝혔다.
최병관 전 교도관은 “윤 씨가 늘 밝게 웃으며 생활하면서 적응을 잘한 것처럼 보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며 “저녁에 복도에서 얘기를 하다보면, 가끔 창틀을 붙잡고 멀리 바라보며 한숨을 크게 쉬었다. 그러고선 하는 말이 ‘미치겠습니다. 정말 억울합니다’였다. 재소자들이 흔히 늘어놓는 푸념과는 달랐다”고 말했다. 윤 씨가 30년 전 ‘그 일’과 사건을 혼자 품고 지냈다는 게 최 전 교도관의 말이다.
박종덕 대전교도소 교감은 윤 씨가 일관되게 억울함을 호소한 데 주목한다. 그는 “재소자 가운데에선 억울하다고 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다만 형량이 예상보다 많이 나왔거나, 공범보다 더 무거운 처벌을 받았을 때 그런 표현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기본적으로 범행 사실은 인정한다”며 “윤 씨처럼 사건 전체를 가지고 억울하다고 하고, 적응하는 기간에 그치지 않고 20년 내내 무죄를 주장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라고 말했다.
세 명의 교도관들의 일요신문 인터뷰는 각각 다른 장소에서, 다른 날에 했다. 그러나 이들은 윤 씨가 억울함을 푸는 것뿐만 아니라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았으면 한다고 입을 모았다. 윤 씨가 이제라도 마음 맞는 사람을 만나 가정을 꾸렸으면 한다거나, 반대로 혼자 지내면서 그동안 못했던 일들을 마음껏 했으면 한다는 등 ‘구체적인’ 바람은 각자 다르지만, 전과자의 낙인을 벗고 ‘행복’하게 살길 원한다는 말은 같았다.
윤 씨는 다시 재판을 받는다. 수원지방법원 형사12부(김병찬 부장판사)는 이춘재 8차사건에 대해 재심을 개시하기로 결정하고, 2월 6일 공판준비기일을 열기로 했다. 윤 씨가 30년 전 재판을 받았던 그 법원에서 유무죄를 다시 가린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